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수면 아래. (3)
[└조커님사랑합니다 : 좋은 방법이긴 한데요...]
[└조커따까리 : 포에버님 저흰 정체 드러내는 거 금지잖아요...]
그러나 그 뒤를 잇는 반응은 시원찮았다. 다른 팬들은 대놓고 응원단으로 간다고 난리인데 우리는 불가능하다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그들이 피눈물을 삼키며 애써 외면하고 있자 제안을 했던 유저가 바로 내용을 덧붙였다.
[♡♥조커포에버♥♡ : 그럼 저희도 다른 팬인 것처럼 위장하고 가면 되죠! 그 많은 사람 속에 숨었는데 설마 알아보겠어요?]
[└☆조커팬1호☆는바로나 : 어?]
[└조커따까리 : 어?]
[└조블리♥♥♥ : 와... 천재? 포에버님 천재??????]
[└조커없음내목숨도없음 : 어...???? 그럼 저 응원가도 되는 거? 조커님 만나러 가도 되는거???]
[└조커의충직한몸종 : 저 그럼 고찬영 팬으로 위장하고 가겠습니다.]
[└조커님사랑합니다 : 앗 그럼 전 반휘혈!]
순식간에 사이트는 다른 의미로 뜨거워졌다. 유저들은 그들의 우상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운을 떼니 곧장 연이어 반휘혈 팬, 한도훈 팬 등등으로 위장하겠다고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어, 어어…?”
그리고 그것을 보며 당황스러운 음성을 흘리는 한 여인이 있었다. 어두침침한 방 안. 밝은 것은 오로지 직사각형의 기기가 비치는 불빛뿐. 그것을 직시하고 있던 한 여인이 꼴깍, 하며 초조한 울대를 간신히 넘겼다. 여인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간신히 올렸다. 안경 너머엔 흔들리는 눈동자가 환히 비쳐 오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거 어쩌지….”
그녀는 세차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과열된 사이트의 양상을 지켜보았다. 유저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체육 대회 계획이 완성되고 있었다. 잠시 지켜본다는 게 상황이 커져 버렸다. …여기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분명 그 반동은 무시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 그래도 말려야 되겠…지?”
안 그럼 이나가 싫어할 거야. 그녀의 친구인 여성, 안경희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중재에 나서려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때,
지이잉-.
“꺄아악-!!”
안경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안경희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다. 그녀는 놀라서 쿵쾅이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깜찍한 도훈이♥]
발신자는 한도훈이었다. 안경희는 눈을 커다랗게 끔뻑이다 조심스레 통화를 연결했다.
“여, 여보세요…??”
[누나~, 뭐 하세요? 바쁘세요?]
핸드폰 건너편에선 그 특유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연희와 고찬영의 내막을 파헤친 사건 이후, 메시지는 주고받더라도 이렇게 통화할 일은 그리 없던 두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안경희는 의아함을 지우지 못한 채 한도훈에게 떨떠름하니 물었다.
“바쁜 건 아닌데…. 저, 저기, 무슨 일이야…?”
[우리 사이에 그렇게 차갑게 구는 거예요? 도훈이 너무 서운해요~.]
우리 사이가 뭔데…? 안경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안경희는 그가 이렇게 친근한 척 성큼 다가올 때마다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한도훈은 안경희가 어색함을 느끼든 말든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누나도 들었죠? 이나 누나 얘기요.]
“어, 어? 응…. 방금 알았어.”
[그럴 줄 알았죠~. 역시 정보가 빨라서 좋다니까요~.]
후훗. 하고 너머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안경희는 그가 이렇게 기분이 좋을 때마다 불안해졌다. 그도 그럴 게, 그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도훈이 꼭 저렇게 웃을 때마다 자신에게 어떤 무모한 일을 떠맡겼기 때문이었다.
[뭐, 별건 아니고요.]
그 별거 아닌 게 가장 긴장되는 건데. 안경희는 한도훈의 서두에 벌써부터 침이 말라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뒤이어진 그의 말에 안경희는 눈을 홉떴다.
[이번엔 조커 문제로 시끄럽더라도 그냥 놔두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으, 응…??”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평소라면 서이나의 정체가 드러날 찰나에, 기민하게 움직이던 그였다. 그런데 왜 이런 중대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안경희의 얼굴에 혼란이 나타났다.
“왜, 왜??”
당황스러움에 말까지 더듬으며 안경의 콧등을 들어 올렸다. 한도훈은 그런 안경희에게 태평히 대답해 줬다.
[아~. 일이 여러 가지 꼬여서 말이죠? 누구 엿 좀 먹이고…. 또 이번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거든요.]
“사람이 많을수록?”
[뭐, 어차피 말려도 이번 체육 대회에 많이 몰려들 거잖아요?]
안경희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럴 때, 한도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럼 누나 응원단도 있어야 외롭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경희 누나.
흠칫, 안경희는 얼굴에서 핸드폰을 떼어 내며 두려운 시선으로 액정을 보았다. 무언가를 꿰뚫은 것 같은 그의 목소리에 소름이 다 돋았다. 설마 이 사이트의 정체까지 파악한 걸까?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유령 사이트이긴 했으나, 왠지 한도훈이라면 파악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안경희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도훈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이것도 전부 이나 누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럼 협조해 주신다는 의미로 알고 이만 끊을게요!]
“어? 자…!”
뚜-뚜-뚜-.
“…잠…깐….”
