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09화 (209/306)

210. 우당탕탕 체육 대회 (5)

뭐, 아무튼 이로써 알게 된 정태우에 대한 정보는 이러했다.

고등학교 때 혜성같이 나타난 불세출의 천재 싸움꾼. 약자와의 싸움을 질색하고 강자와의 싸움을 좋아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룰인지 몰라도 중학생 이하는 건드리지 않는다.

‘우와…. 진짜 엮이기 싫다.’

나는 낯을 흐리며 질색했다. 어쩜 이렇게 단순하고도 폭력적인 놈이 다 있나. 그나마 어린놈들은 건드리지 않는 걸 보면 나름의 선은 있는 것 같지만, 그를 상대해 본 이들이 치를 떨며 싫어하는 걸 보면 상대하기엔 정상적일지가 않았다. 어쩌면 상식적인 방식으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뭐…. 편견이라고 볼 수 있지만 조폭 집안에 뭔가를 기대하는 것도 우스우려나. 내가 전에 살았던 세계도 조폭이란 이미지가 안 좋은 건 마찬가지긴 하다만. …설마 그 유명한 조폭 후계자 설정이라니. 그것도 같은 사대천왕인 김율을 심복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정보를 머릿속으로 재차 나열하며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도 엮이지 말자.’

역시 이게 최고인 것 같았다. 다행히 학교가 조용한 걸 보면 정태우는 우리 학교에 오지 않은 듯싶었다. 방금까지 잔재했던, 한 번은 보고 싶다는 호기심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엑스트라라 참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한시름을 놓으며 이마를 쓸다가 문득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문 하나가 남아 있음을 떠올렸다.

“그래서 너랑 동생은 우리 학교에 왜 온 건데? 아까 동생 때문에 왔다고 했는데 동생이 좋아하는 건 정태우라며. 그럼 딱히 올 이유는 없지 않아?”

굳이 이렇게 이목이 모이는 자리에 와서 모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방금도 다 들킨 것 같지만 백설의 태도가 대수롭지 않은 걸 보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아니, 솔직히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현재 그의 모습은 길거리에 널려 있는 남자4는 될 정도로 흔해 빠졌기에 그 백설이라고 알아보기 힘들지도 몰랐다. 대화를 할 땐 그의 태도나 타고난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묘하게 인상적이긴 하나, 그냥 가만히 서 있을 때는 존재감 자체는 너무 흐렸다. 아직 이 녀석의 맨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래서 정태우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게 아닐까. 물론 고찬영처럼 짐승같이 감 좋은 놈은 예외였다.

그런데 내 질문에 백설이 나를 빤히 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은데 그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후훗, 실은 말이야아-. 바뀌었거드-은.”

“어?”

“사과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었다구-.”

그는 기분이 좋은지 입가를 한 손으로 가리며 웃었다. 아니, 잠깐. 잠깐만.

“…사과? 이름이 백사과야…?”

“응.”

그럼 백설, 백사과…. 오, 갑자기 고찬영이 공주님이라고 부른 이유가 확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훅 치고 들어온 남매의 이름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전까지만 해도 쉬이 유추할 수 있는 이름이긴 하나, 대체 부모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름을 지어 줬나 의심하게 만드는 네이밍 센스였다.

“어, 그, 그렇구나…. 어, 음…. 우, 우리 학교에 유명한 애들 많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 강한 게 좋다고 했지? 그럼 최강혁인가? 아, 아니면 얘???”

덧붙일 말을 잃어버린 나는 휙, 하고 고찬영을 가리키며 나름대로의 추측을 꺼내며 화제를 다시 바꾸었다. 아까 여자애, 백사과가 쏜살같이 사라지기 전, 왠지 나를 본 기분이 들긴 했으나 어쩌면 내가 아닌 곁에 함께 있던 고찬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여러모로 일이 꼬여 나도 정신이 없어 착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역시 좋아한다면 고찬영 때문이겠지? 비록 전 사대천왕이긴 해도 이 녀석은 여전히 꽤 강한 데다가 남녀 불문하고 인기가 좋을 정도로 잘생기고 성격도 좋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꽤나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으음? 나?”

그런데 고찬영은 생각도 못 한 말을 들은 것처럼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너 보고 있지 않았어?”

“으음?? 그거 친구님 아니었어???”

“엥?”

그의 말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나? 왜 나를 봐…?”

대체 무슨 볼일이 있다고? 설마 내 팬일 리는 없을 텐데. 나는 딱히 드러난 편도 아닌 데다가 이제껏 인기 있어 본 적도 없어서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렇다고 고찬영이 자기가 아니고 나를 봤다고 하는데 무시할 수도 없고. 갑자기 난해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경희야, 넌 어떻게 생각… 경희야?”

도무지 알 수 없는 백사과라는 아이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 생각 없이 안경희에게 질문했다.

“으, 어, 어……?!”

그런데 돌아본 안경희의 안색이 이상했다. 땀구멍이 열렸는지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동공이 세차게 떨리는 게 아무리 봐도 수상한 모습이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여자애 보고도 뭔가 이상했던 것 같은데.

‘혹시 아는 사람인가?’

안경희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것도 아니면 무언가 짚이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후훗.”

그때 백설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하자 백설이 짓궂은 미소를 달며 히죽거렸다.

“그건 말이지이-.”

“드디어-!! 찾았다아아…!!!”

그가 입을 느릿하게 열 때, 커다란 외침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이야기의 주제였던 여자애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서 있었다.

“오-, 안 헤매고 잘 찾았네에-.”

