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승부 앞에선 애고 어른이고 없는 법. (4)
뜨거운 태양. 그 아래서 매운 호빵에 이어 뜨거운 어묵 국물이란 고문이 닥친 난 차오르는 분노와 절망감을 가리고파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한도훈, 이 개놈의 자식…!!! 정도란 게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떻게 매운 호빵 다음에 이딴 걸 준비할 수 있는가. 입은 아직도 얼얼한 기운이 남아 제대로 다물어지지도 않는데! 침이나 흐르지 않으면 다행인 판국이었다. 당장이라도 개수대로 뛰어가 물을 뒤집어쓰고 싶을 지경인데 속을 진정시켜 줄 무언가를 준비해 주지 못할망정, 이따위를 준비하다니. 보온병 입구에서 전해지는 뜨뜻한 열기가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가만, 가만 안 둬, 한도훈…!!’
저 자식은 분명 진성 사디스트다. 거기에 소악마도 아닌 그냥 악마, 그 자체가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선 이런 기획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경기가 끝나면, 반드시 저 자식을 족치겠다는 마음으로 두 눈을 질끈 감고 국물을 입가에 대었다.
“……!!!!!!!!!!!!”
아까완 비교도 안 되는 번개 같은 감각이 뇌리를 관통했다. 그 아찔한 격통에 몸이 발작적으로 떨려 왔다.
아, 나 혹시 구마 당하는 건가? 근데 난 언제 귀신 들렸길래 구마를 당하는 거지? 아, 아니다. 내가 귀신일지도 몰라. 그럼 난 혹시 죽은 건가? 대체 언제 죽었지? 아, 어쩌면 트럭 사고 이후로 이미 죽었는데 그동안 있었던 일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하, 거참 너무 리얼한 꿈이네. 어서 깨어나 황천길이든 뭐든 데려가 줬으면.
더 이상 정상적인 사고 회로가 불가능해졌다.
“네. 시원한 보리차입니다.”
넋을 놓은 채 잔뜩 흐려진 시야와 표백된 뇌를 느끼는 사이, 안내자가 누군가의 당첨 소식을 알렸다.
…시원? 시원하다고?! 퍼뜩, 정신을 놓고 있던 와중에도 내 귀는 그 소리만큼은 기가 막히게 포착했다. 반사적으로 가출했던 정신을 돌이켜 그쪽을 보자, 그곳엔 얼떨떨해 보이는 주연희가 있었다.
“어, 저 또 당첨….”
또야?!
나는 연이은 그녀의 당첨에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주연희도 대놓고 기뻐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에 나는 해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여주 보정인가. 주연희는 미안한 듯 눈짓하다가 이내 그 시원한 보리차를 원샷 하고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허망히 바라보며 잠시간 현타 시간을 가졌다.
잠깐 멍때리고 있는 사이에 뒤이어 도착한 두 사람이 보였다. 두 사람은 걸린 것이 어묵 국물임을 깨닫고 낯을 창백히 질리며 나와 같이 좌절감에 얼굴을 감싸거나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사, 살려….”
“그냥 죽여 줘….”
정반대의 말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깊이 공감이 갔다. 나는 두 사람을 아련히 바라보며 다시 들고 있는 어묵 국물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실소가 자꾸 터져 나왔다.
‘하하, 재밌네….’
사실 재밌지 않다. 이것도 운명 덕인가? 운명 덕분에 주연희는 이 처참한 몰골을 피할 수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았다. 여자 주인공 보정을 위해 엑스트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이 차별쟁이에 비정하고 더러운 세상 새끼야! 하면서 쌍엿을 날리고 싶었다.
정말이지…. 먹는 게 이렇게 괴로운 일이었던가? 이 생을 살면서 음식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는 건 처음이었다. 주연희가 이미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정말 선뜻 입에 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닌 다른 두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정말 지고 말 텐데.
더위와 매운맛과 어묵 국물의 뜨거운 열기로 인해 시야가 뱅글뱅글 도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보온병을 다시 입가에 대보았지만 차마 혀에 닿지는 못했다.
나… 떨고 있니? 그래, 나 떨고 있다. 이 칼칼한 국물이 내게 선사해 줄 지옥이 너무 아찔했다.
“이나야-!!!”
손을 덜덜 떨며 머뭇거리던 중, 내 귓가를 강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들자, 저 멀리 관중석에서 누군가 외치고 있었다.
“…혜인아?”
그 정체는 바로 이혜인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곤 내게 있는 힘껏 소리치고 있었다.
