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우당탕탕 체육 대회 (6)
***
“…나, 이나야!”
“으앗!!”
화들짝, 귓가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외침에 깜짝 놀라 몸이 튀었다. 반사적으로 옆을 보자 그곳엔 이혜인이 있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건지. 하마터면 한 대 칠 뻔했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묻자 이혜인이 나를 한껏 미심쩍게 바라보며 자신의 손을 입가에 대며 말했다.
“이~렇게! 입이 풀어져 가지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내가?”
내가 그렇게 바보 같은 얼굴이었다고? 나는 멋쩍게 입가를 문질렀다.
“무슨 일이 있었긴-. 아-주 근사한 일이 있었지.”
이혜인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아닌 고찬영에게서 나왔다. 그는 재밌는 걸 목격한 것처럼 히죽히죽 짓궂게 웃으며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콕콕 찔러 댔다.
“요-. 인기 스타. 그런 열정적인 팬도 있고, 좋겠어~?”
“패, 팬은 무슨…!”
나는 툭, 하고 고찬영의 팔을 쳐 냈다. 왠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건 다 저 햇빛이 뜨거워서 그런 거다. 나는 표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얼굴을 어루만졌다.
‘사대천왕을 목표로 힘내겠슴다-!!!!’
“흐흐흐….”
하지만 방금 전의 일이 다시 불쑥 떠오르자 비죽 솟은 입꼬리를 막을 새는 없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방방 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두 주먹을 꽉 쥐며 참아 냈다.
‘…흠흠. 그건 그렇고.’
길거리 싸움질도 다시 보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그동안은 왜 이딴 짓을 하나, 가오와 허세에 미친 세계의 학생들이라고만 여긴 데다가 길거리에서 이름을 날린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물론 그 생각이 드라마틱하게 변했다는 건 아니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무분별하게 싸움을 일으키고, 피해를 일으키는 행동은 선수로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방금 백사과를 만남으로써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동안은 서이수를 갱생시키겠다고 뒤도 옆도 돌아보지 못하고 달려왔던 그 길이… 설마 어떤 여자아이에게 크나큰 동기가 될 줄이야. 이것은 이 세계의 일진이라는 타이틀이 가지는 힘이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그 이름의 힘을 크게 간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네, 정말.’
설마 내가 누군가에게 꿈이 될 줄이야. 나는 조용히 손을 펴며 들여다봤다. 일반적인 여자아이들, 아니 일반 사람에 비해 잔상처와 굳은 상처가 알알이 박혀 있는 손이었다. 지난 생에 비할 바는 못 되게 고운 손이기도 하였으나, 지금 이 손이 누군가에게 큰 빛을 보였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자꾸만 술렁였다.
‘이런 건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해 주는 거였는데….’
나보다 훨씬 큰 키. 그리고 다부진 어깨. 링 위를 사로잡는 카리스마. 이제는 흐릿해진 인상 너머로 그 박력만큼은 눈을 감아도 전해져 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꿈을 줄 수 있구나.
그 선수가 뭇 어린 여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실어 준 것처럼, 나도 한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그것은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치도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에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온몸을 감쌌다.
“친구님, 그렇게 좋았어?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팬이라고 해 볼 걸 그랬나~? 친구님은 생각보다 순수하네~.”
“시끄러, 이놈아. 응원이나 해.”
“아얏. 아파라-. 어차피 누가 우승해도 우리 팀이 1등, 2등인데 상관없잖아~.”
