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96화 (196/306)

197. 애들 상대로 진심인 게 웬 말인가. (3)

‘이걸 대체 어떻게 말해!’

나는 입을 꾹 다물며 모든 시선을 외면했다. 이걸 아이들이 듣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소름 돋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말 거다. 분명 날 재수 없다고 여기리라. 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조용히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심을 다지고 있자 때마침 스피커에서 종이 울렸다.

댕대래 댕댕 댕댕~.

“아, 나 가 봐야겠다.”

“앗…!”

소리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고찬영이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날 붙잡으려 했으나 나는 냉정하게 다 쳐 내며 빠르게 반을 벗어났다.

“어휴…. 진짜 피곤하네.”

반을 어느 정도 벗어나니 기운이 다 빠졌다. 아니, 사람이 대회 참여하기 싫고 그런 걸 수도 있지, 너무 집요하네. 나는 시큰둥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애꿎은 양민 학살 할 일 있나…. 역시 그건 아니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나서는 순간, 이미 결과는 뻔할 터였다. 아이들의 축제에 다 큰 어른이 나타나 훼방 놓는 것도 아니고…. 그런 몹쓸 짓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불현듯 과거의 단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공. 주저앉은 여학생과 그 주위를 에워싼 여학생들. 그리고 홀로 서 있는 나. 그것은 숨 막히는 정적이었고, 그 안에 있는 건 두려움과 원망이었다.

입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속이 갑갑하다. 나는 그것을 뚫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뭐, 그런 건 한 번으로 족하니깐.’

나는 털어 내듯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도 비슷한 애들끼리 해야 재밌지, 나 같은 사람은 끼면 찬물만 끼얹는 거라고.”

눈치껏 빠져 주는 건데, 이 깊은 속마음을 알아주지 않다니. 참 억울한 일이었다. 나는 툴툴거리며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듯 중얼거렸다.

“뭐, 됐어. 어차피 난 참여 안….”

***

“…한다.”

“엥?”

“어?”

“???”

나는 탁상에 팔꿈치를 댄 채 심각하게 재차 말했다.

“나도 참여한다고. 줄다리기나 피구 같은 단체 종목은 어차피 인원수 맞춰서 빠지는 거라 참여 횟수 체크 안 하니까, 여자 400m 달리기 같은 개인 종목이랑 이어달리기는 내가 참여할게. 아, 찬영이 너도 이어달리기 참여하고. 여기에 이의 있거나 따로 참여하고 싶은 사람?”

“????”

“??”

“좋아. 없다는 걸로 받아들일게. 그럼 이 종목엔 내 이름을….”

“저기, 체육 부장님~?? 질문 좀 해도 될까요~??”

“뭐야.”

자연스럽게 칠판에 종목과 내 이름을 수기하려는데 고찬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적다 말고 그를 보자, 그는 어리둥절하게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해 왔다.

“부상자라고 참여 못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이야? 물론 난 환영이지만~?”

“…찬영아.”

나는 다시 단상에 팔꿈치를 댔다. 그리고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가 우리 반을 1등으로 만들고 싶다는데 그런 이유가 중요해?”

어쩜 내 의도를 의심할 수가 있지? 갑자기 열의를 불태우는 게 이상해 보일 순 있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마음을 바꿔 먹었다는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냐ㄱ…!

“응.”

“…….”

“친구님 고집 세잖아. 웬만한 일론 마음 안 바꾸면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안에 담긴 함축된 의미에 나는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흠, 흠! 결심이란 게 바뀔 때도 있는 거고, 그런 거지, 뭐.”

“체육 부장 회의에서 무슨 일 있었구나?”

“…….”

예리한 자식 같으니. 고찬영의 집요한 추궁에 속이 아프게 찔렸다. 이대로 가다간 더 후벼 파질 것 같은 예감에 나는 헛기침을 더욱 크게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회의 내용을 가릴 생각은 없었고, 비밀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급해서 반에 오자마자 참여하겠다는 말을 꺼낸 거다 보니 말할 타이밍을 조금 놓쳤을 뿐이었다. 그러니 난 이 중대한 사안을 어서 발표해야 할 것 같았다.

