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우당탕탕 체육 대회 (4)
내 결정에 고찬영뿐 아니라 이재현과 서이수까지 울상을 짓거나 화를 내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한 원망의 시선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능청스레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아니, 그도 그럴 게 두 사대천왕을 기피하게 만드는 서열 1위의 이야기이다. 호기심이 안 들면 이상한 거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1등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나는 이왕 우승하는 거 완벽한 우승을 바란다. 첫 경기였던 50m는 둘 다 졌지만 400m는 우선 내가 이겼고 남자는…
“아, 근데 400m 결과는?!”
아니, 이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니! 황급히 묻자 고찬영이 잠깐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이내 씩 웃었다.
“보면 모르겠어, 친구님?”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그 당당한 결과를 알려 줬다.
“잠깐, 그런데 너 왜 이렇게 멀쩡해??”
그런데 지나치게 몰골이 멀쩡해서 오히려 수상했다. 나는 방금 죽을 뻔했는데!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를 보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야 난 단, 한 번도 안 걸렸으니까?”
“…….”
겁나 부러워! 이 자식, 운 엄청 좋네…!!! 내가 아까 받았던 고통은 대체 무엇인가, 급격히 회의감이 들었으나 문득 마지막에 고찬영이 고르라고 외쳤던 세 번째의 푸딩이 떠올랐다. …이 녀석은 감도 좋고, 운도 지나치게 좋았다.
‘…진짜 여자 보는 눈만 좋으면 최고겠네.’
다 가진 인간. 고찬영. 그에게 있어 유일한 결점은 연애 운일 게 분명했다.
“근데 재현이는 진짜 왜 참가 안 했어?”
이야기를 듣던 이혜인이 질문했다. 그러나 대답은 이재현이 아닌 서이수에게서 나왔다.
“반 애들이 얘는 지켜야 된다고 하면서 뜯어말렸거든요.”
“하하….”
서이수가 짓궂게 웃으며 대답하자 이재현이 머쓱하게 볼을 쓸었다. 그는 그 사실이 좀 민망했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1학년 5반의 아이들에게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재현이 소중하지. 사람 볼 줄 아는 애들이구만. 흐뭇함에 웃고 있자,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으음…. 저도 이만 가야겠네요. 선배들이 빠진다고 해도 저희 팀이 힘이 부치는 건 똑같고, 저까지 빠지면 정말 큰일일 테니까요.”
“음? 최강혁, 걔 출전 안 해?”
“혁이야, 뭐…. 학교 활동에 참여 안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요. 그래도 출석을 한 게 어딘가 싶긴 해요.”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다정한이 발을 뺐다. 최강혁 걔는 참여도 잘 안 할 거면서 체육 대회는 뭐 하러 온 건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의 등 뒤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아, 배는 괜찮아?”
그러고 보니 다정한이 제 몸을 희생하며 반휘혈을 막았었지, 참. …내 잘못은 아니다만, 괜히 엮이게 만들어 미안한 짓을 해 버렸다.
“네? 아아. 네. 괜찮아요.”
다정한은 내 물음에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아픈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가 더 미안하게 만드는 걸 아는 걸까. 나는 품을 뒤적여 사탕 하나를 꺼냈다.
“지금 내가 딱히 줄 건 없고, 이거라도 받아….”
손버릇 고약한 의동생…이었던 놈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다정한은 내 사과의 사탕을 얼떨떨히 받아들였다. 나는 그런 녀석을 위로하듯 잠깐 팔을 두드리다가 또 한 가지 떠오른 일을 입에 담았다.
“아, 맞아. 그리고 최강혁 만나면 안부 좀 물어 줘.”
“? …아. 후훗. 알았어요.”
내 말의 의중을 오래지 않고 알아차린 다정한이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재밌다는 걸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이 손을 흔들며 떠났다. 거참. 뉘 집 자식인지 참 의젓하네. 여자애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알겠는걸. 나는 그 곧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크게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자, 그으럼-.”
척, 나는 존재감을 지우며 조용히 발을 물리던 백설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 흥미로운 얘기 좀 더 들어 보실까?”
***
최종적으론 남게 된 건 나, 고찬영, 백설, 안경희였다. 이혜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경기에 출전하기로 했다. 서이수와 이재현은 우는소리를 했으나, 내가 내쫓았다. 어쩐지 이혜인만 반대로 눈을 반짝이며 의욕에 불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응원해 주며 장소를 조용한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잔뜩 귀찮아하는 백설을 붙잡아 겨우 듣게 된 사정은 이러했다.
