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응축된 분노. (3)
“…손속이, 거치네. 반휘혈.”
쿨럭, 다정한이 잘게 기침을 토했다. 딱 보아하니 배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고통스러운 반면에도 웃는 낯을 잃고 있는 놈에게 때아닌 감탄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
하지만 반휘혈은 요지부동이었다.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고요한 뒤태가 어쩐지 불길했다. 마치 태풍의 중심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선 조금만 벗어나도 격류에 휩쓸릴 듯한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넌 혁이랑 달리 좀 더 이성적일 줄 알았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네가 뭔데 휘혈이를 판단해?”
“도훈아-!”
이재현이 깜짝 놀라며 한도훈을 불렀다. 아이고, 한도훈 저, 저놈의 주둥아리! 지켜보는 나마저 탄식이 나오는 간섭이었다. 하지만 다정한도 반휘혈도 한도훈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각자 대치하고 있었다.
‘어?’
그러다 문득 다정한의 등 뒤로 여자 세 명이 보였다. 마치 덜덜덜 떨면서 이도 저도 못 하고 울면서 겁에 질려 있었다. 게다가 마치 다정한이 유일한 구명줄처럼 보이는 게…, 마치 저들이 반휘혈에게 잘못을 한 것 같지 않은가.
“미친….”
저 애들도 참 용자였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반휘혈인가. 게다가 반휘혈은 주위에 무심해서 화를 낼 일도 많이 없는데! 진짜 골 때리는 놈들이었다. 나는 어이없이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라 우선 휘혈이부터 진정시켜야…’
“꺼져.”
돌연 반휘혈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 고저 없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나서려던 몸을 멈추었다.
“그럴 순 없어. 지금 네가 이 사람들을 죽일 거 같거든.”
힐끗, 다정한이 뒤를 살폈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가자 불현듯 시야에 잡히는 게 있었다.
“!”
세 명 중 가운데 있는 여자아이. 그 아이의 상태가 어딘지 이상했다. 셋 중 유독 희게 질린 게 좀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볼이 어쩐지 심상찮게 부어 있었다.
‘맞은 건가? 아니, 저건 그거랑 좀 다른데.’
직업이 직업이었다 보니 구타 흔적인지 아닌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좀 더 가까이서 보는 게 확실했지만,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때린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맞았으면 진즉에 뭐든 터졌겠지만.’
코피가 터지든 입안이 터지든 얼굴이 난리가 났겠지. 아무래도 다정한은 더 늦기 전에 반휘혈을 말리는 데 성공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슬슬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쩐지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
그때 반휘혈이 한 발자국 나섰다. 그리고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전조도 없이 불시에 내지른 주먹에 다정한이 뒤늦게 반응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만-!!!!”
그리고 동시에 위급함을 느낀 내가 버럭 소리쳤다.
“!”
우뚝, 반휘혈의 팔이 멈추었다. 그의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다정한에게 닿지 않고 있었다.
“누나-!!”
그리고 뒤늦게 나를 발견한 이재현은 얼굴을 환히 밝혔다.
“칫….”
그리고 한도훈은… 참으로 얄밉게도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도훈을 면박 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반휘혈에게 성큼 다가갔다. 반휘혈은 팔을 내렸으나,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휘혈아, 대체 무슨 일이야? 네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나는 상황을 좀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아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하나 반휘혈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주먹만 안 들었을 뿐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모습은 최강혁 때 이후로 처음인가.’
아니, 더 화났나? 표정은 눈에 띄게 변화는 없지만 그 분위기가 지나치게 살벌했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이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로지 한 곳에 고정돼 여자애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확실히 위험하긴 하네.’
그 모습이 정말 방해꾼들만 없으면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일게 했다.
‘이 상태로 표정 변화도 없이 사람을 때려눕힌댔나.’