“힘들면 기권해도 괜찮아-!!!!”
그 목소리는 시끄러운 관중석의 소란을 뚫고 내 귓가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나는 이혜인을 보며 망연히 입을 벌렸다.
너… 너, 그거 무슨 의민지 알고 하는 소리야?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 반은 완전히 꼴찌 확정이나 다름없는 거였다. 그러니까 내가 무리를 하지 않으면 지는….
“지면 뭐 어때! 그냥 우리끼리 재밌는 데 놀러가면 되잖아-!!!!”
뭣.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지면, 어떻다고?’
왠지 모르게 정신이 멍해졌다. 둔탁한 무언가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하나 이혜인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져서 구린 대로 가게 되면! 그냥 우리 그날 학교 째자-!!!!”
당당한 땡땡이 선전 포고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나는 아연하게 그녀를 보았다. 이혜인은 부끄러워 죽을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 있었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나를 올곧게 지켜보고 있었다.
두근. 무기질처럼 보이던 모든 것이 시야에 잡혀 갔다. 흐려졌던 시야에 빛이 스며든 기분이었다.
“그거 좋은데?”
그때, 어디선가 기계음이 섞인 쩌렁쩌렁한 소리도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웬 확성기를 들고 있는 고찬영이 있었다. …저건 대체 어디서 난 거지? 나는 상황도 잊고 잠시 황당히 그를 보았다.
“친구님, 원하는 대로 해~. 거기에 발맞춰 줄 테니까. …그렇지?”
고찬영이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았다.
“괘, 괘, 괜찮고말고…!”
“수, 수, 숫, 수학여, 여, 행이 별거야~!”
“마, 맞아, 맞아!!!”
…그런데, 어쩐지 반 아이들 모두 기가 확 꺾여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창백한 낯이 다 보였다. 고찬영 네 말이 다 맞다는 것처럼 고개를 기계적으로 끄덕이는 게… 찬영아, 너 지금 애들 웃는 얼굴로 협박하니…?
새삼 잊고 있던 저놈의 위치가 갑자기 눈에 보이는 기분이었다. 역시 암묵적이긴 하나 명실공히 2학년 일짱의 위엄이라 이건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그리다가 문득 안경희가 나를 향해 입을 뻐끔하는 게 보였다.
‘…뭐라 하는 거지?’
그런데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멀뚱히 보고 있자, 그녀는 막 발을 동동거리더니, 이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 을 하는 자세를 취했다.
“푸핫-!”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내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저 소심하지만 옹골찬 모습을 보아라. 얼굴이 다 빨개져 있는데도 나를 향한 응원을 포기할 수 없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어쩐지 그녀가 하고픈 말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아마… 너한테 나는 뭘 해도 멋있다든가, 최고라든가. 그런 거겠지. 그리고 그러한 내 선택지엔 ‘기권’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신기하네.’
원하는 대로 하라든가, 무리하지 말라든가. …누가 나한테 져도 된다는 말도 해 주고. 어쩐지 가슴이 술렁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쿵쿵이는 심장께를 누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었다. 그리고 고개를 퍼뜩 들고 그들에게 강하게 소리쳤다.
“난… 기권 따위, 안 해-!!!”
쾅! 하고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우지끈, 하고 무언가 섬뜩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난 개의치 않고 힘차게 말을 이었다.
“내 사전에 기권이란 말은 없어-!!!”
이런 통증은 지나치게 낯설어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다른 세계에서도, 이번 세계에서도 내게 기권이란 선택지는 있을 수 없었다.
이젠 입안이 다 화상을 입고 속이 뒤틀릴지언정 상관없다. 어차피 뒤지도록 아픈 건 운동할 때가 더했다. 그땐 토하고, 하혈하고 장도 꼬이고 난리도 아니었으니.
떠올려, 서이나. 타이어를 메고 해변가의 모래사장을 뛰던 그날을. 20kg 모래주머니를 이고 줄타기 훈련을 하던 그날을…. 중량 밴드를 차고 샌드백 1만 번 치던 그날을!
‘그래, 이따위 고통쯤 우습기 짝이 없지. 무엇보다 트럭에 치였던 그날보단 덜 아파, 덜 아프다고…!!!!’
결심을 마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뜨거운 어묵 국물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
뜨겁다. 맵다. 미칠 것 같다. 진짜 뒤질 것 같다…! 머릿속으로 온몸이 살려 달라 아우성쳤다. 하지만, 이따위 고통은 참을 수 있어!
