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애들 상대로 진심인 게 웬 말인가. (1)
***
타오르는 태양.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일곱, 여덟~. 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팔 운동~.]
그 아래의 운동장에선 음악에 맞춰 수많은 학생들이 줄지어 체조를 하고 있다. 시선을 강탈하는 빨강과 검은색 무리의 행렬이 동작에 맞춰 움직였다.
[…다섯, 여섯, 일곱, 가슴 운동~. 둘, 둘, 셋, 넷….]
그런데 경쾌한 음률과 박자에 따라 단상에서 체육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 일사불란히 움직이는 학생들의 표정은 어딘가 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떡해~~!!! 찬영이가 이쪽 봤어~~!!!”
“미쳤어…!!! 너무 잘생겼다…!!!”
“꺄아악~~!!!”
운동장 계단 뒤쪽엔 수많은 외부인들의 무리로 모자라,
찰칵, 찰칵.
곳곳에서 터지는 카메라 셔터의 향연과,
“…B 구역. 이상 없음.”
“거기 미시면 안 됩니다!”
구석구석에 배치된 수상쩍은 정장을 입은 이들이 인파 정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섯, 일곱. 숨쉬기~, 하나, 둘, 셋, 넷, 다섯…]
“쓰읍…….”
나는 가사에 맞춰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내 눈은 어느 순간부터 하늘로 향해 있었다. 나는 그 청명한 푸른색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너무나도 따사로워 벌써부터 귀가 본능을 일으키는 날씨였다.
***
사건 당일로부터 약 4일 전.
“이나야, 다음 시간 체육부장들 회의 있으니까 잠시 모이래.”
“엉?”
나는 갑작스러운 반장의 말에 엎어져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반장은 자신의 말을 마치곤 휘릭, 떠났다. 남겨진 나는 멍하니 그 자취를 쫓으며 생각했다.
회의? 갑자기? 무슨 일이래. 멍청히 눈을 깜빡이고 있자, 근처에서 도란도란 안경희와 대화를 나누던 이혜인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왜 그래?”
“아니, 갑자기 웬 회의인가 싶어서….”
너무 뜬금없지 않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런 날 이혜인이 되레 이상하단 시선을 지었다.
“그게 왜? 체육 대회 일정으로 잠시 모이라 한 거 아닐까?”
“…체육 대회?”
나는 난데없이 들려온 단어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왜 벌써야?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곰곰이 달력을 떠올렸다. 그러다 오늘 날짜를 확인하곤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이번 주 금요일이 벌써 체육 대회야?”
“응. 넌 체육부장이면서 그걸 잊으면 어떡해?”
“그랬지, 참….”
놀라고 있으니 이혜인의 핀잔이 이어졌다. 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난 체육부장이긴 했다. 대학 스펙용으로 반의 체육부장이 되었으나, 체육 시간을 제외하곤 딱히 하는 일도 없었기에 정말 이 자리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더불어 최근 머릿속엔 반휘혈 생각으로 온통 가득 차 이번 주에 체육 대회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나는 멋쩍게 뒷목을 문질렀다. 이혜인은 그런 날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요즘 정말 무슨 일 있어? 오늘 꼴도 그게 뭐야. 어제 커뮤니티 완전 뒤집힌 거 알아, 몰라?”
“아, 역시 그랬어…?”
나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눈을 흐렸다. 온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밴드를 바라보는 이혜인의 눈이 샐쭉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곤 주위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근데 정말이야? 정말 최강혁이랑 붙은 거야?”
“뭐어….”
나는 그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말할까 말까 싶었으나, 곧 그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혜인은 예전부터 줄곧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그 입을 무겁게 지키던 친구였으니 말이다. 나는 이내 결심하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헙!”
대답을 들은 이혜인이 눈을 부릅뜨며 기겁했다. 그것은 그제 서이수가 보였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리 알고서 물어본 거일 텐데 이게 그리도 놀라운 걸까. 서이수도 내가 최강혁과 싸웠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나를 붙잡던지…. 정말 귀찮아 죽을 뻔했다.
