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우당탕탕 체육 대회 (3)
나는 전신에 확 돋은 소름을 북북 쓸었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저딴 구린 결투 신청이라니?! 아무리 인소 세계라도 너무하네, 이거!
“승부….”
하아-. 백설이 귀찮은 걸 만났다는 것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지금 사대천왕한테 결투장 내민 거야?”
“미친. 쟤 누구야?”
“어? 쟤 북상고등학교 진철수잖아!”
“아?”
“진철수?”
그런데 남자의 정체까지 나오기 시작하자 주변이 다시 술렁였다. 하지만 그중엔 예외도 있었다.
“…걔가 누군데.”
그건 바로 나였다.
“글쎄?”
그리고 고찬영도 포함이었다.
“사실 저도 잘….”
“그게 누구죠?”
게다가 이재현과 다정한도 합세했다. 음. 모르는 애들이 많은 걸 보면 저 녀석은 별로 중요치 않은 엑스트라가 분명했다.
“어? 어어…. 쟨 북상고등학교 2학년인데…. 거기 일짱이구, 나름대로 그 지역에서 이름난 애구….”
“경희야, 설명은 괜찮아.”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그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는지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나는 이 결투의 승부를 이미 예측하긴 했으나 이 순간 제대로 확신했고 말이다. 하나 이 소리를 듣지 못한 진철수인가 뭔가는 히죽거리며 백설에게 얼굴을 드밀었다.
“왜, 맞을까 봐 두렵냐? 그럼 항복이라도 하지?”
킥킥거리는 낮잡는 어투였으나 백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멱살이 잡힌 채 꼼짝도 않는 그를 본 학생들의 반응은 달랐다.
“뭐야, 저게 진짜 백설이야…?”
“고찬영이 그렇다고 하지 않았어?”
“이길…, 이길 수 있나…?”
“왠지 질 거 같아….”
“체격 차도 너무 심하지 않아?”
“근데 진짜 강한 건 맞긴 해??”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
그들은 백설의 모습과 태도 때문인지 우세가 양아치 놈으로 기울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만큼 백설의 태도에선 일말의 의욕이 보이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렇게 가다간 어이없이 사대천왕의 타이틀이 바뀔지도 모르는 기상천외한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뭐가 됐든 남의 학교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건 좀.’
경비는 대체 뭐 하는가. 돈으로 고용된 몸들은 어서 출동하지 않고 뭐 하나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무전기를 쥐며 두 사람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계속 소통을 원활히 주고받는 걸 보니 무언가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한도훈의 지시겠지. 대충 재밌는 일이니만큼 하나의 유흥거리로 소비하라 이런 거 아닐까 예상해 본다. 그의 입장에선 이런 건 큰일도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상식적인 생각 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같이 이 상황을 즐기기로 마음먹은 난 자연스럽게 서이수가 들고 있는 캔을 뺏어 갔다. 서이수가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난 무시하며 상쾌한 음료로 여러모로 쓰린 속을 달랬다.
“하아….”
그런데 백설이 나직하게 한숨을 터트렸다. 그는 아주 귀찮은 걸 마주한 것처럼 머리를 긁적이더니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그러면 참 좋겠는데에-.”
“뭐?”
그의 말에 양아치 놈이 반문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백설은 멱살이 잡힌 손을 가벼이 풀어 냈다. 아차 한 순간에 일어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어느새 풀려서 놀랐는지 양아치 놈이 제 손과 백설을 번갈아 보았다.
“하아….”
백설이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세차게 헝클이며 지면을 발로 툭툭 찼다.
“내가 너 같은 녀석한테 졌다는 말이 퍼지면… 곤란해지거드은.”
…곤란하다고? 아까부터 되게 의뭉스러운 소리만 하는 백설의 태도가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물론 곤란하기야 하겠지. 웬 시정잡배한테 졌다는 게 퍼지기라도 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아 백설은 그런 것에 괘념치 않아 하는 놈일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 개새끼가-!!! 누굴 얕보는 거야?!”
훙-! 양아치가 팔을 휘둘렀다. 덩치에 걸맞게 위협적인 소리였다. 동시에 군중 곳곳에서 숨소리를 들이켜거나 작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 공격에 백설이 당했을 거라 생각한 게 분명했다.
“정말 곤란해….”
“?!”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백설은 머리를 헝클이며 어느샌가 숙인 허리를 느릿하게 폈다. 아무 상처 없이 멀쩡한 모습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3초?”
하나 그중엔 역시 예외가 있는 법. 고찬영이 턱을 쓸며 의미 모를 말을 툭, 내뱉었다. 그리고 동시에 양아치가 얼굴을 붉히며 공격을 내질러 내 시선은 다시 그쪽으로 향했다.
“이, 쥐새끼가…!!”
힘줄이 잔뜩 도드라진 팔이 가히 위협적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피하기 쉽지 않은 공격이었다.
빠악-!!
“크…헉…!!”
그러나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백설이 아니었다.
“안 그러면-.”
백설은 어느샌가 남자의 몸 깊숙이 파고들어 그 복부에 정확한 일격을 날린 뒤였다. 그리고 그는 슥, 뒤로 몸을 물리며 어깨를 늘인 채 한탄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태우한테 혼난단 말이야아….”
쿠웅.
