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86화 (186/306)

187. 방황하는 마음. (5)

우뚝, 나는 익숙한 단어에 질겅이며 까딱이던 빨대를 움찔하며 멈춰 세웠다. …털려? 밟혀? 어쩐지 친숙한 말들이었다. 난 반사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두 남학생의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와, 시발. 지렸다.”

“어떻게 혼자서 수십 명을 상대하냐? 역시 존나 유명한 데엔 다 이유가 있네.”

…혼자서 수십 명. 유명하다. 나는 천천히 물던 빨대를 트레이 위에 툭, 올려 두었다.

“야, 우리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

“미쳤냐, 새꺄? 거기 빠져나오는 골목 좁은 거 몰라? 잘못 걸려서 뒤지게 맞을 일 있나. 지금 그 새끼 기분도 안 좋아 보여서 내 친구도 눈치 보다가 지금 튀었다던….”

멀어진 학생들에게서 더는 대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좁은 골목.’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가게를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라면 분명…!!’

지나치게 적은 정보량이 아닌가 싶을지도 모른다. 하나 이 동네를 훤히 꿰고 있는 내겐 그 정보만으로 충분했다. 즉, 그들이 말한 곳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장소라는 뜻이었다.

동네에 좁은 골목이야 많지만, 그중에 유달리 이름난 싸움 스폿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경찰도 자주 순찰하지 않는 우범지대였다. 게다가 구석으로 수세에 몰리게 만드는 불리한 구조라 그리 유명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한 사람 다굴 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아마 상대측도 그것을 원한 것이었겠지만….

‘상대할 사람을 잘못 골랐네.’

나는 마스크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일대에서 그렇게 강한 녀석은 손에 꼽혔다. 그리고 기분도 안 좋다니, 완전 내가 찾는 놈이랑 딱이지 않은가.

‘드디어 찾았다!’

역시 밖에 나온 보람이 있었다. 일을 크게 벌이기 싫어 한도훈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끙끙대고 있어 막 후회가 밀려오던 참이었는데 아주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딱 기다려라, 반휘혈. 이 누나가 간다!

나는 채 숨기지 못하는 미소를 마스크 안에서 그려 내며 빠르게 남학생들이 말한 장소로 향했다.

‘너무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부디 반휘혈이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길 바랐다.

그러한 간절히 기도한 마음이 통했을까,

“끄으….”

“사, 살려…!”

겨우 골목에 도착하자, 그 안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안 늦었다-!!’

나는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서둘러 그 안쪽으로 반가이 뛰어들어 갔다.

“앗, 뭐, 뭐야.”

그러다 순간 발에 차이는 묵직한 감각에 안으로 더 들어가다 말고 그 자리에서 살짝 휘청였다. 반사적으로 밑을 보자, 거기엔 혼절한 것같이 보이는 남학생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왜 사람이 여기에…? 얼떨떨히 눈을 깜빡이며 주위도 살펴보니 쓰러진 사람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엔 이 남학생처럼 기절한 이들이 널려 있었다.

‘워…. 살벌히도 싸웠네.’

딱 봐도 다들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이건 좀 심한데. 물론 다굴 친 놈들이 가장 잘못하긴 했으니. …뭐, 동정의 여지는 없나. 나는 질린 시선으로 그들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빨리 반휘혈이나 데리고 돌아가야겠다. 나는 다시 반휘혈을 찾기 위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휘혈…, 엇?”

어째서…,

“…….”

…익숙한 검은 뒤통수는 보이지 않고,

“…뭐야.”

어딜 봐도 튀는 금색이 눈에 띄는 걸까.

게다가 저 무심한 목소리도 내가 아는 그놈이 아니었다. …아니, 낯선 놈이 아니긴 한데, 그렇긴 한데…!! 당황한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망연히 서 있던 와중이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화려한 금발의 주인공이 발 앞꿈치로 지면을 가벼이 툭툭 두드리면서 몸을 살짝 돌렸다.

“호오-.”

그리고 모자챙 사이로 비친 내 눈과 마주친 건 익숙한 붉은 눈동자였다. 덕분에 내 얼굴은 자연스레 허망히 굳어 갔다.

“겁 없이 끼어든 멍청이가 누군가 했더니, 땅콩이잖아?”

“씁….”

망했군.