백설은 원래부터 이렇게 꽁꽁 싸매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타고나길 잘난 인간이었고, 주위로부터 선망과 관심을 받는 게 아-주 익숙한 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큰 이변이 닥쳤다.
그것은 바로 정태우와의 만남이었다.
“폭풍 같았지이….”
그렇다. 그 만남은 폭풍과도 같았다.
‘오, 니가 그 백설이가? 니 꽤 이쪽으로 유-명하데?’
정태우는 백설과 만나자마자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난 그때 걔 첨 봤구우…. 또 첨 들었구우….”
백설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별 볼 일 없는 시비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정태우란 존재 자체가 그 당시엔 유명하지도… 아니, 정확히는 어디서 튀어나온지도 모를 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백설은 정태우 또한 여느 놈과 다를 바 없이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죽기 직전까지 맞는 건 생전 처음이었어….”
백설은 그날을 서글피 떠올리며 말했다.
“온몸엔 붕대를 칭칭…. 깁스도 처음 해 보고….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병원 신세였어….”
게다가 어느샌가부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니 응급실이었다고 한다. 입원은 한 달. 전치는 총 세 달.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백설은 그 만남을 끝으로 더는 안 마주칠 거라 여겼지만 그 예상은 제대로 빗나갔다.
“안 끝나아아…. 계속 찾아와아아….”
그 이유는 단지 심심하다. 그뿐이었다. 상대할 만한 놈이 없어 심심하단 이유로 찾아오는 그 행태에 백설은 기가 단숨에 죽어 버렸다. 그리고 그 횟수가 다섯 번이 넘어가자 수세에 몰린 그는 한동안 집안에서 두문불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들의 걱정에 결국 밖을 나서기로 결정하고, 고민 끝에 나름대로의 방책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모습?”
“응.”
그렇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로 한 것이다. 그만큼 그는 절박했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였어?”
잠자코 이야기를 같이 듣던 고찬영이 불쑥 중얼거렸다.
“넌 반응이 왜 그래? 정태우에 대해 잘 아는 거 아니었어?”
“음? 아니? 난 그냥 세 번 정도 만난 게 다인데? 그리고 매번 싸우고 깨지고만 반복했지. 아, 나도 병원 신세였긴 하지만.”
고찬영은 그때를 생각했는지 으, 하고 몸서리를 쳤다.
“너어는 몰라아. 넌 우리보다 한 살 어리잖아아…. 태우, 걘 중학생 이하는 안 건드린단 말이야아….”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 백설은 현재의 나보다 한 살이 더 많다는 거였다. 그리고 정태우, 김율 또한 그와 동갑이었고 말이다.
“게다가 넌 자발적이었잖아아….”
“그건 그래.”
그런데 반전으로 고찬영은 스스로 정태우를 찾아가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물론 처음만 빼고 말이다.
‘음…? 이상한데??’
그럼 왜 지금은 최강혁한테 리벤지 안 하는 거지? 저 녀석이 한때 싸움을 좋아했던 것쯤이야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또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자니 고찬영은 지는 걸 보통 싫어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또 정태우의 손속은 꽤나 험한 축에 속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찾아가 재도전을 하다니. 지금과 영 딴판이 아닌가.
“왜, 사대천왕 그만뒀어어…. 나 그래도 네 덕분에 숨 좀 트이는가 싶었더니…. 이젠 정말 졸업까지 조용히 보내고 싶었단 말이야아-.”
“하하. 운이 좋았지?”
“그 운, 나한테도 주란 말이야아….”
영문 모를 일에 나는 고찬영을 보았으나, 그는 백설의 칭얼거림을 받느라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네가 사대천왕 내려가고 걔가 다시 나 찾아오는데 진짜 공포였다구우….”
“근데 정태우, 그 녀석은 왜 자꾸 널 찾아와?”
“모올라아…. 그냥 나랑 싸우는 게 재밌대애….”
내 질문에 백설이 울상을 지으며 우울하게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정태우는 백설의 변장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지척을 지나갈 땐 정말 숨도 못 쉬고 긴장했으나,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백설은 그때 환호성을 내지를 뻔한 걸 겨우 막았다고 한다.
