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90화 (190/306)

191. 방황하는 마음. (9)

그 날카로운 기세에 순식간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녀석, …대체 뭐라는 거지?’

누가…, 그걸 몰라? 나는 딱히 그 일에 관해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굉장히 당혹스럽다.

게다가 최강혁이 날 대하는 태도도 어쩐지 기이했다. 저 버릇없는 입방정은 여전했으나, 그 분위기가 달랐다. 이전에는 여유로운 태도가 베이스였다면, 지금은 그 여유가 한 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전에도 그리 다가가기 쉬운 인상이 아니긴 했지만, 현재 그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할 것 같은 철벽이 느껴졌다.

‘흐음.’

이상하네. 뭔가 감이 잡힐 듯하면서도 감이 안 잡힌다.

‘왠지 묘하게 낯익은 느낌도 나기도 하고?’

눈을 한번 데록 굴리며 고심해 봤으나, 끝내 명쾌한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왜, 말이 없지?”

그런데 그러한 침묵이 최강혁의 심기를 거슬렀나 보다. 최강혁이 으르렁거리며 이를 보였다. 꽉 쥔 주먹은 위협스럽게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아, 이러다간 2차전 벌이겠는데. 하나 안타깝게도 내겐 더 이상 싸울 기력은 한 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장 내일 일어날 때 근육통과의 격렬한 싸움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지금도 조금 버거운데, 여기서 상처를 더 늘려 정말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불상사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억지로 입을 열어야만 했다.

“어…, 음. 그래.”

그랬구나. 넌 잘못이 없구나. 나는 깊이 알겠다는 듯 적극 고개까지 끄덕여 줬다.

“……그게 끝?”

“더 할 말이…, 필요해?”

어라, 부족했나? 진짜 할 말이 없는데. 곤란하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주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최강혁의 낯이 불쾌한 듯 서서히 구겨졌다.

“지금 날 깔보는 건가?”

그의 얼굴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뜻으로 한 말이 아닌지라 억울했으나 역시 적당한 대답은 떠오르질 않았다.

“아니, 진짜 할 말이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잘못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굳이 잘잘못을 따져야 하나…? 어디까지나 나는 그 관계에 있어선 외부인에 불과한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는 고찬영과 내가 친구라고 화낼 줄 알았나 본데 우선 이게 가장 큰 착각이었다.

“지금 내가 당신한테 졌다고, 무시하나 본데…!”

벌떡, 그가 몸을 일으켰다. 최강혁은 내 발언으로 화가 잔뜩 났는지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야, 진정해, 진정! 왜 이렇게 화가 많아!”

“웃기지 마. 그냥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붙어!”

“진정하라니까!”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기세였다. 그래서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진정시켰다.

“우선 나 그때 걔랑 친하지도 않았고, 또 그 녀석, 서울에 온 원래 목적이 너랑 싸우려는 거였잖아! 그러다 그 도중에 일이 틀어진 걸 왜 네 탓을 해야 하는 건데?!”

우다다 변명 같은 말을 쏟아 내자 최강혁은 덤벼들 듯 앞세우던 몸을 멈추었다. 다행히 말이 먹혔나 보다. 나는 안도하며 반쯤 일으켜진 그의 몸에 다시 앉으라 손짓하곤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그렇잖아. 네가 고의로 벌인 일도 아니었고, 그냥 휩쓸린 거잖아? 또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도 찬영이는 널 딱히 원망하지도 않았고, 리벤지할 생각도 없어. 또 연희 일도 마찬가지고. 뭐, 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크긴 하다만…. 뭐, 알아도 널 힐난하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주연희는 분노를 느낄지언정 그게 최강혁에게 향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이번 왕따 사건에서 문설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확실히 느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너한테 그 일로 화를 내면… 그게 찬영이나 연희를 위한 건가?”