“대박, 대박…! 누가 이겼어? 응? 응?”
그리고 이혜인은 아니나 다를까, 당연한 질문을 던져 왔다.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빛이 역시나 서이수와 흡사했다. 역시 최강혁. 내 입장에선 그리 대단한가 싶었으나, 또래들 사이에선 거물은 거물인가 보다. 평소 티를 내지 않으려 하던 이혜인마저 이렇게 만들다니. 무서운 녀석 같으니라고.
무엇보다 이혜인의 이러한 반응은 약한 편에 속했다.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따라붙는 시선과 관심, 그리고 쏟아지는 질문들은 정말 파도처럼 몰아쳤다고 해도 정말 과언이 아니었다.
‘아, 가라고, 좀…! 그냥 계단 구른 거라고 몇 번을 말하냐아…!!’
끝내 참다못해 성질이 터져 버린 내가 주먹을 꽉 쥐어 애꿎은 볼펜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나서야 온전한 내 시간이 찾아왔다. 좋게 말하는 것도 처음 한두 번이지, 어딜 갈 때마다 자꾸 붙잡는 통에 결국 하루가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즉, 오늘도 반휘혈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다음 쉬는 시간이 수업이 마무리됨을 알려 주는 청소 시간이란 것만 떠올리면 이가 갈렸다. 아무리 내가 뛰어가도 반휘혈이 먼저 학교를 벗어나는 게 더 빠를 터였다. 그 덕에 내 신경 줄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끊어진 것도 없잖아 있으리라.
‘아~. 오늘은 진짜 만나려고 했는데.’
나는 혀를 짧게 쳤다. 한도훈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덕에 그가 오늘은 등교했음을 알 수 있었던 터라 더 아쉽게 느껴졌다. 내일은 기필코 만나야지. 나는 훗날을 기약하며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뭐어….”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렇게 방과 후가 다 되어서야 따로 질문을 던진 걸 보면 이혜인도 많이 참은 거겠지.
하나 그렇다고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시선은 여전히 많았고, 말은 어떻게 퍼질지 모르는 법 아니겠는가. 나는 뺨을 긁적이며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 문득 어딘가 쭈뼛거리고 있는 안경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어째선지 나를 보고 손발을 가만두질 못하고 있었다.
“?”
…뭐지? 안절부절못하는 게 왠지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근데 경희도 오늘따라 조용하네.’
평소라면 이 화제를 먼저 내게 알려 줘 경고를 해 줬을 법한 그녀였다. 그런데 이번엔 왜 이렇게 조용했던 거지? 나는 불현듯 찾아온 기이함에 눈을 깜빡였다.
‘혹시 경희도 몰랐나?’
설마 안경희도 나와 최강혁이 낸 승부의 결과에 대해 몰랐던 걸까? 그런데 내가 말하기 싫어하니 궁금한데도 물어보지도 못하고 저렇게 꾹 참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도 설마 안경희가 모르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으음.
‘…딱히 얘네들한테 크게 가릴 비밀도 아니기도 하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하고 두 사람을 손짓했다. 내 행동에 두 사람이 쪼르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후, 작게 속삭였다.
“그거 내가 이겼어.”
“ㅁ…! 읍!!!”
“!!!”
그러자 이혜인이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은 자신의 입을 스스로 틀어막았다. 안경희도 내 말을 듣곤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눈을 초롱초롱히 빛내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대, 대단해! 난 그럴 줄 알았어! 진짜 대단해…!! 이나야!!”
“너 진짜 짱이다!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어떻게 최강혁을! 걔 막 수십 명이랑 싸우고도 안 진다며!”
안경희와 이혜인은 주변을 한껏 의식하며 거의 무음 수준으로 칭찬을 내뱉었다. 나를 위한 그녀들의 배려가 고마운 한편, 왠지 멋쩍어지는 기분에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벼, 별것도 아닌걸.”
고등학생 이긴 게 뭐 대수라고. 민망함에 콧잔등을 쓸며 부인하자, 두 사람이 대번에 정색했다.
