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방황하는 마음. (10)
***
이윤은 떠나는 서이나의 등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후훗~.”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이윤은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두 손으로 가리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누나랑~ 논다네~, 드디어~ 논다네~. 헤헷!”
폴짝폴짝 뛰는 그의 모습은 기쁜 마음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동안 한도훈의 강한 철벽과 방해로 인해 친해지고픈 사람과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여간 억울한 게 아니었던 그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도훈을 미워하는 건 또 아니었지만, 속상한 건 속상한 것이었다.
비록 서이나가 싸우고 다친 직후인 게 마음에 걸리긴 하나, 그것 또한 괜찮았다. 그 정도면 밖이 아닌 그녀의 집이나 자신의 집에 또 초대하면 그만이었다. 아니면, 영화를 본다거나 카페에 가는 것도 좋겠지. 활동적인 움직임은 최대한 제한해 보자 다짐한 그는 기쁜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혀억아~! 몸은 괜찮…, 응?”
이윤은 문을 활짝 열며 친구의 안부를 물어보려다 보이는 광경에 순간 발을 멈추었다.
“혁아?”
그도 그럴 게, 그의 친구가 벽에 기댄 채 어딘가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의 목소리도 못 듣고 말이다. 평소에도 자주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그였으나, 이번에는 그 모습이 달랐다. 지금은 정말 못 듣는 것 같은 모양새가 아닌가.
이윤은 그런 그의 모습이 이상해 고개를 갸웃하며 최강혁에게 총총총 다가갔다. 그리고 그 침대 밑에 풀썩 주저앉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와.’
아직도 모르나 보네? 최강혁은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어도 이윤이 다가온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이윤은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기분은 나아졌나 보다~.’
원래도 그리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편은 아닌 최강혁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은 정도가 좀 심했다. 이전의 최강혁은 오는 싸움 막지 않고 도망치는 놈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미친놈처럼 싸움을 찾아다니는 모습에 좀 걱정이 되어 슬슬 말려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것도 다 지루해서 그런 걸까? 하며 말리진 않았었지만…, 그래도 걱정되긴 매한가지였다.
‘이것도 다 누나 덕이려나?’
히힛. 이윤은 기분 좋게 웃음을 작게 흘렸다. 아까 쓰러진 최강혁을 마주했을 땐 이윤도 굉장히 놀랐었다. 설마 제 친구를 이런 몰골로 마주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다름 아닌 그 최강혁을 말이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얘 좀 짊어지는 것 좀 도와줘.’
그런데 제 친구보다 몰골만은 더 처참한 형태인 서이나가 하는 소리에 이윤은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상황 또한 눈치챘다. 최강혁과 서이나가 맞붙었고, 또 자신의 친구가 졌음을 말이다.
그 사실에 또 한 번 놀란 이윤이었으나, 곧 서이나가 피로에 찌든 신음을 내지르는 걸 듣곤 바로 최강혁을 짊어졌다. …그때는 정말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되나, 혁이가 일어나서 누나한테 또 시비나 해코지를 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었으나,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로 그쳤다.
‘역시 누나한테 맡기길 잘했어.’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서이나의 요청에 따라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줬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말릴 생각이었다.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며 방을 주시한 지, 몇 분. 서이나는 자신이 방을 떠나며 본 모습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는 방증이었고, 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 또한 그것을 증명했다.
최강혁의 분위기가 확실히 누그러졌다. 그것은 요 며칠을 두고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이젠 기억나는 것도 아득한, 흐릿하기 그지없는 어린 날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멍해 보이는 친구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친구는 만사 권태롭긴 하나, 기민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예리해서 그런 거까지 다 느낄 정도냐고 할 정도였다. 잠귀도 밝은 편이라 잠도 깊게 못 잔다나. 기척에 여러모로 예민한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아직도 의식하지 못한 건 그만큼 기적에 가까웠다. 이윤은 그러한 낯설지만, 어쩐지 반가운 그의 모습에 실실 웃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그 모습을 즐긴 다음, 그를 불렀다.
“혀억아아-!!”
“……!!”
큰 외침에 최강혁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윤은 두 손으로 헤죽거리는 입을 가리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최강혁은 그런 이윤의 모습에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너 언제 왔어.”
“유니는 아까부터 여기 있었는데? 혁이를 몇 번이나 불렀는데? 유니 목소리 못 들은 건 혁이인걸~. 뭘 그렇게 생각하길래 눈치를 못 챈 거야? 응? 응?”
이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최강혁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최강혁은 이윤의 낯을 질색하며 치워 버렸다.
“꺼져, 좀.”
“시이러어~. 유니도 궁금하단 말이야~~. 이제까지 아무것도 안 물어봤잖아~~. 뭘 그리 생각했는지만 알려 줘어어어~.”
바둥바둥하는 몸짓이 여간 거슬린 게 아니었다. 최강혁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이윤을 꾹꾹 밀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어깨는 서이나의 강한 일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망가져 있었고, 이윤은 건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이 싸움의 승자가 누군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
“알려 주지 않으면 나 여기서 안 내려간다~? 괴롭힐 거다~?”
