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우당탕탕 체육 대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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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저 남자애를 여기서 또 만날 줄이야. 설마 방금 마주쳤던 것도 마냥 우연은 아니었단 건가? 당장 보이는 외향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나 분위기가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좌중을 등장만으로 한순간에 잠재우지 않았는가. 그 때문인지 저 남자애의 정체가 굉장히 수상했다.
‘더벅머리…. 그리고 안경….’
이조차도 굉장히 익숙한 조합이었다. 나도 모르게 안경희를 힐끗 보았다. 처음 안경희와 만났을 때 그녀를 보며 여주가 아닌가 착각을 잠깐 했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착각일까? 전과가 있었던 만큼 더 신중한 눈길로 남자애를 보았다.
“사과야-. 어디 갔었어어. 한-참 찾았잖아~.”
슥-슥-. 슬리퍼를 신은 성의 없는 발길이 바닥을 끌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 자체도 느긋하기 짝이 없는 몸짓에 나도 모르게 손이 움찔거렸다.
‘뭐지, 이 답답함은…?’
느릿- 느릿-. 움직이는 세월이 하세월이었다. 성질머리가 급한 편인지라 모든 게 느리기 짝이 없는 남자애의 모습에 손이 막 근질거렸다. 하나 이런 내 기분을 모를 터인 남자는 하품을 크게 내뱉으며 주머니에 꽂았던 손을 슬쩍 꺼내 아직까지도 발버둥 치는 여자아이에게 손짓했다.
“사과야아-.”
“놔, 놓으란 말이야-!!! 나 아직 덜 때렸어어-!!!!”
“사과야아-.”
크아아악!! 여자아이가 발버둥을 치다가 포효했다. 번쩍! 힘차게 뻗은 팔에 경비들이 주춤했다. 그리고 살짝 헐거워진 틈을 타 여자아이가 한 번 더 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퍽-!!!
“?!”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 눈먼 팔의 희생양이 발생했다. 얼마나 강했는지 그 남자가 쓰고 있던 안경이 날아갔다. 나는 갑작스러운 광경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야아….”
그런데 남자는 심히 단조로운 비명만 내뱉을 뿐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슥슥 볼을 문질렀다. 그러다가 이내 손을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남자는 안경이 벗겨진 걸 그제야 눈치챘나 보다. 그는 의아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스르륵 한 손을 떨구며 다른 한 손으로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큰일이네에….”
…큰일? 대체 뭐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그의 덥수룩한 곱슬머리를 보고 있는데,
“어, 어어…?!”
누군가 남자를 척, 하고 가리키며 경악했다. 그리고….
“꺄아…!!!”
“세상에…!!!!”
연이어 몇몇 구경꾼들도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소란에 그쪽을 보자 그들은 믿기지 않는 듯한 시선으로 남자를 보고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동공이 떨리고 있는 게 여실히 보일 정도였다. 그들 중 한 명이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백설이 왜 여기 있어…?!?!?!”
그리고 그 파장은 엄청났다.
“백설?!”
“그 사대천왕?!?!”
“사대천왕이 왜 여기 있어-?!”
이제 좀 사그라드나 했던 웅성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 역시…. 심상치 않다 했더니 사대천왕이었냐….’
그리 놀랍지 않은 사실에 나는 떨떠름히 그 뒤통수를 보았다. 이 소란의 중심에 있는 남자, 백설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주섬주섬 바닥에 구르는 안경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척, 하고 쓰더니….
“으음-. 그게 누군데~? 모르는 사라암-.”
모르쇠를 시전했다.
‘퍽이나 믿겠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방금까지 반휘혈 일로 울적했던 기분을 잠시 잊을 정도로 황당한 그의 행동을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사대천왕?”
그때 우뚝, 하고 난동을 부리던 여자애의 행동이 멈췄다. 여자애는 인상을 살풋 찡그리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뭔 소림까? 우리 오빠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뎁쇼-?”
황당무계한 소릴 들었단 것처럼 여자애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사대천왕의 여동생이라… 그건가.’