그것도 제대로 망했다! 나는 아찔한 감각에 한 손으로 얼굴을 깊게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최강혁.”

저절로 허탈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니, 찾고자 하는 반휘혈은 없고 웬 엉뚱한 최강혁이 이곳에 있는 것인가. 억울하고 허망한 마음에 나는 카페에서 들었던 남학생 놈들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수십 대 일. 유명하다. 그리고… 강하다.

‘…아, 미친. 그래. 쟤도 포함되는구나. 그렇지…. 참….’

반휘혈 생각으로 꽉 차 있다 보니 최강혁이란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왜 더 침착하게 생각을 못 하고 곧장 달려왔는가. 그만큼 여유가 없었나? 어른으로서 여유는 어디 다 던져 버렸나. 뒤늦게 자괴감이 밀려들어 나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아닌가?”

그때 최강혁이 그 긴 다리로 바닥에 엎어진 놈들을 넘어서며 내게 다가왔다. 방심하고 있던 사이 훌쩍 다가온 거리에 움찔 몸을 튀고 있자,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게다가 이 차림새….”

그가 낮게 중얼거리더니 손끝을 내 모자의 챙 부분에 걸치며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곤 슥 제 얼굴을 들이밀더니 흥미를 띤 목소리가 스산히 내게 속삭였다.

“조커로서, 인 거겠지?”

“뭐, 그렇긴 하다만….”

너무 가까운 거리감에 슬쩍 거리를 벌렸다.

‘그런데….’

어쩐지 이 녀석, 느낌이 이상했다.

‘왜… 눈이 맛 간 거 같지?’

게다가 웃는 것도 묘하게 이상했다.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은 미소가….

“……!!”

아, 설마. …설마???

“야, 잠깐. 잠깐잠깐.”

나는 황급히 최강혁과 거리를 확 벌리며 그를 제지하듯 손을 뻗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 설마는 아니지? 어?”

“뭐가 말이지?”

피식, 그가 조소를 그려 냈다. 그것은 익숙한 모습이었으나,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야, 눈이 안 웃고 있잖아…!!”

그도 그럴 것이 저 자식의 상태가 많이… 아주 많이 이상했다! 평소엔 날 향해 비웃더라도 진짜 웃겨서 비웃는 느낌이었더라면,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뭔가 살기까지 등등한 것이… 아니, 저건 누가 봐도 나랑 싸우고 싶은 분위기잖아!

“혁아. 나 좀 당황스럽다. 우리 좋게 좋게 대화로 해결하자.”

워, 워. 진정하자. 친구야. 나는 그와 거리를 유지하며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그러자 최강혁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흘리더니 내가 거리를 벌린 것이 무색하게 성큼 한 발자국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싫은데?”

젠장, 빌어먹을 체급 차! 빌어먹을 남주 새끼! 나는 이를 박박 갈며 다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아, 갑자기 이유가 뭐야? 나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거 아니냐고, 우리.”

그래. 생각할수록 정말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싸움을 거는 건 또 무슨 경우인가. 이런 적은 또 처음이라 당황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최대한 갈등을 피하고자 입을 놀렸다.

“뭐가 문제지?”

‘…너요. 너. 네가 문제다, 새꺄!’

그런데 최강혁이 말이 통하는 놈이 아니란 게 큰 골치였다. 왠지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 같았다.

‘뭔데. 대체 뭔데!’

왜 저 자식 심기가 저렇게 뒤틀린 건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안 본 사이에 이렇게 맛이 간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언제 만났지? 언제 마지막으로 봤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그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적이 언제인가 떠올렸다. 상황이 급박해서 잘 생각나진 않았으나, 다행히 그와의 만남이 지난주가 마지막이었음을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이상한 게 있… 아, 찬영이!’

그래. 맞다. 저 녀석, 고찬영이랑 싸우려고 했었지! 그리고 그게 불발이 됐고…, 어? 잠깐.

“야, 너 혹시… 찬영이랑 못 싸워서 지금 이렇게 화풀이하는 건… 아니지?”

움찔, 그의 몸이 튀었다. 게다가 그의 분위기도 더 험악해졌다.

‘정곡이었냐!!’

