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99화 (199/306)

200. 승부 앞에선 애고 어른이고 없는 법. (3)

“어? 연희, 너도 400m야?”

예상치 못한 만남에 깜짝 놀랐다. 설마 여기서 재회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왕따 가해자 처벌 이후로 얼굴을 못 봤다는 걸 상기해 냈다.

“네! 제가 달리기 하난 자신 있거든요! 언니라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

주연희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합을 다지듯 당차게 말했다. 그 모습이 일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수심이 드리워졌던 그 얼굴엔 어느새 다시 밝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많이 좋아졌나 보네.’

그 모습이 마치 처음 그녀를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했다. 얼굴이 많이 펴진 걸 보니 왠지 한시름이 놓였다. 그래선지 입가엔 편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래. 열심히 해 봐.”

“뭐예요~! 그 여유로운 모습은!”

그런 내 모습이 꽤나 여유로워 보였나 보다. 주연희는 내게 장난스레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술렁였다. 이유 모를 악의를 정면으로 당한 직후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연희는 이렇게 밝은 웃음을 지을 줄 아는 강한 아이였다. 역시 이 정도 그릇은 되어야 여주가 되는 거구나. 나는 새삼 절감했다.

‘…이 정도면, 휘혈이나 혁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겠네.’

나라면 한동안 재기 불능이 되었을 텐데. 주연희의 강인함에 속으로 감탄하면서, 나는 그녀의 장난 어린 핀잔을 하하, 웃으며 받아 주었다.

“준비하세요.”

심판이 준비 자세를 취하라는 사인을 보내왔다. 우리는 대화를 끊으며 각자의 라인에 섰다.

‘뭐, 그것과는 별개로….’

이번 경기에서 봐줄 생각이 전혀 없지만.

‘미안하지만, 애라도 봐주지 않아.’

어쩌겠는가. 승부의 세계는 원래 나이 차를 막론하고 비정한 법이었다.

그러니 이번 승리는 내가 따 주마.

나는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준비-.”

심판이 손을 올렸다. 하늘에는 카메라가 달린 드론이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어 정면을 응시했다.

‘응?’

그러다 나는 정면에 보이는 것들에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테이블…?’

저건 대체 언제 설치한 건가. 게다가 테이블에 배치된 곳마다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함정이 숨어 있는 게 아닌 조건부 경기인 듯싶었다. 나는 그 위치들을 눈여겨보았다.

탕-!!

총성이 울리었다. 나는 그와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혹시 모를 함정을 대비해 전력을 다하진 않고 적당한 속도를 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생들과 차이는 확연했다.

“서! 이! 나! 서! 이! 나!”

“그대로 1등 가자아아-!!!!”

그런 날 향해 관객석에서 수많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진심으로 달려어-!!!!”

…뭐, 개중엔 서이수의 타박도 들려온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순식간에 첫 번째 테이블에 다다랐다.

“어?”

그리고 나는 눈앞에 보인 물체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것은 동그랗고, 하얀 것이었다. 그리고 딱 봐도 폭신하고 따뜻해 보였다. 즉, 이것은…,

“이 호빵 중에 하나를 고르세요.”

호빵이었다.

“아, 복불복 게임이구나?”

나는 그제야 이 경기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번 경기 방침은 복불복 음식 게임이었다. 다행히 발밑을 걱정할 일이 좀 사그라든 기분이었다. 뭐,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겠지만.

상황 판단을 마친 나는 뭘 먹을까 고민했다. 테이블 곁에 배치되어 있던 카메라는 어느새 다가와 나를 찍고 있었다. 내가 뭘 선택할지 기다리는 모양이다. …거참, 진짜 부담스럽네. 나는 떨떠름하게 시선을 주었다가 슬쩍 외면하며 다시 테이블을 보았다.

‘뭐, 아무튼 음식 하나가 꽝인 거겠지?’

설마 아무리 꽝이어도 사람이 못 먹을 걸 준비했을까. 그것도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말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맨 처음에 있는 걸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

어라? 첫맛은 말 그 자체로 물음표였다. 그리고…

“!!!!!!!!!!!!!!”

나는 풀썩 몸을 숙이며 테이블을 황급히 짚었다. 이게, 이게…!!

“이게, 큽, 쿨럭, 뭐어야악…!!!!”

“네. 매운 호빵 당첨이시네요.”

상큼한 안내가 내 귀로 직행했다. 그렇다. 내가 먹은 건 매운 호빵이었다. 그것도 그냥 매운 게 아니라 내부가 시뻘겋도록 그 매운맛을 주장해 살해를 시도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운맛이었다. 식도까지 퍼지는 칼칼함에 기침까지 저절로 새어 나왔다.

내 생전 이렇게 매운 건 처음이야! 너무 충격적인 맛에 손까지 덜덜 떨렸다. 이건, 대체, 이건 대체 뭐냐고…!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입안부터 시작해서 위까지 화끈함이 올라왔다.

도대체 캡사이신을 얼마나 퍼부은 건데?! …아, 잠깐. 이거 설마 다 먹어야 하는…? 그런…?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흔들리는 동공으로 안내자를 보았다. 안내자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 다 드셔야 가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중간에 물을 마시면 자동 탈락임을 명심해 주세요.”

“크윽…!”

나는 호빵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선뜻 입으로 가지 않는 얼얼함에 나는 수차례 망설이니, 아이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주연희는 그중에 첫 번째였다.

“어, 호빵?”

“이 중에 고르시면 되세요.”

“으음. 전 그럼 이거!”