자꾸만 깐족거리는 고찬영을 한 대 때리자 그가 우는소리를 내며 툴툴거렸다. 운동장에선 치열한 줄다리기가 한창이었다. 그곳엔 이를 악물며 줄을 잡아당기는 이재현과 서이수가 있었고, 건너편엔 김시원과 서강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줄을 당기고 있었다. 즉, 그의 말대로 누가 이겨도 우리 팀이 1, 2등을 차지할 거란 소리였다. 이번 경기도 경주와 같이 반별로 진행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훗. 뭐- 당연한 결과다. 힘 밸런스도 전부 우리 쪽으로 치우친 것도 모자라 그 최강혁이랑 반휘혈이 이번 경기에 참석하질 않았다. 설령 반휘혈이 참석했어도 이번 체육 대회 총괄인 한도훈이 참석하질 않았다. 그렇기에 맞붙게 되었더라도 우리 팀이 이길 확률이 높았고, 만약 지더라도 한 팀은 3등이었을 터였다. 김시원과 서강이가 있는 팀을… 반휘혈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물론 이 세계는 빌어먹을 인소 세계라 그런 극적인 반전도 초래할 수 있다고 보긴 하다만, 아무튼 반휘혈이 참석하질 않았으니 된 거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기에 냉정히 서이수와 이재현을 시합에 내보낸 거였다. 비록 그와의 다툼으로 인해 감정이 상해 경기에 불참한 것 같아 속이 쓰리긴 하다만… 승부의 세계는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해선 안 될 일. 그리고 이것은 단체전으로 개인의 감정이 좌지우지되어선 안 되었다.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 생각한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 됐으면 좋겠다!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잠시 현실을 외면했다.
“조심해, 애들아-!!”
옆에 있던 이혜인이 조마조마하며 외쳤다. 왜 그녀는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가. 그것은 당연히 이번 경기에도 함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힘겨루기인 건 변하지 않았으나, 잡아당겨서 지는 쪽이 물웅덩이에 빠지는 구조였다. 그만큼 양측 모두 물에 빠진 생쥐 꼴만큼은 면하고 싶다는 절박함은 모두 동일했다.
다정한과 이윤이 물에 빠지고 나올 때 검은 체육복 위로 심상찮은 실루엣이 보였다든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 황홀한 미형에 환호성이 울려 퍼지긴 했다만…. 사실 이번 경기에도 누가 빠질지 기대 어린 시선들도 굉장히 많았다. 실제로 뒤에선 고찬영은 왜 참가 안 하냐고 분통 어린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중이지만, 이번만큼은 팬들이 팬들답지 않게 지는 걸 응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가 한도훈 이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기획을 했는지 모르겠다. 정작 총괄자란 이름으로 대부분의 경기에 빠지는 놈인지라 더 아니꼽게 느껴졌다. 게다가 다음 경기인 피구는 대체 어떤 식으로 나올까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으나…, 어찌 됐든 이러한 결과가 나온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보이는 익숙한 교복에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고급진 체크무늬가 새겨진 자줏빛 교복.
그것은 방금 전에 만났던 백사과가 입고 있던 옷과 비슷한 교복이었다. 나는 그 무리의 교복들을 보며 아까의 일을 회상했다.
‘근데- 그 꽃다발 용케 무사했네~.’
우리와 헤어지기 전, 백설이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백사과에게 말했다. 그러자 백사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운이 완~전 좋았슴다! 어떤 멋-진! 선배님이 제 꽃다발을 지켜 주고 계셨던 거 있지 않슴까!’
‘선배님?’
‘네! 놀랍게도 저희 학교 선배님이신 거 있죠?! 머리가 이~렇게 긴 선배님이셨는데 엄~청! 미인이셨슴다!’
백사과는 허리춤에 손을 그으며 선배라는 사람의 외형을 소개했다.
긴 머리? 같은 학교? …그리고 미인?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한 인물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녀와 비슷한 자줏빛 교복을 입었던…,
‘백장미?’
혹시 그녀가 이 학교에 온 건가? 나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백설이 그것을 들었는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미? 아-. 그러고 보니 걔도 청려였지이-.’
어, 잠깐. 네가 걔를 왜 알아…?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스러워진 내가 그를 보자 백설은 태연하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오! 선배님! 저희 장미 선배님을 아심까?!’
역시 선배님! 그 와중에 눈을 한껏 반짝이는 백사과의 시선은 또 부담스러웠다. 남모르게 땀을 삐질거리며 대답했다.
‘그리 잘 아는 건 아니고… 조금 정도.’
