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방황하는 마음. (8)
***
최강혁이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끔뻑,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를 맞추는 것처럼 눈이 깜빡였다. 그리고 차츰 뭔가 보이기 시작했는지 그는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오, 일어났냐.”
“…….”
그리고 그 눈동자와 딱 마주친 나는 성의 없는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의 시선이 가늘어지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처럼 그의 두뇌가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긴….”
곧 이곳이 어딘지 파악했는지 그의 낯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리고 동시에 방의 문이 벌컥, 열리었다.
“누나, 혁이 일어났…, 혁아-!!!”
포근한 분홍색이 쏜살같이 최강혁에게 달려들었다. 최강혁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달려드는 그 머리통을 한 손으로 바로 잡아채곤 저 멀리 밀어 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으에엥! 걱정하는 사람한테 이게 모야아아-!!”
최강혁의 가라앉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윤은 자신의 처우에 크게 반항했으나, 최강혁의 손은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보다시피 이윤의 집이지, 뭐.”
“하아….”
“왜 한숨이야?!”
짜증이 잔뜩 서린 한숨에 이윤이 볼을 퉁퉁 부풀렸다. 이윤은 파바박, 최강혁의 손을 풀어내더니, 옆구리에 손을 척 올리며 말했다.
“내가 너 옮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자, 빨리 말해. 유니야, 고마워~. 라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도 좀 거들려 했으나, 이윤은 괜찮다며 저 거구를 번쩍 들어 올렸다. 대체 저 작은 몸집에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건가 신기할 정도였다.
“누가 도와 달래?”
그러나 배은망덕한 최강혁 씨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이윤이 그 대답에 양 볼을 잔뜩 심통 맞게 부풀렸다. 음. 지켜보기만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점점 갈등만 과열될 것 같아 나는 슬쩍 중재를 나섰다.
“고맙다고 한 마디 하면 덧나냐. 윤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안 바랐어.”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역시 지독한 마이웨이답군. 하지만 이런 놈들이 주위에 포진했다 보니 이젠 좀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짚은 채 찬찬히 다시 타일렀다.
“내가 한도훈한테 연락 안 한 걸 다행으로 여겨라.”
“…….”
그러자 이번엔 좀 먹혀들었는지, 최강혁이 입을 다물었다. 역시 한도훈. 이름을 꺼내는 것만으로 굉장한 효과였다.
‘뭐, 실제로 걔 부를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사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한도훈을 부를 뻔했다. 병원을 가기엔 그 이후에 닥칠 후폭풍이 두려웠고, 그렇다고 아는 놈들 중에 마땅한 놈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떠오른 인물이 있다면, 역시 이럴 때만은 아주 듬직한 한도훈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연락하고 이 상황을 설명하기까지 지나쳐 온 수많은 일들을 알려 줘야 하는 역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한참 고심하고 있던 중, 한 연락이 도착했다.
[☆★세계 제일 귀여미 유니★☆(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누우나아아ㅏㅏ아ㅏ 오늘 머해여어어?????⸜(。˃ ᵕ ˂ )⸝⸜(。˃ ᵕ ˂ )⸝]
[한가하면 유니랑 노ㄹ ㅏ여어!!]
[(งᐛ)ว (งᐖ )ว(งᐛ)ว (งᐖ )ว]
유레카…!! 나는 때마침 도착한 문자에 두 손으로 핸드폰을 꽉 쥐며 환호했다. 세상에, 이 부담스러운 메시지가 반가울 날이 오다니! 저장된 이름은 이윤과 전화번호를 교환할 때 그가 등록해 준 것이었다. 귀찮아서 바꾸질 않았는데, 정말 등록된 이름처럼 찰떡같은 내용들이 도착할 때 얼마나 낯설었던지! 하지만 지금만큼은 너무나 반가운 그의 등장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리고 이윤은 빠르게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해 주었고, 고맙게도 군말 없이 자신의 집으로 최강혁을 데리고 가 주었다.
‘뭐, 치료는 우선 내가 해 뒀다만.’
이윤은 혼자서 자취 중이었다. 이 학교로 오면서 본가와 멀어져 자취를 택했다나. 아무튼 그러다 보니 가정부 아주머니께선 오시긴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아니라 집에 아무도 없었다. 내 입장으로선 참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집에 구비된 응급 키트로 최강혁의 상처를 치료했고, 그 이후엔 내 상처도 돌보았다. 옆에서 이윤이 도와주고 싶어 했으나, 손만 대면 엉망이라 결국 내가 다 한… 그런 소소한 에피소드도 일어났지만, 뭐 결과적으론 좋은 상황이었다.
“아무튼 윤이니깐 조용히 넘어가는 거라고. 고마운 줄 알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뒷목을 문질렀다. 그러다 삐걱거리는 몸을 느끼곤 인상을 살풋 찡그렸다.
“그래! 혁이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아, 시끄러.”
“우으…! 혁이, 너 자꾸 그러면 유니 진짜 화낼 거야!”
“하든가 말든가.”
“으이익…!!!”
그러든 말든 두 사람은 여전히 옥신각신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었다. 그러곤 여상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최강혁.”
그를 부르자, 최강혁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시큰둥히 이어 물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그렇게 기분이 저조하셨나.”
“네?”
“…….”
내 질문에 이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응했다. 그러나 정작 질문의 당사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나는 그런 그를 가는 시선으로 보다가 이윤에게 말했다.
“윤아. 잠시 둘만 있게 해 줄래?”
“네? 왜요?”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어서.”
“우음….”
