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02화 (202/306)

203. 응축된 분노 (2)

***

“으에엑….”

아이고, 내 속아아…. 나는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친구들은 그런 내 등을 두드려 주며 위로했다.

“이나야, 괜찮아?”

“안 괜찮아아….”

나는 젖은 얼굴을 맨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물기가 후드득 떨어졌으나, 어차피 날이 좋아 금방 마를 터였다. 나는 이제야 조금 진정된 입 안을 느끼며 피로한 눈으로 고찬영을 보았다.

“자, 이제 가 봐. 너 남자 400m 대표잖아.”

어서 가 보라며 훠이 훠이 손을 내저었다. 벌써 출발 라인엔 이번 경기 선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 400m 경기에선 이재현과 고찬영이 출전한다. 그래서 이재현에게도 응원을 해 주기 위해 출발 라인을 살폈다.

‘…응? 재현이 어디 갔지.’

그런데 이재현이 보이질 않는다. 그 성실한 애라면 진즉에 대기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뭐, 금방 오겠지. 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고찬영의 등을 밀었다. 하지만 고찬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친구님을 두고 가…!”

누가 들으면 내가 죽는 줄 알겠다. 울상을 지으며 주먹을 꽉 쥐는 그 모습이 연극적이다 싶을 정도로 참 서글퍼 보였으나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다.

“1등 하고 돌아오면 낼 놀아 줄게.”

“그럼 다녀올게!!!”

고찬영은 순식간에 출발 라인으로 떠나 버렸다. 저 단순한 녀석 같으니. 나랑 노는 게 그렇게 좋냐. 하긴, 요 근래 고찬영이 커플이었기도 하고, 시험이라든가 여러 일정이 난감하게 껴 있어서 같이 놀지 못하긴 했다. 거참, 저 녀석도 은근 손 많이 간단 말이야.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픽,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자, 이제 가자, 가자.”

뭐, 그건 그거고 어서 반으로 돌아가서 물이라도 속에 부어야겠다. 쓰린 속에 나는 저절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배탈 나려나….’

장이 튼튼해서 배탈 난 적은 여태 없었지만, 이번만은 불안했다. 매워도 적당히 매워야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매운 게 어딨는가. 이번 희생양인 고찬영과 이재현이 안타까웠으나, 나는 두 사람을 응원하기 위해 다시 관중석으로 향했다.

“야, 야!! 지금 마왕 떴대…!!!”

“헐, 미친-!!!”

“……?”

그런데 내 발을 사로잡는 단어 한 마디.

‘마, …뭐라고??’

나는 움찔, 발을 멈추며 방금 요상한 단어를 외치고 지나간 학생을 보았다. 차림새를 보아 하니, 타 학교 학생인 듯싶었다. 아니, 근데 진짜 웬… 마, 마왕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인과를 알 수 없는 중2병이 극심한 단어에 얼굴을 웩, 하고 구겨졌다.

“어, 마왕?”

그때, 안경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란 듯 중얼거렸다. 역시 안경희. 넌 뭔가 알고 있구나.

“그게 뭐야, 경희야?”

대체 누구길래 저딴 유치하고도 강렬한 별명이 붙여졌는가. 저절로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이젠 정말 나도 이 세계의 주민이라 해도 될 거 같아, 라고 여길 정도로 면역이 되었다 싶을 시점에 이딴 걸 들을 줄이야. 분명 저 정도의 별명이면 꽤 유명할 텐데? 내가 아는 놈들 중에 가장 그럴싸한 놈은….

“아, 혹시 정태우? 정태우가 우리 학교에 온 건가?”

정태우. 가장 확률이 높은 사람은 그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 그 녀석이 무슨 볼일로? 이유 따윈 알 수 없었지만, 뭐… 소문으로 듣자니, 싸움을 좋아한다고 하질 않던가. 여기에 싸움 잘하는 녀석이 많은 데다 체육 대회도 있다고 하니깐 호기심에 찾아왔을 수도 있을 노릇이었다.

흠. 그럼 좀 피곤해지려나? 다가올 번잡함에 얼굴이 떨떠름히 굳어졌다.

“어, 어어…???”

그런데 안경희가 당황스러운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곁에 있던 이혜인마저 황당한 눈초리로 날 보고 있었다.

“…이나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어, 나 뭐 잘못 말했어…?”

뭐지. 내가 잘못 짚었나? 아니, 그건 그럴 수 있다 쳐도 내가 이런 소문에 둔감하다고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이렇게 황당한 반응을 보이니 나조차 당황스러워졌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자, 안경희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파드득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마왕이란 건….”

그러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 반휘혈의 별명이라서 그래…!”

“뭣.”

…뭐어어어어?!?!?!

***

반휘혈. 그는 왜 유명한가.

얼굴이 잘생겨서? 싸움을 잘해서?

모두 맞는 말이었다. 반휘혈은 얼굴도 절세의 미남에 싸움도 차기 사대천왕 유력 후보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거의 중학교 1학년 때 멈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그는 거의 잠적을 했다시피 조용했다.

그렇다면, 이 유명세를 이용해 반휘혈을 건드리는 이는 많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였다.