난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는 그냥 순전히 내 개인적인 화풀이가 되는 거였다. 이것은 고찬영이나 주연희의 일을 핑계로 댄 것뿐, 그냥 최강혁에게 화를 내고 싶은 게 아닌가? 최강혁이 짜증 나는 놈은 맞지만, 그렇다고 틀린 사실을 맞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 말대로 너 잘못 없어.”

그래서 나는 그에게 확고히 말했다. 딱히 오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솔직한 감상이었다.

“…….”

그러자 내 대답을 들은 최강혁의 낯이 어딘가 아연해졌다. 그는 맥이 빠진 듯 힘없이 다시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최강혁은 내게서 이런 소리를 들을 거라고 전혀 몰랐나 보다. 마치 어딘가 그의 경계가 누그러지며, 강고히 세워진 벽이 허물어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으음…?’

그러자 최강혁의 모습과 반대로 나의 예리한 감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허탈해 보이는, 긴장이 풀린 것 같은 그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 한 소리를 듣길 기다렸던 것 같은 자태가 아닌가.

‘…이걸 내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한 기억이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그와 덧대어졌기 때문이었다.

‘아.’

그제야 방금 느꼈던 기시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왜 바로 눈치채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간단한 답안이었다.

“너….”

“하, 하하….”

놀라움에 입을 달싹이는데, 갑자기 그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자조와도 같은, 아니, 무언가 김이 빠진 듯 허탈한 소리였다. 최강혁은 자신의 이마를 감싸며 자신의 눈을 가렸다.

“…바보 같네.”

누가? …라고 묻는다면, 너무 눈치 없는 거겠지. 나는 최강혁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래. 답지 않게 바보 같은 생각을 했네.”

정말 그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게,

“네가 설마 그 일에 죄책감을 느낄 줄 전혀 몰랐는걸.”

설마 그 최강혁이, 그러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개소리.”

이런 내 말에 최강혁이 뒤늦게 부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늦어도 한참 늦은 대답이었다. 그게 내 생각에 신빙성을 더한다는 걸 그는 알까 모르겠다.

“대답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시끄러. 그딴 거 아니야.”

“솔직하지 못하긴.”

“아니라고.”

그래서 내가 그를 놀리듯 말하자, 최강혁이 고개를 팩 돌리며 시큰둥히 반박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정말 아니었으면 대차게 정색을 했을 놈이…. 나는 녀석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다 문득 앳된 녀석의 옆태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애긴 애네.’

하는 행동이 워낙 짜증 나고 도발적이고 마이웨이라 그런지,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는 열일곱 살이고, 한창 방황하는 시기임을. 그리고 감춰져 있던 그 실상이, 열일곱 살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운 현실이었음을.

“…….”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복잡해졌다. 나는 잠시 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최강혁은 묘하게 힘이 빠진 듯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는지 얼굴 한편이 그늘져 보였다.

“너도 참… 쓸데없는 걸로 고민한다.”

아무래도 최강혁은 상상 이상으로 인간적인 놈이었나 보다. 이런 책임감을 느끼는 놈일 줄은 전혀 몰랐는데 말이다.

“…시끄러.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귀가 막혔나? 내가 뚫어 줘?”

“사람이 기껏 걱정했더니만….”

“필요 없어.”

“야박한 새끼….”

에잇. 쯧. 괜히 마음을 쓴 내가 멍청이지. 잠시 언짢게 툴툴거리고 있는데, 문득 잊힌 일이 떠올랐다. 그 일을 떠올리자 나의 얼굴은 대번에 구겨졌다.

“야, 근데 진짜 화내야 하는 건 나 아니야?”

“……?”

최강혁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의문을 띄웠다. 나는 그 얼굴을 언짢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정작 진짜 너 때문에 피해를 본 건 나잖아. 이유 없이 그냥 찬영이 친구나 연희 지인이라는 이유로 시비가 털린 난 대체 뭔데?”

아, 진짜 생각할수록 열받네? 내일부터… 아니, 당장 오늘부터 무슨 소문이 나돌지 걱정이 드는 판국인데 이 자식은 나한테 사과 한마디도 안 한다.