“다름이 아니라 회의 중, 이번 체육 대회 상품이 결정됐어.”

“엥?”

“상품?”

“작년처럼 반 지원금 아니었어?”

“쟤가 저렇게 나올 정도면 더 대단한 거 아냐?”

“오?”

그러자 반 아이들이 바로 술렁였다. 아이들은 서로 추측하며 수군거리다가 이내 호기심을 못 참겠던지 내게 빨리 답을 내놓으라고 독촉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손으로 진정하라고 제지했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내게 집중한다 여길 즘, 나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체육 대회 각 학년 반 1등은….”

***

“각 학년 반 1등 수련회 및 수학여행은 HD 그룹 산하 리조트 호텔에서 3박 4일 특별 휴양입니다.”

그리고 현재. 그 대망의 체육 대회의 사회자를 맡으신 2학년 학생 주임이자 체육 선생님이 그 상품을 소개했다.

“와아아아-!!!!!”

“HD 그룹 존나 사랑합니다-!!!!!”

“한도훈, 네가 최고다-!!!!!!!”

그리고 운동장에 몰려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환호를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게, 우리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원이 야박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었다. 매번 거기서 거기인 장소만 가서 고생만 잔뜩 하고 돌아왔다는 선배들의 박한 평만 남겨져 있을 뿐. 실제로 작년 1학년 수련회 때 후진 수련관에서 온갖 고생만 하고 돌아왔었기에 이번 수학여행도 그리 기대를 하질 않았었다.

물론 이번 1학년들은 재벌 집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차후 개선이 이뤄질 거라 예상은 했다만…. 설마 2학년들에게까지 특혜가 이뤄지다니! 정말 꿈같은 이야기였다.

HD 그룹 산하 리조트 호텔이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 안에서도 호화롭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일개 서민인 고등학생들이 온갖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니! 이것은 학생들뿐 아니라 각 반을 맡은 선생님들도 들뜨게 만들었다.

“여러분, 꼭 이기는 거예요! 꼭!!! 이나, 찬영이! 선생님은 너희만 믿을게요!!”

이처럼 평소 아이들에게 편애를 두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던 담임 선생님조차 나와 고찬영을 콕 지목할 정도였다. 그만큼 이건 중대 사안임이 틀림없었다. 물론 내게도 말이다.

“후…. 이거 좀 긴장되는데.”

나는 주위에 몰린 기대 어린 시선을 보며 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데. 물론 이 모두가 고찬영과 1학년의 유명 인사들을 위한 팬들임을 알지만, 한순간 기가 질릴 만큼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경기를 서던 게 얼마 만인지….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스트레칭을 더 했다.

“하하, 뭘 긴장해~.”

그런 내 등 뒤로 고찬영이 툭, 등을 치며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그 위로에도 좀체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러자 고찬영도 능청스러운 웃음을 거두며 예리한 시선으로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두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역시 상대가 상대다 보니 좀 그러긴 하지?”

“…….”

내 시선이 그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갔다.

“꺄아아아!!! 반휘혈!!!!! 파이팅-!!!!!”

“존나 좋아해!!! 반휘혈!!!!”

“어차피 우승은 최강혁, 너의 것-!!!!!”

“진짜 잘생겼다아악-!!!!”

“혁아, 꼭 이겨야 해-!!!”

그곳은 바로 우리 학교 세기의 다크호스들. 최강혁과 반휘혈이 있는 1학년 무리였다. 팬들이 몰린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만, 역시 저 두 사람의 팬 수가 압도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걔네들만 많으냐? 당연히 아니었다.

“세계 제일 귀요미 윤이, 네가 최고야!!!”

“무슨 소리-!! 우리 도훈이가 가장 귀엽지-!!”

마치 본인들처럼 벌써부터 갈등이 붙기 시작한 이윤과 한도훈의 팬들과

“왕자님-!!!”

