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98화 (198/306)

199. 승부 앞에선 애고 어른이고 없는 법. (2)

탕-!

스타트는 이윤의 선두였다. 출발 신호와 동시에 뛰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재빠른 반사 신경은 보고 있는 나도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뒤따른 아이들도 그에 지지 않았다. 역시 각 반의 대표를 맡은 이유가 있을 정도로 빠르게 따라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역시 빠른 건 역시 그 도방중, 강해중 네 사람이었다. 과연 누가 먼저 들어갈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는데,

“응?”

나는 보이는 광경에 눈살을 확 찌푸렸다.

“저 녀석, 뭐 하는 거야?”

황당한 음성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게… 다정한이 돌연 중반부터 속도를 늦추었기 때문이었다.

“어?”

“왜 저래?”

관중석에서도 그 돌발 행동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데, 사건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으와앗-!!!”

“?!”

“으악-?!!!”

“뭣…!!”

“시발, 이게 뭐야?! 한도훈-!!!”

선두로 가던 이들이 돌연 멈춰 섰다. 이윤이 철퍼덕 넘어지는 걸로 시작해 몇 사람은 손을 퍼덕이며 중심을 잡기 애쓰다 넘어졌고, 겨우 중심을 잡는 데 성공한 사람은 김시원과 서이수뿐이었다. 그중 서이수는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빡친 표정을 여실히 담아 주최자인 한도훈을 잽싸게 노려봤다.

…아니,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의 발밑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정체를 발견하곤 황당히 중얼거렸다.

“끄, 끈끈이…????”

대체 언제 저런 걸 준비한 거야?! 나는 기상천외한 함정의 등장에 입을 떡 벌렸다.

어쩐지 저쪽은 절대로 못 가게 하더라…! 요 며칠간 운동장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나는 흙 속에 교묘히 숨겨져 있던 덫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응?”

그때 유일하게 덫에 걸리지 않은 다정한이 느긋하게 웃으며 차분히 돌 몇 개를 주워 들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됐다. 그러곤 간격을 벌려 하나둘 던졌다. 그러자 가까이 날아간 돌은 땅에 박힌 듯 멈추고, 조금 더 멀리 던진 남은 하나가 통통 튀듯 굴러다녔다. 그리고 다정한은 망설이지 않고 멀리뛰기를 하여 끈끈이를 통과했다.

“…….”

“…….”

…승부가, 정해졌다.

“남자 50m 주자, 1등은 1학년 1반. 다정한 선수입니다!!”

“꺄아아아-!!”

“우와아아아!!!!!”

골인과 동시에 단상에서 알림이 들려왔다. 이번 한도훈의 돈지랄로 고용된 해설 위원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연이어 들려오는 환호성을 흘려들으며, 어처구니를 상실했다.

‘…종목을 줄인 이유가 있었구만.’

매 경기가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된다면 시간이 지연될 수밖에. 갑자기 왠지 오늘 하루가 상상 이상으로 다사다난할 것임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남자 50m 달리기 결과는 1등 다정한. 2등은 김시원. 3등은 서이수로 결정되었다.

김시원은 다정한이 앞지르는 걸 확인하곤 곧장 신발을 벗어 던져 추격하려 했으나, 50m라는 거리가 짧았기에 추월은 불가능했다. 참 아까운 결과였다. 그렇지만 나는 김시원의 신속하고 정확했던 결정에 칭찬해 주기로 마음먹으며 조용히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음?”

그런데 멀리서 보이는 그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우두커니 서 있는 김시원은 두 주먹을 꽉 쥔 채였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목대엔 핏줄까지 세워져 있었다.

‘…아. 그런가’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잘게 흘렸다. 그러곤 박수를 치던 손을 멈추고 팔짱을 꼈다.

‘그래. 그래야지.’

여기서 그런 성적에 만족하면 쓰나. 그 분함은 나중에 설욕하도록. 기회는 나중에 또 있을 터니 말이다.

“으에엑-. 끈적끈적해~!!”

그때 다정한의 도움으로 끈끈이의 늪에서 벗어난 이윤이 울상을 잔뜩 지으며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다정한이 그런 그에게 개수대를 가리키며 어서 씻어 주라는 듯 제스처를 보이는 게 보였다. 그런 중, 다정한에게 카메라맨과 여성 한 명이 서둘러 다가가는 게 보였다.

“다정한 선수. 1등 축하드립니다!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1위를 얻어 낸 소감이 어떠신가요?”

“…네?”

다정한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알고 보니 그 여성은 인터뷰어였다. …한도훈, 이 자식은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은 거야? 인터뷰 현장이 담긴 대형 스크린을 보며 나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와, 인터뷰까지 해…?”

“지극정성이다, 정말.”

그것을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이혜인과 고찬영이 혀를 내둘렀다. 멀리 있는 서이수와 김시원의 표정도 가관인 걸 보아 생각하는 바는 그리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 친구인 윤이는 정말 달리기가 빠르거든요.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운이 좋아 이길 수 있었네요.”

하나 다정한은 처음에만 잠시 당황했을 뿐, 이내 침착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객관적으로 따져도 훌륭한 미성이었다. 그래선지 주위를 포진한 여성들의 행복한 신음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운이 좋다고 하셨는데요. 중반부터 속도를 늦추시던데, 그건 고의인 게 맞았나요?”

“네.”

주위가 다시 한번 술렁였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신 건가요? 잘못하다가 마지막으로 들어오실 수 있었을 텐데요.”

“그건….”

다정한이 싱긋, 웃었다.

“도훈이를 믿었거든요.”

“네?”

그의 산뜻한 대답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소린지…?”

인터뷰어도 그 대답이 난해한 건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녀는 곤혹스러운 어투로 재차 질문했다. 그러자 다정한이 한도훈 쪽으로 시선을 슬쩍 돌리더니, 그 미소를 더했다.