육중한 몸이 땅 위로 쓰러졌다. 관중은 한순간에 펼쳐진 그의 무위에 경악을 금치 못한 정적이 사위를 감쌌다.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건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이 순간 그가 그 사대천왕임을 부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백설은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성의 없는 손길로 머리를 헝클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1초 남짓한 카리스마는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건가. 구부정히 서 있는 저놈이 방금 그놈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얼떨떨히 백설을 바라보다가 고찬영을 보았다. 원래 저런 놈이 맞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고찬영은 내 시선을 의식하고 나와 눈을 맞추더니 싱긋, 웃었다.
“맞지? 3초.”
“엉?”
“쓰러트리는 거. 3초 맞았지? 그치?”
잘했지? 잘했지? 나 굉장하지? 하고 무언의 압박이 다가왔다. 나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이럴 땐 얘도 영락없는 애였다. 난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젓고 있는데 문득 옆에 있던 다정한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태우? 그 정태우?”
음? 나는 그 말에 다정한을 보았다.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입을 가린 채 백설을 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지.’
방금 백설이 양아치를 쓰러트리면서 중얼거린 말이 있었다. 태우. 그 정체는 분명 정태우일 터였다. 설마 여기서 진짜 동명이인이 등장하진 않겠지…. 무엇보다 백설이 혼나기 싫다고 했던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원….
그건 그렇고 이 학교에 별별 놈들이 다 모이긴 했구나. 우선 이 학교 애들을 비롯해서 이렇게 또 다른 사대천왕인 백설. 그리고 이름 모를 양아치 놈들까지. 아마 훨씬 더 많겠지. 이번 양아치는 백설의 외향을 보고 방심해서 접근했다가 시비를 건 것일 터였다. 바로 옆에 고찬영이 있음에도 딱 백설만 지목한 것을 보아라. 뻔하지 않은가.
아무튼 이렇게 별별 놈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참 신기하긴 했다. 이게 바로 인소 세계의 힘…? 거참. 떠들썩하기도 해라. 평범한 나로선 조용히 있고 싶다만 이젠 거의 포기 상태였다. 알아서 수군거리라지. 난 그냥 뻔뻔하게 살기로 했다. 모든 건 한도훈에게 맡기면 될 거다. 듬직한 빽을 생각하며 나는 가벼이 말을 툭 던졌다.
“이 기회에 정태우나 그… 김율? 맞나? 아무튼 걔까지 모이면 진짜 완성체겠네.”
겸사겸사 그 면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확인하고 말이다. 사실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뭐?”
“흐익.”
그런데 두 사람의 반응이 이상했다. 고찬영은 마치 들어선 안 될 걸 들었다는 것처럼 굳어 버렸고, 백설은 안경으로 얼굴이 반쯤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낯이 대번에 구겨져 있었다. 그리고 백설은 성큼 내게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척 붙잡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야아…!!”
그 말을 하는 안경 너머의 눈이 과하게 진지함을 띠었다. 게다가 몽글몽글 식은땀까지 흘리는 게 그 감정이 심히 불안해 보였다. …아니, 얘 지금 손까지 떠는 거야?
“빨리 취소해. 어서…! 어서!”
“으, 어, 어. 취, 취, 소, 할, 게.”
백설이 급박하게 내 어깨를 짤짤짤 흔들었다. 그의 얼굴이 심히 좋질 않아 나는 얼결에 그 말을 들어줬다. 그러자 백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어깨를 쓱 늘어트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불길한 건 다신 말하면 안 돼애-.”
“…….”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벙찌며 바라보았다. 마치 정태우가 그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 같지 않은가.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길래 이 뻔뻔해 보이는 녀석이 이렇게 나오는 건가.
“아-. 나도 그건 동감.”
게다가 고찬영마저 쓴웃음을 흘리며 나를 외면했다. 이 순간 나는 정태우는 이들 사이에 누가 봐도 달갑지 않은 존재임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마이웨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녀석들이 이렇게 반응하니 없던 호기심마저 일었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다른 애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문을 던졌다.
“왜? 왜? 찬영아, 뭔데? 무슨 일이 있었는데??”
“뭔데 그래??”
“저도 궁금해요.”
고찬영은 그 관심에 슬쩍 뒷목을 문지르며 난처히 웃었다. 그러곤 끄응, 하고 난처한 신음을 흘리더니 홱, 하고 몸을 돌렸다.
“아-차. 곧 줄다리기 시작하는데!”
“어?!”
“하하, 빨리 가자, 가자. 늦으면 애들한테 한 소리 들을라.”
그러곤 척척 빠르게 멀어지려던 찰나.
“괜찮아요. 어차피 시원이랑 강이가 잘해 줄 거예요.”
“엇?!”
텁, 하고 이재현이 그 팔을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이재현의 돌발 행동에 놀랐는지 고찬영이 당황해하자 서이수도 씩 웃으며 합세했다.
“공평하고 좋네. 한도훈이 그렇게 말한 공.평. 하다는 취지에도 걸맞고.”
“아니, 그래도… 아! 친구님. 친구님 완벽하게 1등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고찬영이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베일에 싸인 사대천왕들의 썰이냐, 체육 대회 1등이냐….
나는 양쪽을 저울질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2학년들 빼고 전부 출전하도록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