참 우습게도 왜 마왕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잠깐 상상해 보니 당사자나 구경꾼의 입장으로선 좀… 아니, 많이 오싹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1학년 때의 반휘혈은 날이 서 있었단 얘기만큼은 오늘이 아니라 이전에도 들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게 왜 지금에서야 생각났는지…. 정말 여러모로 한심한 누나구만. 나는 스스로를 타박하며 반휘혈의 어깨를 붙잡고 다정한과 거리를 벌렸다. 반휘혈은 버티고 서 있지 않아 다행히 순순히 움직여 주긴 했으나, 여전히 분위기는 살벌했다.
“그래그래. 무슨 일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우선 진정하자. 휘혈아. 쟤네들이 무슨 험담이라도 한 거야? 아, 아니, 그건 아니려나.”
말하고서도 이건 아니었다. 자기 험담을 해도 개무시를 했으면 했지, 걸고넘어질 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상하게 추근댔어?”
나는 주변을 의식하며 반휘혈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반휘혈은 여자 문제로 이골이 난 적이 있었다 보니, 어쩌면 저 녀석들이 쓸데없는 소릴 해서 반휘혈의 트라우마 트리거를 당긴 걸지도 몰랐다. 그러자 반휘혈이 몸을 움찔하며 드디어 시선이 움직였다. 그는 잠시 날 보더니 무언가를 참기 힘든 것처럼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니야.”
그러곤 짓씹는 듯한 부정이 들려왔다.
“어?”
그럼 대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반휘혈이 서슬 퍼런 눈을 다시 여자들에게 쏟아 냈다.
“흐이익…!!”
그것은 피부를 관통하는 듯한 살기였다. 그것이 비록 내게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확연히 느껴지는 그의 분노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도대체 무슨 이유길래 이 녀석이 이러는가. 나도 저절로 얼굴을 심각히 굳혔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감히… 누나를 모욕했어.”
“…뭐?”
누굴… 모욕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여성들을 보았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곧 누구나 할 것 없이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아, 젠장.’
…그런 거였냐! 닥쳐온 아찔함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 하필 반휘혈이 내 욕을 들을 게 무엇인가.
반휘혈에게 있어서 나란 존재의 크기는 그 누구랑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것은 자만이 아닌 사실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위태로운 청소년 시기에 만나는 어른이란 그런 존재 아니겠는가. 분명 나는 그에게 있어서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을 터였다. 반휘혈이 어느 누구와도 확실히 차별점을 두며 나를 대하는 것이 가장 큰 증거였다. 나도 그것을 알기에 그와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면 하루빨리 해소하고 싶었던 것이고 말이다.
‘아오, 사람 많아서 불길하다 싶더니….’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이 터질 줄이야. 확실히 우리 학교 학생들이라면 할 만한 실수는 아니었다. 내가 교내 유명인들과 친하다는 건 이미 기정사실화된 이야기였다. 그러니 고찬영이나 도방중 출신 일진들의 눈 밖에 나고 싶은 애들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나 그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대놓고 내 욕을 할 용자는 이 학교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타 학교 아이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른다. 내가 이들과 얼마나 친분이 강한지 알 방도가 별로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내용이 안 좋을 건 뻔하디뻔했다. 대충 얼굴 못생겼다느니, 주제도 모르고 나댄다느니 그런 비하적인 말을 한 거겠지.
아마 반휘혈이 내 욕을 이렇게 직접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을 테니… 어떤 구석으로는 불같은 면모가 있는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나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렇게 상황을 꼬이게 만든 저 여학생들에게 열불이 나는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휘혈아. 그건 말이지…. 아니, 그건 잘못된 게 맞는데…! 어, 그래도 진정하는 게 어떨까…?”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막으며 침착히 입을 열었다. 딱히 나도 내 욕을 한 놈들을 배려해 주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으나, 현재 반휘혈의 상태로선 그 손속이 심히 과할 것 같았다. 이 건은 적당히 겁만 줘도 충분할 일이었다.
비록 최근 갈등이 또 빚어지긴 했어도 이제 겨우 그에게도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가 찾아왔다. …마왕이란 별명이 불렸던 시기처럼 또 이렇게 폭력으로써 해결하려 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난처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만류하자, 그의 눈동자가 조용히 다시 내게로 향했다.
“나보고… 진정하라고?”
“그래. 그리 큰일이 아니잖아. 어차피 그런 건 흔하니까….”