주연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뭘 고르든 통과겠지. 꽝은 내가 골랐으니….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조심스레 한 입 더 물었다.

“……!!!”

짜릿한 매운맛이 전신을 관통했다. 나는 테이블을 탕탕 치며 고통을 호소했다. 악! 억! 악!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이 입안에서 삼켜졌다. 옆에 있는 주연희가 난리 중인 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렇게 매워요?”

“어쳐 애어….”

지나치게 매워서 혀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차마 더 베어 물지 못하고 잠시 숨을 고르는데 막 도착한 이들이 호빵을 집어 들기 시작했다.

아, 잠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 이걸 안 먹으면 내가 꼴찌…!!

“?!?!??!”

“으아억…!!!”

“꺄악!!”

…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개중엔 한입 물자마자 기함하며 바닥에 내던진 녀석도 있었다.

“이게 뭐야-!!!”

“왜, 왜 매운 게… 하나가 아니야?!”

“이거,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첫 주자인 내가 꽝을 골라서 안심하고 있던 이가 한둘이 아니었나 보다. 그들은 자신이 고른 호빵이 매운맛뿐임을 알고 즉각 반발에 나섰다. 그러자 안내자가 싱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설명해 줬다.

“보신 바와 같습니다. 아, 그리고 바닥에 던지신 분은 실격이에요.”

“어차피 저거 먹지도 못해요!! 이걸 어떻게 먹어!!!”

매운 호빵을 땅에 던진 학생이 분개했다. 이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냐며 항의했으나 안내자이자 심판을 겸임하시는 것 같은 분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이 모든 기획은 한도훈 님이 하신 거랍니다.”

역시 너였냐, 한도훈-!!!!

이건 첫수부터 내가 운이 안 좋았던 게 아니라 그냥 다 죽어 버려라, 이거 아닌가! 나는 얼굴을 세차게 구기며 단상에 있는 놈을 노려보았다. 한도훈은 거기서 뺀질거리는 웃음을 달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 하고 귀여운 척하는 게 아닌가.

한도훈, 가만 안 둬…!!

나는 칼을 갈며 다시 호빵을 베어 물었다. 역시나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극강의 매운맛이 전신을 관통했다. 내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절반을 해치우는 사이, 주연희가 울상을 지으며 고문을 당하는 옆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우왕좌왕하며 망설이길 잠시, 이내 결심이 섰는지 눈을 꼭 감고 호빵을 한입 물었다.

“응?”

그리고 주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단 듯 느릿하게 턱을 움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한 입 더 호빵을 베었다. 그 망설임 없는 모습이 놀라워 나도 모르게 굳어 있자, 주연희의 낯이 불시에 환해졌다.

“어, 저 당첨…? 당첨인 것 같은데요?!”

“…엥?”

그녀가 짠, 하고 내부를 보였다. 그 내부는 그녀의 말대로 평범하기 짝이 없이 팥앙금이 잔뜩 들어 있는 호빵이었다.

야, 이 한도훈 악독한 새끼야아…!!!

나는 그 사실에 절망하며 이 게임을 기획한 한도훈을 욕했다. 1등으로 달려와 봤자 뭐 하나. 8분의 1이라는 절망적인 확률 앞에서 좌절하게 되거늘…!! 이 새끼가 희망 고문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나랑 장난하냐!! 내가 분노에 이를 갈며 테이블보를 꽉 쥐었다. 그런 사이에 주연희는 호빵을 다 먹고 다음 테이블로 향하고 있었다.

앗. 그 뒷모습에 정신을 차린 난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운 걸 못 먹는 이들은 이미 항복을 외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매운 걸 나름대로 먹는 타입인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체면을 다 포기한 채 결연히 호빵을 씹어 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

이렇게 된 거 한 방에 해결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남은 반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

거의 씹지 않고 삼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게 바로 독살인가. 아찔한 통증에 흔치 않게 전신이 떨려 왔다. 이젠 온몸에 식은땀이란 비가 줄줄 흘러내렸다.

“아… 아 어억음….”

혀가 제대로 마비되어 발음이 되질 않았다. 선수들을 위해 배치된 휴지로도 정리가 안 될 정도로 줄줄 흐르는 눈물, 콧물을 닦으며 다 먹었다고 겨우 밝혔다. 그러자 안내자 겸 심판이 그런 날 보며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였다.

나는 그 사인을 받고 바로 발을 돌렸다. 입안에선 매운 내가 진동을 해 당장이라도 우유를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분명 실격이리라.

“아오, 제엔쟝…!!!”

밀어닥치는 울분에 내 다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분노로 인한 원동력은 가히 굉장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이미 저만치 앞서가는 주연희를 추격했다.

“…히익?!”

뛰어가던 주연희는 그런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낯을 창백히 굳혔다. 그녀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어쩐지 뭔가에 쫓기는 모양새가 된 것 같았지만 매운맛에 눈이 돌아간 나는 그것을 충분히 살필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두 번째 테이블에 당도했다.

두둔.

이번엔 보온병이었다. 뚜껑을 열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었다. 이 안엔 분명 마실 게 들어 있음을! 그리고 난 그 사실에 환희했다.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뭐든 좋아! 마실 거, 마실 거! 설령 이 안에 액젓이나 소금이 왕창 들어간 음료수가 들어 있어도 달갑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내 입안과 속은 난리였으니 말이다. 나는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첫 번째를 골랐다.

그리고…,

털썩.

눈앞에 닥쳐온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내 무릎은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세상에….”

“네, 뜨겁고 칼칼한 어묵 국물 당첨입니다.”

…한도훈, 이 개자식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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