이거 참, 어딘가에 있을 법한 여주 설정이구만. 행동이나 말투나 어디선가 본 듯한 그 사차원 설정이 내가 듣고픈 것만 듣는 마이웨이 타입인 듯싶었다.
“엥.”
“응???”
“뭐…, 오, 오빠…?? 아, 아니, 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누가 봐도 백설이구만… 대체 뭔 소리야…?”
그러나 이러한 설정을 모를 이들은 그저 여자애의 말이 어처구니없었나 보다. 백설의 얼굴을 목격한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어이없단 탄식을 내뱉었다.
“그 백설 아니라고요-. 그 백설은 진짜 사대천왕이고! 울 오빠는 그냥 좀 닮은 동명이인인 한량 찌질이일 뿐!”
“찌질이….”
그 가차 없는 단어 선택에 나도 모르게 되뇌어 버렸다. 모르는 건 그렇다 쳐도 저런 설정은 좀…. 아, 아니다. 행색을 보니 그리 틀린 말이 아닐지도. 어쩌면 집에선 여자애의 말대로 한량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게다가 저 징글징글하단 표정을 보아라. 아주 익숙해서 이골이 난 얼굴이었다.
“으음….”
그런데 백설…, 즉 현 사대천왕 중 한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 더벅머리 남자애는 자신의 머리를 성의 없이 긁적이더니,
“뭐어-. 그런 거지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애의 말에 동조를 해 줬다. 그 모습이 귀찮으니 그냥 대충 대답하자, 이렇게 보이는 건 마냥 기분 탓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분명…!!”
“잘못 본 거라니깝쇼? 생각해 보십쇼. 사대천왕이나 되는 사람이 길거리에서 삥 뜯기는 게 말이 됨까?”
뭣. 나는 그들을 구경하다 말고 자세를 삐끗했다. 귀를 의심케 하는 말에 저절로 덥수룩한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게 되었다.
“삥…?”
서이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에게도 혼란스러운 말이었나 보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새 나처럼 구경하던 동생들과 친구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황당한 얼굴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다들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그렇슴다! 제가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터지는뎁쇼-! 사대천왕이라면 그깟 양아치들은 한주먹도 아니지 않슴까?! 근데 왜 매번 지갑을 바치고 있냐고요-!!! 저 오빠 새끼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데…!! 저런 덩치만 쓸데없이 큰 약골이 사대천왕일 리 있다고 생각함까?!”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었다. 길에서 삥 뜯기는 사대천왕…. 잠시 상상해 봤으나, 도무지 매치가 되질 않았다. 내가 아는 사대천왕들…, 고찬영과 최강혁만 해도 절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걔네들한테 삥을 뜯는다? 그냥 죽고 싶은 거였다. 자살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지만, 곱게 죽기는 싫은 게 분명했다.
“어, 어???”
“그, 그럼 진짜 잘못 봤나…?”
“하지만 눈 밑에 점 두 개는 분명…?”
“야, 그래도 사대천왕이 삥을 뜯긴다는 건 좀….”
“말이 안 되지….”
게다가 진실성이 넘치는 그 호소 덕에 얼굴을 정면으로 본 아이들조차 혼란이 오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이들에게 여자애는 쐐기를 박아 넣었다.
“그리고 보십쇼-! 저 한심한 모습을!!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덥수룩한 곱슬머리. 구부정한 어깨와 허리. 후줄근하게 챙겨 입은 교복에 칠칠치 못한 슬리퍼까지…! 저게 정말 사대천왕이 맞는 것 같슴까-!!”
아니. …아차, 나도 모르게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다. 다른 학생들이 고개를 곧장 내젓는 모습이 너무 공감이 됐다. ‘어, 진짜 아닌가 봐.’, ‘자, 잘못 봤나?’ 아이들은 점점 눈앞에 남자가 백설이 아니다, 란 쪽으로 기울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거 참. 스스로의 눈조차 믿지 못하는 지록위마 같은 꼴에 나는 조용히 혀를 끌끌 찼다.