왜, 반휘혈은 아무도 못 건드리는 천적이 되었는가. 아니, 건드려선 안 되는 놈이 되었는가.

그것은 그의 화려했던 1학년 전적으로 비롯되었다.

‘그, 우선 반휘혈은 한 번 싸우면 그게 누구든 최소 전치 3개월은 기본이었어.’

‘또 여자 남자 가리지도 않았고.’

‘게다가 표정도 하나 안 바뀌고 사람 패기로 유명했거든.’

‘예전에 진짜 유명한 이 일대 일짱이… 있었거든. 거의 사대천왕급이라고 말이 많았는데…. 반휘혈이 걜 이겼거든…? 그러긴 했는데….’

안경희는 입을 열기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내 집요한 추궁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좀… 좀 많이 잔인했나 봐.’

‘누구 건지는 몰라도… 교복이 피로 다 젖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대.’

나는 어느샌가 두 사람을 뒤로하고 달리고 있었다. 귓가론 안경희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그래서 걔가 마왕이야. 도무지… 그 모습이 사람 같지가 않았다고 해서.’

반휘혈, 너 대체 무슨 과거를 산 거야…! 나는 창백한 낯으로 황급히 그 소란의 진원지로 향했다.

내가 아는 반휘혈은 타인에게 무심하고 까칠한 놈이었지,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니었다. 대체 내가 몰랐던 그의 세월은 무엇인가. 어째서 나는 그의 과거를 이렇게나 모르는가. 나는 뼈아픈 실책을 한 기분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중2병 같은 별명에 오글거려 할 때가 아니었다. 그보단 내 귀에 전혀 들려오지 않았던 그 미친 별명이 부상했다는 게 가장 큰일이었다. 그만큼 반휘혈의 심기를 어지른 일이 생겼단 뜻인데…. 이제껏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건 나로 인해서인 경우뿐이었다. 그것도 방금 들은 소문에 비하면 굉장히 귀여운 수준이란 걸 알았지만!

‘제발, 제에발…! 늦지 말아라!!’

반휘혈이 어디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몰린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을 향해 급히 코너를 돌았다.

“어엇…!”

“아.”

근데, 하필이면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멈춰 서긴 했지만 부딪히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가슴팍에 부딪힌 이마를 부여잡으며 사과했다.

“미,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오….”

그런데 부딪힌 당사자의 반응이 지나치게 미적지근했다. 나는 그 무미건조한 감탄사에 급박한 상황이란 것도 잊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띈 건 커다란 안경이었다.

“……?”

게다가 연이어 보이는 건 얼굴 전반을 덮는 덥수룩한 곱슬머리. 게다가 자세도 구부정한 게…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일반 남학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별반 다를 바 없는 게 맞을 텐데.’

왜 이렇게 시선을 잡아끌지…? 왠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남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 그런데 지켜볼수록 목이 좀… 아파 왔다. 아무래도 보기와 달리 키가 굉장히 큰가 보다. 대충 170대 후반에서 180대 초반은 되려나? 으음…? 잠깐. 자세히 보니깐 잔근육도 꽤 있었다. 저 구부정한 어깨를 펴게 되면, 어쩌면 내 예상보다 체격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어라…?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뭔가 자꾸 나왔다. 당황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무례한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고개를 휙 들어 그를 보았다. 그러자 두꺼운 렌즈 너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깜빡, 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 그는 내 무례한 시선에 고개를 잠깐 갸웃거리더니, 돌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어….”

이제 보니까, 이 사람….

‘입술 되게 예쁘….’

“야, 야. 빨리 와-!! 3년 만에 마왕 재강림이라고-!!”

“간다고!!”

허엇. 나는 내 곁을 소란스럽게 지나가는 학생들의 말에 파드득 정신을 되찾았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아, 아무튼 앞 못 봐서 죄송합니다! 그럼 급한 볼일이 있어서 이만-!!”

나도 모르게 홀린 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시선을 잡아끌었던 그 수상한 만남을 뒤로한 채 나는 급히 떠났다.

“잠깐, 잠깐만요! 지나갈게요-!!”

황급히 인파를 헤치며 무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서 빨리 반휘혈을 막고자 하는 마음에 조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구경꾼이 너무 많아서 비집고 들어가기가 굉장히 힘겨웠다. 체육 대회는 뒷전이냐 싶을 정도로 떼로 몰려든 모습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자암시만…! 푸하…!”

겨우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 몸을 빼내고 나서야 그제야 숨통이 터졌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은 길지 않았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오래 걸리지 않아 반휘혈을 금방 찾아냈다. 반휘혈은 바로 그 빈 공간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어째서…

“…크윽.”

“…….”

어째서 다정한이… 반휘혈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가.

“휘, 휘혈아…!!”

게다가 400m를 뛰고 있어야 할 이재현은 왜 또 여기 있고…?

“왜? 그냥 내버려 둬. 더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을 제대로 하고 있는 한도훈마저 있다니.

‘뭐야, 이거.’

뭐가 이렇게 총체적 난국이야?! 상상도 못 한 현장의 파국에 나는 입을 망연히 벌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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