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04화 (204/306)

205. 응축된 분노 (4)

이 이상 그들에게 다가가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그 의도가 확실하게 전달이 되었을까. 반휘혈의 얼굴이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가 고개를 숙였다. 붙잡고 있는 그의 팔이 잘게 떨리는 게 전해졌다.

“어째서 말리는 건데.”

많은 감정이 함축된 듯한 목소리였다. 꽉 쥔 그의 주먹은 피가 안 통하는 것처럼 새하얘져 있었다. …어쩐지 방금과 다른 의미로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팍, 돌연 내 어깨가 붙잡혔다.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휘, 휘혈아…?”

마치 겨우 막아 놨던 둑이 터진 것처럼 그가 날카로이 소리쳤다. 당황스러움에 그의 팔을 쥐던 손에 힘이 저절로 빠졌다. 반휘혈은 그런 날 휙 노려보았다.

“누나 말대로 하지 말란 거 다 안 했어. 마음에 안 드는데도 다 들어줬잖아! 그런데 왜 화도 못 내게 해…!!”

아니, 그 화가 너무 과해서 그런 거….

“아…! 젠장!!”

“어, 어어?”

그의 요동치는 감정 변화를 쉬이 따라가질 못하고 어버버하고 있자, 반휘혈이 팍, 하고 내 손을 뿌리쳤다. 그러곤 날 똑바로 노려본 채 짓씹듯 말했다.

“나는 남보다 못해? 하물며 누나 욕한 저 새끼들보다 못하는 거냐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게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었는데! 억울한 마음에 나는 황급히 입을 벌렸다.

“아니, 됐어. 더 이상 듣기 싫어.”

“듣기 싫긴 뭐가 싫어! 들어!”

“시끄러. 더는 안 들을 거야.”

반휘혈은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며 귀를 막았다. 그 생각도 못 한 유치한 행동에 황당히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반휘혈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흥, 하고 새초롬하게 코웃음까지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야…!”

아니, 얘가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 아, 얘가 어린놈이 맞긴 한데! 크으읏. 나는 이도 저도 못 한 채 침음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곤 결심하며 다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휘혈아. 화 많이 난 거 충분히 이해하….”

“아쵸옷-!!!!!!”

“꺄악-!!!!”

“뭐, 뭐야?!”

쿠당탕탕탕-!!!! 그러나 내 말은 채 끝나기도 전에 중단되었다. 나는 난데없는 소란에 깜짝 놀라 혀를 깨물 뻔한 걸 겨우 가까스로 모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너냐-!!! 세상 하직하고 싶은 놈이-!!!!”

그리고 그곳엔… 웬 사과 머리를 한 작은 여자아이가 험악한 얼굴로 내 욕을 했던 여학생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아니, 저건 또 뭔데?!

갑작스러운 전개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망연하게 돌처럼 굳어 있는데 반휘혈이 몸을 돌렸다.

“아, 휘혈…!”

“부르지 마.”

“뭐?”

그의 말에 뻗은 손이 움찔 멈췄다. 반휘혈은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단호히 말했다.

“나 이제 누나 동생 안 할 거야.”

“…뭣.”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나는 망연히 입을 벌리며 우뚝 멈춰 섰다. 반휘혈은 그런 날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갔다. 그가 지나가는 길목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건 안중에 없었다. 그보단 방금 내가 들은 게… 뭐였지?

“자, 잠깐. 휘혈아! 기다려!”

번뜩, 뒤늦게 한도훈이 따라가며 붙잡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휘, 휘혈아…! 잠깐, 다시 얘기 좀…!!”

황급히 떠나가는 그를 불러 보았으나, …빌어먹을 긴 다리! 벌써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 버렸다. 뒤늦게 뻗은 손이 허망하게 내려갔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자꾸만 반복되는 그의 한 마디.

‘나 이제 누나 동생 안 할 거야.’

나 이제 누나 동생 안 할 거야. 안 할 거야. 안 할 거야….

털썩, 차가운 바닥에 허물없이 무릎이 꿇어졌다.

“누나…?!”

후다닥, 깜짝 놀란 이재현이 내게로 달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의 부축을 받을 새 없이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이 내려졌다.

“나, 방금… 절교당한 거?”

나 욕한 놈 좀 지켜 줬다고… 절교 선언 당한 거야, 지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자꾸만 입이 벌어졌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드디어 들어왔…! 뭐, 뭐야. 이거.”

“헤엑, 헤엑…. 어, 어…???”

그때 사람을 비집고 겨우 이혜인과 안경희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보이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너 이 새끼!!! 감히 그 쓸데없는 주둥아리를 놀렸겠다-!!!! 가만 안 둬!! 죽어어-!!!!”

“꺄아아!! 너, 너 뭐야-!!”

퍽, 퍽!

…그 와중에도 착실한 주먹질 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는 뭐가 그리도 화가 났는지 얼굴을 험상궂게 구기며 왁왁거렸다. 그런데 그 공격이 꽤나 매섭고 날카로웠다. 욕한 놈들은 피하려고 부단히 애썼지만, 다 맞고 있었다. 지켜보다 못해 주변의 친구들이 말려 보려 했음에도 여자아이는 아주 쉽게 뿌리치며 작정한 듯한 놈만 죽어라 패고 있었다.

“거기 학생!! 그만두세요-!!!”

뒤이어 경비가 도착했다. …도대체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야 등장하는… 아, 한도훈 탓인가. 나는 순식간에 답을 내렸다. 그러곤 다시 사라진 두 사람의 자취를 반사적으로 좇았다.