이윤의 커다란 눈이 데록 굴려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를 담뿍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래, 고맙…,”
“대신 내일 저랑 놀아 주기!”
“……어?”
“그럼 이따 봐요, 누나~. 혁이두 이따 봐!!”
탁, 이윤은 산뜻한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눈 뜨고 코 베였다는 게 이런 건가. 나는 떠난 그의 자취를 망연히 뒤쫓다 허망한 헛웃음을 흘렸다.
‘너는 이 몰골이… 보이지 않는 거니?’
지금 내 얼굴은 누가 보아도 어디 놀러 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콧등은 거즈로 덧대어있고, 입가는 다 터져 연고가 덕지덕지 발린 것도 모자라, 최강혁에게 정통으로 맞은 볼은 이미 땡땡하게 부어오른 뒤였다. 냉찜질로 가라앉혀 그나마 사람 같은 몰골이 되었긴 하나, 여전히 시큰한 통증과 전신의 근육통이 잇따랐다.
‘이런 상태로 잘도 놀 수 있겠구나….’
정말 쟤는 나랑 놀지 못하면 안 되는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왜 저렇게까지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야 매번 제안해 줘서 고맙긴 하다만, 계속 거절하는 입장으로서 참 난처했다.
‘뭐…. 그래도 이번만은 들어주는 게 좋으려나.’
이윤이 없었다면, 꽤나 난처한 상황이 따라붙었을 터였다. …어쩔 수 없지. 내일 길거리에서 따라붙을 다양한 시선들과…, 한도훈의 집요한 간섭이 걱정이긴 하나, 저렇게 원하는데 한 번은 들어줘야만 할 것 같았다.
‘아, 휘혈이도 만나야 하는데.’
다 글렀군. 나는 빠르게 체념하며, 반휘혈과의 만남은 다음 주로 기약하기로 했다. 뭐, 다음 주엔 학교에 나오겠지…. 나와야만 한다. 정말.
“하아-. 그래. 아무튼, 그러니까… 무슨 얘기 했더라.”
“…….”
생각이 잠시 삼천포로 빠져서인지 순간 어떤 얘기를 했는지 까먹었다. 그런 내게로 최강혁의 한심한 시선이 뒤따랐다.
“아-, 그래. 기억났다. 기억났다고.”
덕분에 욱, 하고 치미는 감정에 무슨 말을 하려 했었는지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뚱하니 입술을 삐죽이다 툭, 하고 그 내용을 꺼냈다.
“너, 그렇게 싸운 거 찬영이 때문이랬지?”
“……!”
최강혁이 몸이 움칫, 떨렸다. 무감했던 그의 눈에 한순간 이채가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마주하다 한숨을 쉬며 뒷말을 이었다.
“하아…. 너, 알고 있지?”
“……뭘.”
많이 늦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이 평소와 달리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 덕에 내 확신만 부추겼다.
“찬영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
“그리고 그 덕에 무슨 꼴을 당했는지도.”
꾸욱, 최강혁의 쥔 주먹의 손등이 힘줄로 불거졌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돌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것을 보며 성가신 마음이 들어 머리를 헝클였다.
“도훈이야? 알려 준 거.”
“…….”
최강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뭐, 그건 딱히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이런 정보를 알려 줄 만한 건 모든 정보를 쥐고 있는 한도훈밖에 더 있겠는가.
최강혁이 잠들어 있는 동안, 나도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미쳐 있다시피 싸움을 하고 있는 건가. 게다가 분노와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이 자리 잡은 지금, 다시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니 그는 어딘가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단서라곤 그가 싸우고 있던 연유를 캐물을 때, 나왔던 고찬영의 이름뿐이었다. 그러자 나는 불쑥, 어떤 일련의 사건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알았구나.
그는 사건의 내막을 파악한 거다. 그것은 확실하건대, 분명 고찬영에게 다시 리매치를 걸기 이전이리라. 그렇다면….
그땐가….
그가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을 법한 날짜는 주연희의 왕따 가해자들을 소탕하는 그날 밤. 분명 한도훈이 최강혁을 도발했던 게 떠올랐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묻자. 그런 삶을 사는 건 무슨 기분이야? 응?’
‘쯧.’
한도훈, 그 자식을 진짜…. 다시 생각해도 성가신 일에 혀가 저절로 차졌다. 아마 최강혁은 그것을 마음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를 떠나고 난 후, 바로 얘기가 오갔을 수도 있었다.
‘…그때 해산하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로써 몰고 올 파장이 어떠할지 벌써부터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인소 속 남주가 흑막의 내막을 이렇게 깊이, 빠르게 파헤친 적이 있던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여주와의 진척이 무엇도 안 나간 지금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진짜 한 치 앞도 모르겠네.’
나의 간섭으로 이 세계의 운명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바뀐 건가. 불현듯 찾아온 중압감이 심장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래서.”
상황이 복잡하게 꼬이는 것 같아 심란해진 와중, 최강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바로 들자, 가라앉은 낯의 최강혁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뭐?”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최강혁이 무감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그 또라이가 확실히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긴 하나 봐? 별걸 다 떠벌리고 다니는군.”
그러곤 픽, 하고 비소를 지었다.
“이미 상황은 다 알고 있었던 것 같고…. 너, 그 고찬영 녀석이랑 친구라고 했던가? 왜, 나한테 보복이라도 하고 싶나? 친구가 그렇게 당한 게 안타까워? 응?”
“…….”
“그런데 이걸 어쩌지?”
최강혁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한순간에 모든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나를 차갑게 쏘아보며 단호히 말했다.
“난 잘못한 거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