탕-!
나는 보온병을 세차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숨을 가쁘게 고르며 심판을 보았다. 심판이 보온병의 내부를 확인했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잔뜩 커진다 싶더니,
“…다 드셨습니다.”
통과를 선언했다. 나는 그 대답과 동시에 바로 다음 테이블로 향했다. 저 앞엔 주연희가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골라인에 도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설마 당첨인가?! 아니,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난 꽝을 고를 테니까! 그렇게 되면 그냥 맛도 보지 않고 입안에 털어 먹을 작정이었다.
단숨에 제껴 주마!
나는 결연한 각오를 다지며 마지막 테이블에 거의 다다랐다. 그런데,
“으에엑….”
주연희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딱 봐도 맛없는 걸 억지로 먹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꽝이구나!
잘 나가다가 여기서 꽝이라니! 황당한 마음도 들었지만, 안도감도 함께 찾아왔다. 여기서 내가 더 빠르게, 혹은 좀 더 늦더라도 그 차이가 심하지 않다면 1등도 머지않은 이야기였다. 나는 다가온 희망에 눈을 빛내며 빠르게 테이블을 확인했다.
“!”
그것은 푸딩이었다. 한입에 털어 먹기엔 조금 크긴 하지만, 이 정도면 승산이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기괴한 맛이 날까 긴장이 되었으나, 망설일 틈은 없었다. 무엇보다 맵거나 뜨겁지 않으면 뭐든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자연스레 손을 첫 번째로 향했…,
“친구님-!! 세 번째 골라-!!!”
…다가 들려온 목소리에 움칫, 손을 멈추었다.
‘세 번째?’
나는 눈을 껌뻑이다가 뭐, 상관없지 싶어 세 번째를 집었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스푼으로 한입을 크게 떠 입안으로 직행했다.
“……?”
나는 두 눈을 멀뚱히 깜빡였다. 어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푸딩을 의문스레 보았다. 그리고 다시 푸딩을 떠 입안에 넣어 보았다.
“으음…?? 으으음??!”
이, 이건…!! 나는 믿기지 않은 현실에 파밧, 하고 안내자 겸 심판을 보았다. 심판은 그런 날 보며 싱긋 웃었다.
“일반 푸딩 당첨입니다.”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리었다. 그리고 다시 한입 떠먹어 봐도 눈앞에 있는 푸딩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입 안에 퍼지는 달달한 맛에 감격의 눈물을 글썽이며 나머지를 한 방에 털어 먹었다. 탕, 하고 호쾌한 소리가 테이블 위로 퍼졌다. 심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사인에 망설이지 않고 지면을 박찼다.
그렇게 내 발은 골라인을 넘어섰고,
“여자 400m 1등은 2학년 6반 서이나 선수입니다!!”
감격적인 1등 안내가 운동장에 널리 퍼졌다.
***
와아아아아-!!!!!!
거대한 환호성이 교내를 지배했다. 다양한 교복 무리는 딱 보아도 이 학교의 소속들이 아닌 걸 증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날만큼은 자신들의 축제라도 된 것처럼 흥분에 감싸여 있었다.
“쟤 누구야?”
“한도훈이 저거 준비한 거지?”
“서이나? 이름 어디서 익숙하지 않아??”
“아무튼 진짜 개 쩐다!”
“그니까 쟤가 누군데??”
“아, 몰라!! 재밌으면 됐지!!”
모두가 하나 되어 이번 여자 400m 경주 결과에 대해 웅성였다. 화면상으로 보아도 매워 보인 호빵을 다 먹은 것도 모자라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어묵 국물의 2연타는 보는 이도 괴롭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외쳤다.
자신은 기권 따위 하지 않노라고.
그 강렬한 외침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흥분에 감싸이게 하기 충분했다.
“호오….”
그리고 여기. 무리보다 조금 동떨어진 나무 아래서 나직한 감탄을 속삭이는 이가 있었다.
내 사전에 기권은 없다, 라.
고개가 슬며시 기울여졌다. 그러자 쓰고 있던 두꺼운 렌즈가 살짝 일렁이며 빛을 반사했다.
“훗-.”
그자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튀어나왔다. 얼굴 절반을 가리는 큰 안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낯에 깃든 흥미는 감춰지지 않았다. 렌즈 너머의 예리한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휘잉-. 그와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그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된 채로, 나부끼는 바람결에 그 등 뒤로 드리워진 검고 기다란 머리칼이 잘게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