“큽…!”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서러움에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누, 누나??”

철푸덕, 바닥에 손을 짚으며 절망에 떨고 있자, 이재현이 안절부절못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멘탈이 탈탈 털려 버린 나는 좀체 그에게 위안을 줄 수가 없었다.

‘이게, 이게 뭐야아…!!!’

왜 상황이 이렇게 꼬이는 건데. 왜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건데에…!!!!

“뭐, 뭐야…?”

“연애… 싸움 맞, 맞나?”

“근데 동생 그만둔다고….”

“몰라…. 묻지 마….”

내가 절망에 빠진 사이에 점차 정신을 차린 듯한 이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구경꾼들은 수군수군 자신들이 본 게 무언지 좀체 가늠이 되질 않던지 목소리에 의문이 잔뜩 깔려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더더욱 설움이 몰려왔다. 그래도 겨우겨우 어른으로서 체면 때문에 파들파들 몸을 떨며 눈물을 참고 있는데, 돌연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아니, 시발. 이게 무슨 지랄 맞은 상황이야….”

고개를 드니, 그곳엔 음료수 캔을 든 채 잔뜩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서이수가 있었다.

“이수야!”

이재현은 그런 서이수를 보며 반가이 외쳤다. 서이수는 이 아수라장을 잔뜩 질린 얼굴로 보다 엎어진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누나는 왜 그러고 있어? 휘혈이는?”

“하, 하하….”

나도 몰라…. 서이수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허탈한 웃음만 흘리고 있자 서이수가 기묘한 걸 본 얼굴로 더더욱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휘혈이가 일 저지르고 있다고 해서 뛰어왔는데 이게 뭔 난리야? 그리고 저 여자앤 또 뭐고.”

“글쎄….”

이재현은 서이수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내게도 그의 시선이 향했지만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죽여 버릴 테다-!!!”

사과 머리를 한 여자아이는 마치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도끼눈을 뜨며 경비들이 사지를 붙잡아 말리는데도 한 대라도 더 때리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어, 어어…???”

그때, 숨을 고르던 안경희에게 작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차던 숨이 안정된 모양인지 안경희는 땀을 뻘뻘 흘린 채 안경을 추켜올렸다.

“저, 저 애는…?”

“음?”

“어, 경희야. 아는 애야?”

누가 봐도 무언가 짐작이 가는 투에 저절로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그것은 이혜인도 마찬가지였는지 내가 묻고픈 말을 안경희에게 질문했다.

“어, 어어…? 아, 아니이-?”

그런데 안경희의 반응이 이상했다. 안경희는 눈동자를 데록 굴리며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끝이 어색히 갈라진 목소리가 심히 수상쩍었다. 마치 무언가 알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여실히 보이는 반응이었다.

“뭐야, 수상하게? 근데 이나 너도 왜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 거고 반휘혈은 정말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리고 재현이 넌 400m 대표 아니었어? 왜 여기 있는 거야??”

이혜인은 좀체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얼굴 가득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정말 이해 안 가는 일투성이었다.

“아, 그건….”

이재현이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

그러나 말은 끝을 맺지 못하였다.

“찾-았-다아-.”

나긋한 목소리가 소란의 중심을 휘어잡듯 끼어들었다. 난데없는 인물의 출현에 우리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어?”

나 역시 그곳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사람은…?

덥수룩한 머리와 커다란 안경. 그리고 구부정한 자세를 한 청년. 아까 전 나와 부딪혔던 바로 그 남자였다.

***

“아, 휘혈아~!! 잠시만 기다려 봐-!!”

한도훈은 다급히 앞서가는 반휘혈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그거 진심 아니지? 그렇지? 누나랑 절교한다니. 그거 그냥 홧김에 하는 말이지??”

그는 실로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반휘혈이 이렇게까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분노를 내는 것도 모자라 그 서이나에게 절교 선언이라니!

평생 일어나질 않을 거라 여겼던 일이 눈앞에 닥치자 어떤 상황이든 침착함을 잃지 않는 한도훈이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대화에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게 아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져 남들은 뒷전이 되어 저도 모르게 드라마 보듯 관람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반휘혈이 답지 않게 유치하게 구는 진귀한 모습에 잠시 한눈이 팔렸더니…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그러지 말고 누나랑 대화를 다시 해 봐. 너도 무슨 사정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냐. 방금 그 여자들이 이상한 소릴 한 거지? 그래서 너도 화난 거고. 그 마음 알아. 아는데, 누나 알잖아. 누나는 널 생각해서 한 말….”

“한도훈.”

한도훈은 그 고저 없는 부름에 두서없이 서이나를 대신 항변하던 말을 멈추었다. 입을 다물고 그를 보자, 반휘혈은 한도훈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

“…뭐?”

한도훈이 멈칫, 서며 그를 보았다.

“잠깐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라면…. 그 뜻은….”

앞뒤 맥락 다 빠진 말이었지만 반휘혈의 말은 확실히 전해졌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아연히 중얼거렸으나, 반휘혈은 그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그는 싸늘히 눈을 굳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부턴 내 방식대로 갈 거야.”

그 다짐은 결연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 이상 앞도 뒤도 없는, 흉포함만이 가득했다.

이젠 뭐든 상관없다.

그놈의 동생으로 할 수 있는 게 그리도 제약이 걸린다면,

차라리 그 어떠한 형식으로든 그녀의 인생에 질척거려 주리라.

서늘히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 사이로 기이한 이채가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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