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응축된 분노 (1)
***
“치인구우님~!!!”
“으븝?!”
승리의 여운도 잠시, 골라인에 도착하자마자 덥석, 커다란 몸에 단숨에 안겨졌다. 당황스러워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고찬영은 그런 내 버둥거림에도 개의치 않고 내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이며 자신의 얼굴을 내 정수리 위에서 부벼 댔다.
“친구님, 저어엉말! 수고 많았어!!! 우리 친구님은 왜 이렇게 듬직해서 사람 설레게 만드나 몰라~!”
고찬영은 정말 내가 1등 한 게 기뻤던 모양이었다. 그는 홍조를 띤 채 웃음을 만면에 그리며 막상 우승한 나보다 더 기뻐 보였다. 물론 나도 같이 기뻐해 주고 싶었다.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안타깝게도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찬영아, 잠깐….”
“이나야, 지이이인짜!! 멋있었어-!!!!”
그러나 내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뒤이어 안경희의 손을 붙잡고 달려온 이혜인이 이 축하 현장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이혜인도 내 얼굴을 한껏 끌어안더니 제 일처럼 기뻐하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이, 나, 야…! 멋있…! 허억, 허억.”
그리고 얼마나 달렸는지 모를 안경희가 무릎을 굽힌 채 숨을 몰아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워 줬다. 그래. 애들아. 정말 고마워. 정말 고마운데…!!
“얘들,”
“서이나 선수! 이번 400m 경주 1등 축하드립니다-! 주변에 있는 분들은 친구분들이신가요?”
다급히 입을 열었으나, 이번엔 인터뷰어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인터뷰어는 프로 정신을 어디다 내던졌는지 내게 마이크를 들이밀면서 고찬영에게 시선이 가 있었다. 내가 거기에 울컥하든 말든 고찬영은 내 우승이 마냥 기쁜지 방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얘가 제 베프예요. 베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제 친구 완전 짱이죠? 최고로 멋지지 않나요?!”
…녀석. 그렇게 말하니 쑥스럽잖아. 카메라 앞에서 그 누구보다 해맑게 칭찬하는 모습이 낯간지러우면서도 기분이 좋긴 하다만, …찬영아, 그런 건 나중에 해 주면 안 될까?
“아, 네. 정말 굉장하셨습니다. 서이나 선수. 1등 하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고찬영의 칭찬에 인터뷰어도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나 보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내게 질문을 돌렸다. 나는 그런 인터뷰어에게 낯을 창백히 굳히며 드디어 하고픈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발,”
“네?”
“제발…!”
물 좀 마시게 해 줘요…!!!!!
내 절박한 외침은 마이크를 통해 운동장을 크게 가로질렀다.
***
“…….”
뚜둑, 운동장 어느 한편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팔짱을 끼던 남자의 손등엔 힘줄이 잔뜩 불거져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보이고 있었다.
“히익…!”
그런 남자를 흘깃흘깃 보던 옆자리의 학생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울상을 짓고 그와 거리를 더 벌렸다.
고오오-.
어두운 공기가 그 주변을 압도했다. 축제나 다름없는 다른 반에 비해 유일하게 찬물 끼얹듯 조용한 반은 단 한 곳뿐이었다.
“반~휘~혈~.”
그때, 위쪽에서 명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휘혈은 눈만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살벌한 시선이 향한 곳엔 구령대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도훈이 있었다.
한도훈은 반휘혈이 노려보든 말든 싱글싱글 웃으며 휙, 하고 무언가를 던졌다. 반휘혈이 그것을 반사적으로 받자 한도훈은 턱을 괸 채 턱짓으로 어딘가를 향했다.
“가 보는 게 좋지 않겠어?”
“…….”
반휘혈은 그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곤 눈빛이 살짝 누그러지며 그곳을 보았다.
“누나한테 전해 주면 좋아할걸?”