“별거 아니긴!”
“전혀 아니야!”
두 사람의 적극적인 태세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이혜인이 얼굴을 확 찌푸리며 교실을 둘러보았다.
“이럴 때 고찬영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바쁘다고 갑자기 없어지고! 이런 건 얘도 들어 줘야 하는데!”
“어, 어어. 그, 그러게….”
이혜인이 고찬영의 행방에 투덜거리자, 안경희가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또 소극적으로 변했네.’
오늘따라 기복이 크다. 정말 무슨 일 있나? 나는 의심쩍게 그녀를 바라보다 불현듯 오늘 고찬영을 본 것 또한 손에 꼽았음을 떠올렸다.
“근데 진짜 찬영인 어디 간 거야?”
“몰라. 바쁘다고 말하면서 쉬는 시간마다 사라졌어.”
이혜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고찬영의 묘연한 행방에 고개가 자연스레 기울여졌다. 여자 친구랑 헤어졌으면서 걔는 왜 바쁜 거지. 참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아, 찬영이 하니까…! 너희 소식 들었어? 이번 체육 대회 사람 엄청 올 거래.”
“엉?”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는 난데없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여기에 도방중, 강해중 애들도 모자라 찬영이도 있잖아. 그러니까 걔네들 팬들한텐 완전 축제일걸?”
“아하….”
그런 거였구만. 나는 금세 납득하다가 순간 그날의 광경을 예상해 보았다. …어우. 벌써부터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두 사람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 사람 많은 거 부담스러워서 싫은데…. 긴장해서 실수 안 할까 모르겠다.”
“나도….”
두 사람은 어깨를 축, 늘이며 울상을 지었다. 특히 안경희는 체육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다가올 일에 대한 근심으로 낯이 푸르죽죽해졌다.
“뭘 그리 울상이야?”
“으악!”
“히익!”
그럴 때, 두 사람 뒤로 고찬영이 불쑥 나타났다.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
“어, 왔어? 근데 찬영이, 너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이혜인이 질겁하며 그를 탓했다. 나는 고찬영이 뒤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으나, 그 사실을 슬그머니 모른 척하며 그에게 질문했다.
“후훗. 비-밀.”
하지만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고찬영은 꿍꿍이가 많은 것 같은 윙크를 찡긋, 날리며 상큼히 웃었다.
‘쟨 또 왜 저래?’
이 녀석도 응큼한 구석이 많다 보니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불안하다. 수상함을 견디지 못하고 떫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고찬영은 조금도 괘념치 않고 금세 관심을 돌려 이혜인과 안경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둘이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아, 이번 체육 대회 일로.”
“체육 대회?”
고찬영이 반문했다. 이혜인은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 책상 위로 털썩 몸을 누이며 한탄했다.
“그래! …으, 넌 좋겠다. 사람 시선 의식 안 할 거 같아.”
“응? 아아. 그런 의미?”
고찬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무시하면 되지 않아?”
“그거! 그런 부분이 부럽다고!”
“그런가~?”
고찬영은 하하, 웃으며 이혜인의 투정을 받아넘겼다. 그러다 그는 아, 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탄성을 지르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친구님은 뭐 할 거야?”
“응? 나?”
“그래~. 하고 싶은 종목 있어? 반 전체가 참여하는 거 제외하곤 개인당 최대 두 종목이 한계던가? 뭐~. 친구님은 뭘 지원해도 다 프리패스겠지만.”
그는 당연하단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내가 모든 종목을 휩쓸 거란 게 참 당연하단 투였다.
“음?”
하나 나는 그 말에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다 이내 그가 올해 전학을 왔음을 떠올렸다.
“어, 그건….”
“아, 찬영인 모르겠구나.”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눈짓하며 난감한 기색을 비추었다.
“응?”
이에 고찬영도 슬슬 뭔가 이상한지 눈치챘나 보다. 그는 왜 그러냐는 듯 우리를 보았다. 나는 의문스러운 시선에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히 대답해 주었다.
“나 체육 대회 참여 잘 안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