백설이 그녀를 보며 인사했다. 동생인 백사과는 얼굴을 팍, 찡그리며 백설에게 항의했다.

“알려 줄 거면 제대로 알려 줘야지! 빈 교실이라고 알려 주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두 찾았잖아~.”

백설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백사과의 눈동자에 욕이 한가득 담겼다. 저걸 죽여, 살려, 라는 의미를 꾹꾹 눌러 담은 그녀의 눈이 살벌히 올라가다 돌연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여자애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 백사과는 흡, 하고 숨이 들이켜더니 삐걱삐걱 어색한 움직임으로 내게 다가왔…, 어?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팔다리가 같이 움직이는 그 로봇같이 어색한 움직임의 종점은 아무리 봐도 나였다. 백사과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허리를 휙, 하고 숙이며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저, 저기! 이거…!!”

“어…?”

눈앞에 드리워진 건 싱그러운 꽃다발이었다. 보이지 않던 게 이상할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이었다. 하지만 이 갑작스러운 선물에 당황해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 이게 뭐지? 얜 왜 나한테 이런 걸…?

“오, 오늘 경기 정말, 정말 머, 머, 멋있, 멋있었슴다-!! 그, 그래서 주는 검다! 받아 주십쇼-!!!”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소리쳤다. 그녀의 붉은 머리와 같을 정도로 빨개지는 얼굴에 나도 같이 전염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것을 얼떨떨히 보다가 나도 모르게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녀는 환해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 반짝이는 눈망울이 당황스러워 혼자서 땀을 삐질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흥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그런 거구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고찬영이 이쪽을 보며 재밌다는 듯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던 백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백설은 오히려 감격에 젖은 것처럼 혼자 조용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 잠깐. …설마?’

설마, 얘가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람이… 나? 진짜 나였던 거야?!

예상치 못한 정체가 드러나자 충격으로 굳어졌다.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다가 황급히 안경희를 보았다. 안경희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단 것처럼 나와 시선을 못 마주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안경희는 이미 이 여자애의 정체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 좋아하는 인물이 누군지 전부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거야?!’

상상도 못 했던 팬의 등장에 나는 심히 당혹스러웠다. 아니, 안경희가 팬이라고 해 준 것도 믿기 힘든데 여기서 더 추가되다니.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 그, 제가 딱히 선배님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건 아니구요…! 오늘! 오늘 경기가 너어-무 멋져서! 멋져서 드리는 검다! 아주아주 멋진 외침이었슴다…!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이제부터 이건 제 인생 모토로 삼겠슴다! 선배님…!!!”

그런데 얜 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람. 나는 횡설수설을 하고 있는 눈앞의 여자애에게 어떤 반응을 해 줘야 될지 몰라 눈동자를 방황하고 있는데 백설이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백사과에게 다가갔다.

“사과야-. 축하해애-. 드디어 네가 동경하던 그 조…커헙…!”

“그 쓸데없는 입을 놀리지 말라!!!!”

훌륭한 니킥이 백설의 복부 중앙에 정확히 작렬했다. 백설은 배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백사과는 후- 하고 숨을 가다듬다 아차, 하며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했다.

“이, 이런 누추한 모습을 보였슴다! 저, 저는 그냥 오늘 선배님이 너무 멋져서 그런 검다! 진짜, 진짜임다…! 저어엉말, 예전부터 동경하거나 그러지 않았다구요~? 선배님이 너무너무 멋져서 무에타이를 배우거나 그러지 않았슴다~? 정말, 정말임다!!”

백사과의 얼굴이 잔뜩 빨개졌다. 하지만 그 눈이 나를 비출 때마다 빛나는 게 꽤나 오래전부터 사모하던 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아니, 어떻게 들어도 저건 오래전부터 날 동경했다, 이거잖아? 그리고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이 여자애는 내 정체를 까발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힐끗 안경희를 보았으나, 안경희는 내 쪽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

이걸 어쩌지.

이런 고백은 안경희를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생각도 못 한 고백을 들어 버린 나는 어색하게 눈을 데록 굴리다가 신중히 입을 열었다.

“어, 음…. 고마워?”

나름대로 여러 의미를 함축해서 전달했다. 축하해 준 것도,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말을 가리는 것도 고맙다는 의미로 말해 주자 그녀의 눈과 입이 한순간에 커졌다. 그러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던지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을 우다다 쏟기 시작했다.

“저, 저야말로 감사함다-!! 그, 저, 저기! 서, 선배님 덕분에 여자인 저도 충분히 강해질… 아, 이게 아니라 운동! 운동을 잘 할 수 있다는 꿈이 생겼슴다…! 저는 보다시피 이렇게 작고 또 몸이 약하기도 했는데…! 선배님을 알게 돼서 정말 영광 또 영광입니다-!!”

“어, 어. 벼, 별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정열적인 고백이었다. 중간부터 맥락이 이상해지고 있었지만, 감정이 격해진 백사과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손발이 침착하지 못하고 간질거렸다. 그렇지만 싫지 않은 기분에 눈을 데록 굴리며 볼을 긁적이자 백사과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무언가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팔다리를 붕붕 휘둘렀다.

“으, 으으으…!!!!! 선배님-!!!”

“으, 응…???”

기세가 강한 외침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 떨렸다. 당황하며 눈을 깜빡이자 백사과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으로도 멀리서 응원하겠슴다-! 그리고 저도, 저도…!!”

꿀꺽. 백사과가 침을 크게 삼켰다. 그리고 배에 힘을 주며 외쳤다.

“사대천왕을 목표로 힘내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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