한도훈이 가리킨 곳은 바로 서이나가 향한 개수대였다. 그리고 그가 던져 준 물체의 정체는 시원한 스포츠 음료였다. 반휘혈은 그것을 꾹 쥐며 잠시 머뭇거렸다. 한도훈은 그런 그의 망설임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다 이내 비웃듯 어깨를 슬쩍 으쓱였다.
“그러다 선수 뺏긴다?”
반휘혈은 그 말에 눈을 날카로이 뜨며 한도훈을 노려봤다. 그가 말한 의미가 무슨 의민지 바로 파악한 그는 이를 갈며 그에게 경고했다.
“…닥쳐.”
“그렇게 화를 낼 거면서 왜 망설이나 모르겠네.”
방금도 고찬영이 누나한테 들러붙은 거 보면서 빡쳤으면서. 한도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뒷말을 생략했다.
“…네가 뭘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반휘혈은 얼굴을 굳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뿐 아니라 그의 이마에까지 힘줄이 잔뜩 불거졌다. 심상치 않은 낌새였으나 그런 모습에 겁먹을 한도훈이 아니었다. 그렇게 심약한 성정이었다면 진즉에 그와의 인연이 끊어졌을 터였다. 한도훈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래. 난 모르니까 직접 네 입으로 말하라고.”
그러곤 한도훈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나도, 누나도.”
“…….”
반휘혈은 그 말에 조용히 그를 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 계단을 디뎠다.
“한도훈.”
“?”
나직한 부름이 한도훈을 향했다. 한도훈의 의아한 시선이 반휘혈에게 닿았다. 반휘혈은 그를 힐끗 보다 시선을 돌리며 시큰둥히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건 너무 뻔해.”
“…뭣.”
예상치 못한 묵직한 한 방에 한도훈은 몸을 휘청였다. 팔걸이에 괴던 팔꿈치를 삐끗하며 중심을 잃어버린 한도훈은 어리벙벙하게 반휘혈을 보았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그는 한도훈을 보지도 않고 무심히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반휘혈은 자리를 떠났다. 한도훈은 그런 그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뻔하다니.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너뿐일 거다.”
한도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 픽, 웃음을 흘리며 다시 턱을 괴었다.
‘그렇지만…. 역시 그런 점 때문에 네가 더 좋은 거지만.’
자신의 모든 것에 앞서가는 그의 모습을. 한도훈은 사라진 그의 자취를 좇으며 조용히 생각했다.
***
반휘혈은 서이나가 있을 개수대로 다가가다 잠시 멈춰 섰다. 그는 조용히 들고 있는 스포츠 음료를 쥐며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
뭐라고… 말해야 하지.
막상 먼저 다가서려니,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최근 그녀를 일방적으로 피한 것은 자신이었다. 사실 지금도 다가서기 망설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외쳤다.
‘나는 기권 따위 안 해!’
두근.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에 차도 포기하지 않고 부딪히는 그 모습에 그의 심장이 크게 널뛰었다.
‘후회는 적당히 남기는 게 좋아.’
답은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얘가 제 베프예요. 베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마음에 안 들어.”
툭, 속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반휘혈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은 그렇게 대놓고 표현할 수 없는데, 허물없이 누나에게 닿는 그 자식이. 친구랍시고 서슴없이 들러붙는 그 모습에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그 녀석은 되고, 자신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반휘혈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자신은 그 녀석과 달리 동생으로 인정받은 사이였다. 그런데 말로 표현하는 것도, 하물며 손을 잡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한도훈의 계획은 대충 짐작이 갔다. 이렇게 거창하게 하는 건 그의 취미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의 속내는 뻔했다.
‘…온갖 수단 가리지 않고 이어 주려는 거겠지.’
특히나 밝히지 않은 그 이벤트 종목. 아마 거기가 하이라이트일 터였다. 피곤한 녀석. 쓸데없는 데서 이상한 집착을 한다. 어차피 자신과 누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밝혀도 들어 먹지를 않는다. 경고를 해도 그 자리 그대로였다.
‘그래도….’
이건 좀 쓸 만할지도. 반휘혈은 힐긋, 들고 있는 스포츠 음료에 시선을 주었다.