‘대단한 세계야. 정말….’
만약, 나도 이 세계에 대해서 잘 몰랐다면 같이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과 달리 눈앞에 있는 존재가 현 사대천왕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행색도 행색이지만, 다른 이유를 떠나서 저 독특한 조합의 남매가 어디 쉽게 볼 수 있는 일인가.
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저 마법의 봉인구인 안경으로 가려진 맨얼굴도 분명 엄청 잘생겼겠지. 눈앞에 나타난 미남을 믿지 못하다니. 저 미모가 어디 흔한 외모도 아닐 텐데. 그놈의 사대천왕이라는 타이틀이 가지는 모순 덕에 다 속기 시작했다. 삥 뜯긴 내막은 자세히 모르지만 그 이유도 그냥 별 볼 일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교복도 꽤 이름난 사립 고등학교 교복이었다. 그것은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학교를 다닌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두 사람은 부자일 게 뻔했다. 그러니 한두 푼 뺏기는 걸론 별 타격도 없어 보였다. 정작 당사자도 삥 뜯겼네 뭐네 저렇게 폭로 당하고 있음에도 별 타격도 없어 보이지 않은가. 보통 사람이었으면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할 텐데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나 홀로 사실을 간파했단 게 참으로 어이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세상인걸.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고….’
저 여자애 교복. 어딘가 익숙한데. 나는 고급스러운 자줏빛의 교복 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애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찾았다! 친구님!!”
그럴 때, 익숙한 음성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인파 너머에 고찬영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덩치도 키도 커서인지 참 잘 보여 나는 그쪽에 손을 흔들어 줬다.
“…어?”
불현듯 여자애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그쪽을 향하자 여자애는 나를 보고 있었다.
‘오, 역시 사대천왕 동생이라 그런지 예쁘네.’
우악스러운 모습만 보다가 멀쩡한 얼굴을 보니 여자애는 꽤나 미인이었다. 하지만 앳된 구석이 강한 게 나이가 꽤 어려 보였다. 아마도… 중학생 정도?
“정-말! 내 경기 안 보고 어디 갔던 거야?”
하나 내 시선은 그녀에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고찬영이 툴툴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지나가는 길목이 또 홍해처럼 갈라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지나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방금 떠나 버렸던 반휘혈의 모습이 생각나 버렸다. 순식간에 기분이 저조해진 나는 입매를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음? 친구님 왜 그러고 앉아 있어?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고찬영이 내 옆으로 풀썩 주저앉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다 내 얼굴을 본 그는 투덜거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아파?”
“…아니.”
몸은 안 아프고 마음이 아프다. 친구야. 나는 씁쓸히 눈을 흐리며 허탈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이제 반휘혈은 나를 보면 무시하는 걸까. 완전히 남이 된 건가. 오만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반휘혈은 정말 마음만 먹으면 그럴 것 같아 더 슬펐다.
“무슨 일이야, 진….”
“끼아아아아악-?!?!?!”
“?!”
고찬영이 내 안부를 다시 되묻던 찰나, 돌연 거센 비명이 울렸다. 방심하다가 들려온 고성에 깜짝 놀란 나와 고찬영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다, 다, 다, 다, 당, 신은…?!?!??!”
덜덜덜, 나를 가리키는 여자애의 손가락 끝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신이 진동 모드가 된 것처렴 요란하게 흔들렸다. 급변한 그녀의 자세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여자애의 손끝을 따라 백설이 나를 보았다. 여전히 커다란 안경이 눈에 띄는 남자였다. 안경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남자의 시선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저 안에 대체 무슨 얼굴이 있나 순간 호기심이 들었다.
“음? 잠깐. 저 녀석은….”
그런데 고찬영이 무언가 석연찮은 기색으로 불쑥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더 깊이 들여다본다 싶을 때, 돌연 백설이 짝, 하고 박수를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 생각났다-.”
그러곤 슥슥 발을 끌며 다가와 내 앞으로 쭈그려 앉더니, 불쑥 얼굴을 드밀었다.
“네가 그 1등이구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