“…그러게 누가 거기 지나가래?”

게다가 저런 몹쓸 대사까지! 나는 얼굴을 확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최강혁은 슬쩍 내 시선을 외면하더니 끝내 나를 보지 않았다.

“어휴, 됐다, 됐어. 이긴 걸로 만족해 줄게. 다음에 또 그러면 진짜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너어는 진짜 내가 착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훨씬 더 어른인 내가 봐준다, 정말. 나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은 벌써 저녁 시간에 다다르고 있었다. 슬슬 집에 가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아, 최강혁.”

그리고 문밖을 나서기 전, 나는 다시 최강혁을 돌아봤다. 안 나가고 뭐 하냐는 냉정한 시선이 따라붙어 빈정이 좀 상하려 했지만, 나는 훌훌 털어 내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마음이 쓰이면, 두 사람한테라도 사과하든지.”

“뭐?”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네가 주연희 때리려고 한 거 잊었어? 또 찬영이한테 저번 주에 쓸데없이 시비 걸었잖아. 그런 거 사과하라고.”

“…….”

“쓸데없는 곳에 분풀이하지 말라는 어른의 충고니 깊이 새겨 두도록. 그럼 난 진짜 간다.”

나는 뒤를 돌아 문을 열었다. 최강혁을 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들며 문밖을 나섰으나, 내 뒤로 붙잡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방의 문을 닫은 후, 뒷목을 대충 문질렀다.

‘뭐어…. 이제부턴 알아서 하겠지.’

비록 나는 못 받았지만, 그 두 사람이라면 얘기가 좀 다를 것 같았다. 그 최강혁치곤 꽤나 오랜 기간 고민한 기색이 느껴졌지 않은가. 무엇보다 도망치는 건 정말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명색이 남주니까 알아서 잘 해 봐.’

힐긋, 마지막으로 닫힌 방문을 보며 마음속으로 응원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이윤에게 작별 인사를 남기고 그 집을 떠났다.

***

이윤의 집 밖을 나선 후, 아직 밝은 태양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그 녀석이랑 겹쳐 보일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방금 최강혁과 겹쳐졌던 인물을 떠올렸다.

“설마 이수가 그때 떠오를 줄이야.”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당시 서이수의 잔상을 떠올렸다.

‘내, 내 잘못 아니야….’

울렁, 시야가 흔들렸다. 불시에 찾아온 감각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익숙하게 대처를 하며 다시 눈을 뜨자, 어지럽던 시야가 다시 잡혀 있었다. 나는 그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필 떠올려도….’

방금 스치듯 떠오른 것은 어린 날, 서이수가 내가 아끼던 장난감을 망가트려 내 눈치를 잔뜩 살폈던 일이었다. 그때 내게 혼이 날까 봐, 눈물을 훌쩍이면서도 괜히 화를 내던 그 밉살맞은 놈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이건 대체 언제쯤 나아지려나.’

이 세계의 서이나의 기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만, 서이수와 관련된 기억만큼은 쉽지가 않았다. 나는 난처함에 볼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그건 그렇고. 최강혁 그놈도 참… 웃긴 놈이네.”

나는 최강혁이 있을 곳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조금이라도 멀쩡한 놈이었으면 모를까, 그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자기만 아는 놈이 그런 이타적인 감성을 꿈에도 느낄 줄 몰랐다. 그렇기에 그가 이상한 태도를 보였어도 나는 그것을 곧장 깨닫지 못했다. 아마 서이수가 겹쳐 보이지 않았다면, 이것은 끝내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최강혁에 대한 이미지를 한 번 더 재고해 볼 여지는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뭐~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역시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가능성이 넘쳐서 참 좋네.

기분 좋은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방금까지 느꼈던 울렁임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상처와 근육통으로 삐걱거리는 몸과는 별개로 발걸음만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을 느끼며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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