결국 이윤의 발버둥에 져 버린 최강혁은 침대에 드러눕혀졌고, 이윤은 그 위에서 승리의 미소로 방글거렸다. 최강혁은 그런 이윤을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닌데 왜 말 안 해 줘~?”
“…….”
최강혁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마운트를 잡혔는데 이겨 먹는 거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최강혁은 패배감에 이를 바득 갈다가 곧 툭,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이상해서 그런다.”
“뭐가?”
그러나 이윤은 그 한마디를 들었다고 호락호락히 내려갈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순진무구하고 무해한 얼굴과는 달리 오랜 기간 최강혁의 친구로 있던 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일이 갑자기 쉽게 보여서, 그게 이상해서 그런다.”
결국 이번에도 진 것은 최강혁이었다. 연이은 패배 속에서 최강혁의 얼굴이 굳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게 쉽게 보여? …음?”
그런데 이윤은 그 말에 의문을 품었다. 이윤은 제 손에 힘을 풀며 자신의 턱에 손을 얹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너 그거 예전부터 했던 말이잖아. 그거 되게 기분 나쁘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랑은 달라.”
“다른 거야?”
“그래. …그러니까 이제, 좀, 비켜.”
최강혁의 커다란 손이 이윤의 작고 폭신한 분홍 머리를 부여잡고 저 멀리 치워 버렸다. 불시에 이루어진 그 공격에 이윤은 속수무책으로 악, 하고 짧은 신음을 내며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우이씽…. 아파아아…. 너무햇…!”
이윤이 즉각 핀잔을 던졌다. 하지만 최강혁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싸늘히 외면했다.
“칫. 뭐, 어쨌든 간에 그거 다 누나 덕분인 거지?”
“…….”
“헤헤헷.”
이윤이 해맑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하나 최강혁은 묵묵부답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런 최강혁의 모습에도 이윤은 아랑곳 않고 자기의 말을 이어 갔다.
“그럼 혁이도 누나가 좋아진 거지?”
그렇다면 내일 자신과 누나랑 함께 놀지 않겠냐고 제안을 꺼내려 했던 이윤이었다. 그런데, 최강혁이 그 말을 듣더니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려.”
“응?”
나직한 목소리에 이윤이 바로 반문했다. 그런데 최강혁이 고개를 제 쪽으로 홱! 하고 사납게 얼굴을 돌리며 버럭 소리쳤다.
“틀리다고!!”
갑작스러운 고함에 이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그런 땅콩을 왜 좋아해?! 웃기지 마-!!”
그러곤 휙, 하고 침대의 이불보를 뒤집어쓰며 침대 속으로 사라졌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 이윤은 얼떨떨하게 봉긋 솟아오른 침대를 바라보았다.
‘땅콩…?’
그러다 그는 귓가에 머문 그 단어에 고개를 크게 갸웃거렸다. 그것은 분명, 이전에 학교에서도 서이나를 그리 불렀던 별명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부른 ‘땅콩’이라는 단어였다. 이전에도 그저 놀리기 위한 우연이라고 치며 넘어가긴 했으나, 이번만큼은 정말 확실했다. 최강혁은 서이나를 ‘땅콩’이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윤은 그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이불 속으로 사라지기 전, 그의 얼굴이 언뜻 붉어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음. 이건 잘못 본 거겠지! 이윤은 생각을 정리하며 이불 안으로 사라진 최강혁을 콕콕 건드렸다.
“혁아, 너 전에도 누나 땅콩이라고….”
휙-!!
“앗!”
이윤은 불시에 날아온 베개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그는 흐잉, 하고 울상을 지으며 최강혁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최강혁은 그런 이윤을 보지도 않은 채 단호한 손짓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나가.”
“여기 내 방,”
“나가.”
“우우…. 혁이는 제멋대로야!”
타협 없는 강압적인 목소리에 이윤의 볼이 퉁퉁 부었다. 그는 잔뜩 성이 났다는 걸 티 내고 싶었는지 발을 쿵쾅쿵쾅 바닥을 구르며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 그는 최강혁에게 소리쳤다.
“혁이가 그렇게 부인해도 난 다 알아! 혁이는 누나 좋아하는…! 앗!”
휙-!! 하고 이번엔 이전과 확연히 다른 스피드로 내던져진 베개가 그에게로 직격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윤은 최강혁을 향해 베- 하고 혀를 쏙 내밀었다.
“혁이는 바보! 누나한테 또 맞아 버려라!”
"…….“
스윽, 최강혁의 손이 침대맡에 있는 협탁으로 향했다. 그의 손이 설치된 간이 전등을 부여잡는 거까지 본 이윤은 냅다 문을 닫았다.
“흥, 흥! 혁이는 바보야, 바보! 완전 바보!”
이윤의 볼을 심통으로 잔뜩 부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나, 내일 너 초대 안 할 거야! 후회해도 소용없어!”
그 결심은 최강혁의 귀에 닿지 못했다는,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현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