‘이걸로… 조금은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까.’
반휘혈은 쥐던 음료를 꾹 쥐었다. 그리고 힘을 풀며 숨을 고르듯 두 눈덩이를 꾹꾹 눌렀다. …이것을 건네며 어떤 대화를 하면 좋을까. 뭐라도 좋으니까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이대로… 멀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놈들이 끼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건,”
조심스레 열리던 입이 한순간에 막히었다. 또다. 또 여기서 멈추었다. 강제로 찢어진 듯한 답안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건가?
소리 없는 물음이 제게로 던져졌다. 그동안 그녀와 마주 서지 못했던 벽이 또 정면으로 마주해 왔다. 또 이 어중간한 상태로, 해답 없는 상태로 그녀를 대해도 되는 건가? 또 그녀는 자신을 단절하려 들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나는….’
손이 살짝 떨려 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페트병을 움켜쥐었다. 왠지 숨조차 버겁게 느껴져 그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 진짜 재수 없네.”
“저년은 대체 뭐야?”
그때, 반휘혈의 귓가로 서슴없는 욕설이 들려왔다. 그의 정신이 수렁에서 끌어 올려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평소라면 흘려들었을 소리였으나, 그 날 선 욕설은 어쩐지 그의 귀에 박혀 왔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여성들이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쟨 누군데 저렇게 나대?”
“아, 시발. 얼굴도 못생긴 게 고찬영한테 추근대? 존나 재수 없네.”
천박한 욕설이 그의 귀를 강타했다.
‘…고찬영.’
반휘혈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그 이름 덕택에, 그녀들이 말하는 주체가 누군지 깨달았다.
“…….”
꽈악, 내용물로 꽉 찬 페트병이 위태롭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반휘혈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성의 끈을 꽉 잡으며 소리 없이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꼬리 쳤길래 고찬영이 저래?”
“걸레 아냐, 걸레?”
“와, 그걸 얼마나 잘…, 꺄악!!”
팡-!!!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그 소리를 지척에서 들은 여성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기겁했다. 그러곤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그 원인을 확인하고자,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뭔…, 히익?!”
그러곤 발견한 인물에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왜 그러…, 꺄악?!”
“바, 반휘혈?!”
상상도 못 한 인물의 등장에 그녀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얼굴을 붉혔다. 미, 미쳤다. 반휘혈이 왜 여기에?! 자신들한테 무슨 볼일이지?! 그녀들은 예상치 못한 스타의 등장에 호들갑을 떨며 모습을 정돈했다. 하나 그녀들은 들뜬 기분에 놓친 게 하나 있었다.
“…봐.”
“어, 네?”
“다시 지껄여 보라고.”
그것은 눈앞에 있는 이가 무슨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알아보지 못한 건 그녀들에게 있어서 큰 실책이었다. 반휘혈은 들고 있는 음료수병, 이제는 비어 버린 병을 강하게 쥐었다. 그의 손에선 안에 담겼던 액체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저희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나 그가 저희의 말을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한 채 여성들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지를 못 하고 있었다. 반휘혈은 그런 그녀들에게 피식, 실소를 흘렸다. 하나 그의 의도완 다르게도 그 어이없단 조소조차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그 덕에 여성들의 얼굴에는 홍조가 짙어졌다. 그리고 반휘혈의 입에 걸린 미소도 더 깊어지는가 싶더니,
“으극…?!”
“꺄아-!!!!”
“뭐, 뭐 하는…?!”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반휘혈은 그런 여자들의 호들갑에도 그저 고요히 고개를 꺾으며 제 손에 쥔 타인의 입가를 강하게 틀어잡았다.
“누가….”
어느샌가 그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는 한순간에 자취를 감춘 뒤였고,
“…걸레라고?”
그 안에 담긴 것은 그저 뼈가 아릴 듯한 적막한 살기였다.
“…미친.”
툭, 데구르르-. 누군가가 그런 반휘혈을 보며 들고 있던 배트를 떨궜다. 그는 식은땀을 주르륵 흐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마왕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