안경희는 다급히 뻗었던 손을 망연히 내렸다. 그녀는 막무가내식으로 끊어 버린 한도훈의 연락을 멍하니 바라보다 모니터와 핸드폰을 번갈아 오갔다.
“이거… 진짜 어떡하지…?”
곧 안경희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허망한 목소리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만 울리는 방 안에 고요히 울렸다.
***
“좋아, 여긴 해결됐고.”
한도훈은 상큼히 웃으며 나머지 메시지를 확인했다.
[범생이 : 어? 그거 진짜 해...? 진짜...???]
[바보 : 야, 난 빼. 난 빼라고!!!!!]
[노력가 : 하...]
[재수탱이 : ㅋㅋㅋㅋ그거 재밌겠네. 난 찬성~]
음. 다들 불만 없어 보이는군. 한도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중얼거리곤 핸드폰을 껐다. 빼라고 적극 의견을 피력한 서이수가 봤다면 뒷목을 잡았을 결정이었지만 한도훈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 녀석은 싫다고 질색을 표해도 결국엔 따라올 놈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도훈은 빈 잔을 돌리며 곁에 서 있던 이에게 입을 열었다.
“실장님. 제가 말한 건 어떻게 돼 가고 있죠?”
“순조롭게 진행 중에 있습니다. 도련님.”
한도훈이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여성이 그 잔 위로 오렌지빛의 액체를 따라 차분히 따라 내리기 시작했다.
“좋아요. 그럼 늦지 않는다는 거겠죠?”
“네. 실수 없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도훈은 그 말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서 잔을 든 채 창가에 다가갔다. 밖은 어두운 정원이 설치된 조명에 의지해 그 고요히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그 정경을 보며 미소를 깊이 그렸다.
“그럼요. 실수가 있어선 안 되죠.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어두운 창이 빛에 반사되어 거울처럼 한도훈의 얼굴이 비추어졌다. 그 비친 상에는 꿍꿍이수작하는 것 같은 야비한 미소를 달고 있는 미소년이 잔재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반휘혈 네 입을 열고 말겠어.
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한도훈은 들고 있던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머금으며 다가올 그날을 기약했다.
***
“…….”
반휘혈은 눈꺼풀을 슬며시 들었다. 그는 귀를 슬쩍 어루만지며 눈을 깜빡였다. 방금 왠지 귀가 간지러웠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언제 잠들었지.
그는 공허한 눈빛으로 눈을 굴렸다. 요즘 들어 무력이 그의 온몸을 잠식한 것 같았다. 생기가 돌았던 것은 언제였을까. 영혼 없는 그의 눈동자가 조용히 굴러다니다가 다시 무거운 눈꺼풀을 잠기게 했다.
“휘혈아, 들어간다.”
그때, 방의 문이 주인의 허락 없이 열리었다. 반휘혈은 감았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 조용히 그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자고 있었어?”
침입자는 그의 형이 반휘석이었다. 반휘석은 문을 닫으며 막 눈을 뜬 것 같은 동생을 보며 차분히 문가에 몸을 기대었다.
“…….”
하나 반휘혈은 그의 물음에도 별다른 대꾸는 없었다. 그저 도륵, 다시 눈을 굴리며 납 같은 눈꺼풀을 다시 내리누를 뿐이었다.
“휘혈아.”
반휘석은 다시 동생을 불렀다. 그러나 반휘혈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반휘석은 물끄러미 반휘혈을 바라보다 숨을 작게 내쉬며 말했다.
“요즘 학교 안 간다며.”
“…….”
“도훈이가 걱정하더라.”
“…….”
묵묵부답. 벽에 얘기하는 것 같은 상황이었으나, 반휘석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 최후의 한 수를 내던졌다.
“누나도 너 많이 걱정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
“…….”
스륵, 무겁게 닫혔던 반휘혈의 눈이 떠졌다. 그의 시선이 자신으로 향한 것을 보며 반휘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투명한데 어떻게 자기감정을 모를 수가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다른 의미가 있는 건가.
반휘석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하나 그것은 찰나였고, 이내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뭐, 어찌 됐든 정말 자신의 동생이지만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이쯤 되면 정말 한도훈이 그렇게 오기가 생겨도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엔 한도훈이 두 사람의 관계에 그리 열을 올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어이가 없었으나, 이쯤 되면 이해가 갈 정도였다. 동생인 반휘혈을 아끼긴 하나 매사 무심한 자신의 성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그조차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할 정도인데 동생에게 반쯤 미쳐 있는 그 아이는 오죽하겠는가.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일은 학교 가.”
“…….”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래도 직접 얼굴 보고 얘기는 해야지.”
반휘석은 기댔던 등을 떼어 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생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후회는 적당히 남기는 게 좋아.”
탁-. 그 말을 끝으로 반휘석은 미련 없이 사라졌다. 반휘혈은 멍한 시선으로 그 뒤를 좇다가 다시 천장으로 향했다.
“걱정….”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그 단어를 곰곰이 입안으로 굴리었다.
두근.
그러자 차갑게 식어 가던 심장이 온기를 품으며 자그마하게 뛰기 시작했다.
“…….”
참 이상한 일이다. 서이나의 질문은 명확히 대답을 하지 못하면서 몸만큼은 이리도 확실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알 수 없는 물음만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리고 끝내 다다른 질문은 언제나 하나였다.
나는 누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지.
아직도 찾지 못한 답을 헤맨 채, 반휘혈은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