“…흔해?”
그의 얼굴이 더 가라앉았다. 으득, 갈리는 그의 이에 나는 반사적으로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아, 아니~. 사람 뒷담화 하는 건 흔한 일이잖아?! 그런 의미! 그런 의미야!!”
“그러니까… 결국 이따위 소릴 줄곧 들어왔단 거군.”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에잇, 젠장.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선! 틀린 말이 아닌데 원치 않게 불난 집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아, 그래. 차라리 잘됐어.”
그의 눈이 아까보다 한층 더 살기로 번뜩였다. 그는 스윽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다.
“이 기회에… 본보기로 싹을 뽑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움찔, 그가 시선이 닿은 이들이 몸을 떨었다.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그의 흉포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싶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그 심상치 않은 전조에 그의 가슴팍 가까이 손을 뻗어 막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 사달이 일어날 것 같았다.
꿀꺽. 초조함에 침이 저절로 삼켜졌다. 구경꾼이 많긴 했지만, 이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만류하기 위해선 이젠 정말 실력 행사도 필수불가결이었다.
“나 정말 괜찮아.”
“…….”
하지만 역시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대화로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얼굴을 심각히 굳히며 진지하게 말했다.
“화를 내도 내가 낼게. 그리고 이런 거에 일일이 반응했다간 한도 끝도 없어. 그러니까….”
“하.”
반휘혈이 돌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그는 내 손을 확 잡아챘다. 반응할 새도 없이 잡아당겨진 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코앞엔 반휘혈이 있었다. 반휘혈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뱉어 냈다.
“그러니까 내가 하겠다는 거야.”
“뭐?”
“난 누나 방법 못 믿어. 어차피 이번에도 몇 마디 끝내고 보내 버리겠지. 그런데 그런다고 저런 녀석들이 그만둘 것 같아?”
이를 아득 깨물며 읊조렸다.
“아니야.”
그는 내 어깨를 꾹 쥐었다.
“자기가 한 행동을 반복하고 또 반복할 거야.”
쥐어진 어깨가 아팠다.
“누나는 자기 얼굴에 또 침을 뱉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강한 악력이 사라졌다.
“비켜.”
그것은 마치 마지막 경고와도 같았다.
“…….”
나는 말없이 반휘혈을 보았다. 반휘혈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였다. 하나 그 거리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는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더니, 눈을 돌리며 나를 비켜섰다. 내 곁을 지나가는 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의 발이 멈추었다. 한 발자국 겨우 갔을까, 반휘혈이 도로 멈춰 선 채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뭐야.”
“뭐긴 뭐겠어.”
나는 그에 평이하게 대꾸했다.
“내 대답이지.”
꽉-. 나는 붙잡은 그의 팔을 강하게 쥐었다. 내 손등엔 뼈와 힘줄이 잔뜩 도드라졌다.
“휘혈아.”
나는 차분히 그를 불렀다. 그의 가라앉은 얼굴이 내게 향했다. …역시 반휘혈. 이렇게 강하게 틀어쥐는 데도 아픈 내색이 일절 없었다. 그의 얼굴이 굳어진 건 순전히 내가 붙잡은 탓이겠지.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씁쓸히 웃었다.
“역시 안 되는 건 안 돼.”
그러나 역시 할 말은 해야겠다.
“이런 내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안 된다.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똑같았다.
“폭력은 답이 아니야.”
사실 나도 알고 있다. 힘 있는 자에게 폭력만큼 쉬운 답안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위협적인 수단이었다. 폭력에 절여진 뇌는 위험하다. 사람으로서 윤리가 어긋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빌어먹을 인소 세계.’
이제 와 느끼는 바도 웃기지만, 이 폭력으로 점철된 세계가 징그럽게 닿아 왔다. 너는 얼마나 이 세계에 익숙한 거니, 반휘혈. 그가 나를 생각해 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지만, 내가 할 말은 정해졌다.
미안하다. 휘혈아.
“…역시 난 널 말려야겠다.”
뚜둑, 그의 팔을 쥐지 않은 반대 손에서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서슬 퍼렇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