시발. 진짜 잘못 걸렸다. 진심으로 욕이 저절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식. 요즘에 학교 안 나온 이유가 설마 이거…?’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우리 반에 있는 최강혁의 팬들이 그가 학교에 안 나온다고 유독 실망해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게 안쓰러워 얘도 만만찮은 양아치네, 하고 넘겼었는데…. 설마 이렇게 싸움판을 전전하고 있었던 건가.

‘에라이…. 사춘기도 아니고, 진짜!’

아니, 사춘기 맞나? 어유, 아무튼 진짜 골치 아픈 놈들. 반휘혈도 그렇고 이 자식도 그렇고 내 두통은 너희들이 다 책임져 주는구나. 덕분에 저혈압 걱정은 없겠다, 정말. 나는 얼굴을 팍 일그러트리며 혀를 강하게 찼다.

“최강혁, 나는 싸울 생각 없어. 원하지도 않고.”

원래부터 쓸데없는 싸움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최강혁과의 싸움은 확실히 매혹적이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눈탱이가 맛이 간 놈이랑 겨루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하는 것이지, 이런 감정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아, 그래?”

콰직. 그 순간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아아-!!!!!!!!!”

그리고 동시에 새된 비명도 같이 터져 나왔다.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연하게 그를 보았다. 그러다 뒤이어 꽈드득. 그가 밟은 누군가 손을 발로 짓이기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울음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긴. 보는 대로지.”

나는 그 잔인한 행위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대로 계속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침착하게 경고했다.

“…그만둬.”

“왜?”

그가 진심으로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여상한 어조로 시큰둥히 말했다.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않나?”

“크억…!!”

그는 발을 들어 올려 고통에 숨죽여 울고 있는 놈의 등을 짓밟았다.

“나는 지루했고,”

꾸우욱, 점차 그 발에 힘이 실리며 갈비뼈를 위협스럽게 눌렀다.

“이 녀석들은 내게 시비를 걸었지.”

“끄으아아아…!! 사, 살려…!!”

“나는 거기에 장단을 맞춰 줬을 뿐이야.”

최강혁에게 짓밟힌 남자는 깊은 공포를 느끼며 최강혁이 아닌, 나를 보며 살려 달라 외쳤다. 나는 그에 눈을 질끈 감고 뜨며 다시 최강혁에게 낮게 경고했다.

“최강혁. 두 번 말 안 한다. 그만해.”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동안 그에게 도움받았던 전적과 그와의 연이 있다 보니 가만히 있었지만, 점점 한계였다. 지금이라도 그만둔다면 나도 그를 더 힐책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시비를 건 게 이들이 먼저였다면, 최강혁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치상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널브러진 인원수만 해도 가히 스무 명은 넘는데 누가 치사한 놈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더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었다.

“…아, 그 말.”

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거 지난번에도 한 것 같은데.”

그는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당신한텐 두 번째가…, 세 번째도 되고 네 번째도 되나 보지?”

히죽,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얼굴 가득 비소를 덧그렸다.

뚝,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무언가가 끊기는 감각이 들었다.

“하….”

이거 참…. 웃는 얼굴은 전염이 된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사실이었나 보다. 나 또한 그의 웃는 얼굴 자꾸 보니깐 나도 같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나는 싱긋 웃으며 척척 최강혁 앞에 다가섰다.

“야.”

“…….”

나는 꽈악, 그의 멱살을 잡았다. 붉은 눈은 여전히 무감한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더 끌어 내리며 그 시선을 정확히 내 시야에 맞추었다.

“넌 사람 공경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이… 개자식아.”

친절한 조언을 짓씹듯 덧붙여 주었다. 그러자 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의 시선이 살짝 가늘어졌다.

“훗….”

최강혁이 돌연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눈을 기이하게 빛나는가 싶더니,

“해 보든가.”

그 또한 순식간에 내 멱살을 잡아채며 조롱하듯 뇌까렸다.

“하하하.”

아, 자꾸 웃음이 나오네? 근데 뒷목도 같이 당기는 게 참 신기하다. 그의 멱살을 쥔 손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덕분에 손등의 힘줄이 잔뜩 불거진 지 오래였다.

“하하, …아.”

그리고 어느 순간 웃음을 뚝, 멈췄다. 찰나와도 같은 그 순간에 최강혁의 눈이 예리하게 좁혀졌고,

빡-!!

퍽-!!!

우리는 동시에 주먹을 갈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