“정한 님-!!! 한 번만! 한 번만 웃어 주세요-!!!”

살인 미소란 팻말이 인상적인 다정한 팬클럽.

“김! 시! 원! 김! 시! 원!”

어쩐지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많아 시선을 강탈하는 김시원 팬들.

“강이야~!! 이번엔 잠만 자지 말고 활약 좀 하자~!!!”

“제발 한 경기라도 뛰어 줘~!!!”

…또 왠지 모르게 경기 뛰어 달라고 구걸하는 서강이 팬들이 있었고,

“재현이랑 이수도 힘내라~!!”

“누나들은 너희들이 뛰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취급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하찮은… 이재현과 서이수 팬들이 있었다.

“…개판이구만?”

나는 주위에 쫙 깔린 인파들을 보며 총평을 내렸다.

“음? 하하, 확실히 이번에 사람이 엄청 몰렸네. 나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첨 보는 거 같아.”

“…그렇게 말하는 너도 네 팬들이 꽤 많다고 생각하지 않냐?”

“찬영아아아악-!!!!”

“존나 섹시하다!!!”

우리 반 줄 쪽에 몰린 고찬영의 팬들을 외면하며 그를 보았다. 고찬영은 내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음? 그런가? 좀 적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광주가 아니라서 그런가? 뭐, 상관없지만!”

그는 능청스럽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는 본거지보다 적다는 그의 팬들의 수를 보며 눈을 흐렸다.

‘…저게 적은 거라고.’

학교가 넓은 편이라서 망정이지, 가히 세 자리에 육박하는 그의 팬들의 수가 황당해 쓴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뭐, 아무튼 내가 왜 하등 상관도 없을 1학년들을 보며 긴장하고 있는가. 나는 시선을 돌려 어느새 단상에 올라 있는 한도훈을 보았다.

“아-아. 네. 반갑습니다. 모든 학생 여러분.”

떨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그 모습이 천상 무대 체질…보단 기업인을 생각하게끔 했다. 그런데 저 녀석이 왜 갑자기 단상에 나섰는가. 그 이유는 단순했다. 상품이 HD 그룹의 후원인 만큼… 이 체육 대회의 큰 기획자가 누구겠는가.

바로 저, 한도훈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번 체육 대회는 좀 독특합니다.”

그러니 그만큼 내용도 일반적인 체육 대회와 다를 예정이었다.

“원래라면 1학년 따로 2학년 따로 경기를 펼쳐 점수를 배정하는 게 맞았을 테죠.”

그것이 이번 체육 대회에서 내가 참여하는 걸 가장 꺼려 했던 이유였다. 고찬영이 있는 반에 나까지 참여하면 일방적인 유린밖에 안 되니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번 체육 대회는 미리 공지한 대로 1학년과 2학년 합동 경기로 진행될 겁니다.”

…이번 대회는 달랐다. 내가 적극 참여를 결정한 것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반별 팀 구성은 1, 2학년 통합으로 두 반씩 짝을 지어 1-2반, 3-4반, 5-6반. …그리고 편의성 문제로 7반과 8반은 제비뽑기로 7반은 1-2반. 8반은 3-4반으로 배정되었음을 명시합니다.”

이 뜻은 즉, 유명인을 주축으로 팀을 크게 세 팀으로 구분 지을 수 있었다.

최강혁이 중심인 1, 2, 7반.

반휘혈이 중심인 3, 4, 8반.

그리고 고찬영이 중심인 5, 6반.

우리 반이 숫자가 적어 열세인 것 같은가? 사실 아니었다. 웃기게도 수에 비해서 우리 팀 밸런스가 헬이라 오히려 7, 8반이 뽑을 제비뽑기 대상으로 아예 예외 처리가 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1학년 5반엔 이재현과 서이수.

1학년 6반엔 김시원과 서강이.

그리고 2학년 6반은 나와 고찬영.

다른 반 에이스 구성이 많아도 세 명인 것에 비해 우리 팀은 알짜배기들이 그 이상으로 뭉쳐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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