“그야… 출전을 안 했잖아요?”

“네?”

“그러니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죠.”

지나치게 단순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핵심을 뚫는 말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다정한이 품었던 의심은 나도 같이 느꼈던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보다 더 한발 나아가 예측까지 시도한 거겠지.

슬쩍 한도훈을 돌아보자 그는 서늘히 얼굴을 가라앉히며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하, 대외적인 장소랍시고 표정 관리 하고 있는 것 좀 봐. 뭐, 그래도 다정한이 1등인 것과 자신의 속내를 간파당한 게 여간 속이 쓰리긴 할 터였다.

“어, 그, 그러니까 다정한 학생은 한도훈 학생과 꽤 친하나 보네요~.”

그러나 한도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듯한 인터뷰어가 금세 침착함을 되찾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다정한은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웃음만 지었다.

“으엑! 그게 뭐야~!! 같은 팀인데도 야박해! 조금이라도 언질을 줄 수 있는 건데!”

그럴 때, 다정한의 곁에 있던 이윤이 울상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야, 그거 반칙이다…? 나는 그 어이없는 말에 반사적으로 태클을 걸었다. 그리고 다정한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난처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아. 그건 반칙이야. 그리고 네 경우엔… 아니다.”

그는 말을 끊은 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이윤을 보았다.

“내 경우엔 왜??”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이윤이 뒷말이 궁금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다정한은 그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다. 덕분에 스크린에 비친 이윤의 표정엔 물음표가 한가득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난 다정한이 차마 잇지 못한 그 내용을 어림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넌 그냥 고의였겠지….’

이건 거의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다. 한도훈이 이윤에게 사전에 그런 친절을 발휘할 리도 없거니와, 그건 친구랍시고 있는 김시원과 서이수가 같은 편이었어도 마찬가지리라. 당사자가 반휘혈이 아니고서야 저 녀석은 그저 자신이 친 거미줄에 농락당하는 이들을 즐거이 보고 있을 놈이었다. 특히, 그 안에 이윤이 있다면 더더욱 놓칠 리 없었다.

“으익, 그게 뭐야아~. 궁금한데에~. 나, 지금 온몸이 끈적거려서 기분 되게 이상하다구~!! 정한이 너도 만져 봐~!!”

“아, 그건 좀.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이윤이 볼을 부풀리며 다정한에게 달려들었다. 다정한은 빠르게 그를 피하며 자리를 황급히 벗어났다. 그리고 이윤이 그 뒤를 쫓았다. 나는 그 둘을 구경하다가 남은 피해자들을 보았다. 그중에 한 명은 4반 주자였던 학생이었다. 그는 그 짧은 시간에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이윤은 귀엽기라도 했지, 머리나 옷에 끈끈이로 인해 흙이 덕지덕지 붙은 모양새가 참 안쓰럽게 보였다.

…하여간, 한도훈은 이상한 데서 공평한 놈이었다.

***

여자 50m는 선례가 있어서인지 무난히 끝났다. 여자 팀 1등은 4반. 2등은 7반. 3등은 8반이 되었다. 1등을 한 반의 팀에겐 각 100점. 2등은 50점. 3등에겐 10점이 주어졌다.

즉, 현 스코어는 앞 반 150점. 중간 반 110점. 뒤 반 60점이었다.

‘현 스코어가 꼴찌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화를 내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바로 뒤이어지는 경기가 400m 경주였기 때문이었다.

이번 경기는 1학년들과도 협의를 마친 후 예정대로 내가 나가게 되었다. 이번 출전은 여자가 먼저였다. 앞선 경기에서 그랬듯 모두 공평하게 복불복 경기를 경험하게 해 줘야 하지 않겠냐는 게 한도훈의 설명이었다. 거기에 잠시 남자 대표들의 안도 소리와 여자 대표들의 두려움 어린 불만이 나왔지만, 끝내 결론은 물주가 최고다, 였다.

‘와, 이거 긴장되는데….’

아무튼 잠시간의 실랑이 끝에 나는 몸을 가벼이 풀며 트랙으로 다가갔다.

“친구님, 파이팅~!!!!”

“이나야!!! 힘내!!!!”

“서! 이! 나! 서! 이! 나! 서! 이! 나!”

“누나, 힘내세요~!!!”

“무조건 이겨! 반드시 이겨!!!!”

반과 동생들에게서 우렁찬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곳을 향해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눈을 데록 굴리며 반휘혈을 찾았다.

‘휘혈이는 어디 있지?’

다행히 그를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난히 몰려 있는 여자들의 시선과 기묘하게 거리를 벌리고 있는 반 아이들의 태도 덕에 쉬이 찾을 수 있었다. 반휘혈은 다행히 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도 조심스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반휘혈이 몸을 살짝 떠는가 싶더니, 곧 휙 하고 시선을 피해 버렸다.

‘뭐야…. 아직 기분이 덜 풀렸나.’

조금이라도 아는 척해 주면 덧나나. 나는 섭섭함에 입을 삐죽였다.

“꺄…!!!!”

“우워어어어…!!! 서이나 님, 힘내세요~!!!!!”

그런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들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응원을 던져 왔다. 아무래도 분위기에 편승해 나를 응원해 주는 소리인가 보다. 나는 어쨌든 고마운 마음에 들려온 방향에도 손을 흔들었다.

“어?! 여기 사… 쓰…졌…!”

“…키세…!!”

그런데 갑자기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뭐지, 하고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으나,

“언니!”

“어엉??”

돌연 내 어깨를 와락 끌어안는 이가 있어 관심은 한순간에 떨어져 나갔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자, 그곳엔 배시시 웃고 있는 주연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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