“근데 평소에도 그러고 다니는 것 같은데… 불편하지 않아? 사람들도 널 무시할 텐데. 정태우가 찾아오지 않을 땐 안 하고 다녀도 되지 않나? 물론 오늘 같은 날은 마주칠 수야… 아니,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아무튼 굳이 그렇게 다니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그래도 고찬영은 여전히 그렇게까지 싸고 다니는 백설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의아하니 묻자 백설은 되레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이-? 되게 편해애-.”
…웃기게도 그는 그 히키코모리 모드에 완벽히 적응을 해 버렸다고 한다. 이제껏 관심만 받고 살았을 땐 몰랐으나,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데다가 아무도 제게 조그마한 관심도 내비치지 않으니…. 아주 좋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는 타고난 내향인이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최강혁은 조용하지? 그렇게 싸움을 좋아하는 놈이면 최강혁한테도 찾아와야 되지 않아? 하다못해 휘혈이라도.”
듣다 보니 나도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조용히 말하자 백설이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으야… 두 사람은 집안이… 집안이잖아…? 괜히 꼬이면 골치 아프구우….”
아, 그런 거구나. 설마 이런 서열 싸움에도 기업과 연결될 줄이야. 나는 눈을 흐리며 새로운 정보를 조용히 머릿속에 입력했다.
“근데 네가 항복하면 되잖아. 그럼 정태우는 너 말고 다른 놈을 상대할 거 아냐?”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측은한 마음에 의견을 제시했다. 하나 백설은 그 말을 듣고는 낯이 창백히 질렸다.
“역시 네 운 좀 나 주라아….”
“싫-어.”
백설이 다시 고찬영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고찬영이 빙긋 웃으며 매정히 밀어냈다. 백설은 힘없이 밀려나며 어깨를 불쌍히 늘어트렸다.
“그걸 내가 안 해 봤을 리가 없잖아….”
이어진 설명은 이러했다. 백설은 내가 제안한 방법을 사용해 본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며칠 후, 그에게 닥쳐온 현실은 지나치게 혹독했다.
“그렇게 화난 태우는 처음이었어….”
정태우는 약한 자를 싫어한다. 그것도 몸풀기거리도 되지 않은 상대를 이겼다는 사실에 격노한 정태우는 그 화풀이를 백설에게 돌렸다고 한다. 게다가 이번에 그를 괴롭게 만든 건 정태우뿐이 아니었다.
‘실망입니다. 백설.’
그것은 바로 이제껏 나서지 않던 김율이었다. 그는 무기질과 같은 차가운 눈동자로 백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도련님과 같은 호칭을 주고받았으면 그에 맞게 걸맞은 자로 위임을 했어야지요. 그 이름을 더럽히지 마시길.’
“…도련님?”
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불쑥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공기처럼 조용히 있던 안경희가 재빨리 내게 속삭였다.
“두, 둘이 주종 관계 같은 거야…! 정태우가 흑룡파의 후계자인데, 김율은 그 심복이야.”
뭣. 흑룡파. 단어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설마 여기서 조폭이 등장한다고? 게다가 그 정태우와 김율이 조폭이라니…! 그것도 주종?! 난데없는 어둠의 조직의 등장에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래서 더더욱 조용히 있기로 했지이….”
그 이후로 정태우가 올 때만 했던 변장이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젠 이 모습이 아니면 불안할 정도라고까지 하는 그의 말로 보아 트라우마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하자 백설이 이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다. 이 세계의 피해자를 본 기분에 동정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고찬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동생한테까지 숨기는 거야?”
“어, 맞아.”
그게 있었지, 참. 나도 떠오른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설이 울상을 확 지으며 씁쓸히 중얼거렸다.
“걔애는… 하아….”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에서 깊은 피로가 느껴졌다. 그는 잠시 얼굴을 북북 쓸다가 다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태우 팬이었거드은….”
“???????”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어, 잠깐. 그러니까 그 여자애가 정태우의… 팬?
“걔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어… 강한 사람만 보면 환장을 해….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태우의 팬이었구우….”
“그게 네가 정체를 가리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그야아….”
고찬영의 시큰둥한 간섭에도 불구하고 백설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내가 사대천왕인 걸 알며언… 걔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아…. 실제로 나보고 그 사대천왕이었냐고 닦달하면서 정태우 소개해 달라고 난리였단 말이야아….”
“…….”
“…….”
“…….”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뭐라 말할 수 없어 눈만 굴렸다.
‘진짜… 불쌍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내린 그에 대한 감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