그것도 안 좋은 의미긴 하다만. 모르진 않았다. 백사과는 그 말에 더 눈을 빛내며 말을 주절주절 읊어 댔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백사과가 현재 중학교 2학년이며, 청려고등학교에 부속된 청려중학교에 다니고 있단 사실이었다. 그래서 백장미란 이름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선배님은 정말 처음 봤슴다! 그렇게 멋진데 왜 안 알려졌을깝쇼~?’
그러다 백사과가 고개를 문득 이상한 게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 덕에 나는 백사과에게 꽃다발을 준 이가 백장미가 아니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은 다른 의미로 내 귀를 사로잡았다.
‘역시 안경 때문인가~? 멀리서는 잘 모르겠지만, 가까이서 보니까 엄~청 잘생겼었다구여? 그 얼굴로 꽃다발을 말없이 내밀면서 주는데… 같은 여자임에도 심쿵! 완전 짱이었슴다! 아, 물론 제겐 조… 아니, 선배님이! 선배님이 가장 최고임돠!!’
“흐음.”
나는 그 대화를 곰곰이 떠올리며 턱을 쓸었다. 중간부터 백사과가 나에 대한 칭찬을 일장 연설하긴 했지만, 어쩐지 그 앞에 했던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더 나올 만한 의외의 인물이 있었나.’
이제 나름대로의 유명인사들은 다 만난 것 같은데. 여주의 한 획을 그을 것 같은 백사과가 미인이라고 말할 정도의 인물의 이야기를 들으니 굉장히 석연찮았다. 지금 만났던 인물 중에서 안 만났던 유명인이라면 정태우랑 김율뿐.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아닐 텐데.’
둘 다 청려고등학교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 둘은 남…
“6반 승-!!”
“아.”
그때, 줄다리기의 우승 팀이 정해진 소리가 울리고, 동시에 환호성이 쩌렁쩌렁 퍼져 갔다. 상념에 잠겨 있던 고개를 퍼뜩 들자 그곳엔 서이수와 이재현이 물웅덩이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김시원과 서강이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꼿꼿이 서 있어 승리를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두 팀 모두 수고했단 의미로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런 내게로 물에서 빠져나온 서이수가 툴툴거리며 다가왔다.
“짜-증 나!”
“그래그래. 이길 거라 생각은 안 했다만, 수고했다.”
“네가 그러고도 누나냐고-!! 누나가 더 짜증 나!!”
아이고, 저놈의 말본새하곤. 나는 혀를 차며 가방 안에 있던 수건을 서이수에게 던졌다. 서이수는 그것을 공중에서 가로채며 젖은 몸을 닦아 냈다.
“누나, 마실 거 좀 줘.”
서이수는 갈증이 났는지 손을 내밀었다. 그 뻔뻔한 모습에 나한테 뭐 맡겨 놨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서이수가 으르렁거렸다.
“누나가 아까 내가 마시려고 했던 음료수 가져갔잖아!”
앗. 이럼 할 말이 없는데. 나는 멋쩍게 뒷목을 문지르다가 옆을 더듬어 병을 들어 올렸다.
“어.”
그런데 그 병이 심히 가벼웠다. 내용을 확인하자 그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 미안. 없다, 이수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 마셔 버렸나 봐. 머쓱하게 웃으며 빈 병을 흔들어 보이자, 서이수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럼 나도 사 줘-! 아까 가져갔…!!”
“피구 경기가 곧 시작됩니다. 6반 준비하세요-!!”
“아이코, 미안하네~. 그럼 난 대회 뛰러 간다? 자, 이걸로 대신 사 먹구!!”
“아, 누나-!!! 서이나!! 야-!!!!”
나는 황급히 그 손에 돈을 쥐여 주며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왁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모른 척 경기장으로 향했다.
***
“하여간 진짜 짜증 나-!!”
서이수는 젖은 옷을 쭉 짜내며 툴툴거렸다.
“하하, 이수야, 참아.”
“너도 같은 꼴이면서 짜증 안 나?!”
그런데 이재현은 그런 친구의 마음을 모르는지 옆에서 초 치는 소리를 해 댔다. 서이수가 얼굴을 확 찌푸리며 분개하자 이재현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분하긴 해도 재밌잖아~. 난 오랜만에 공부 안 하고 이렇게 움직이니까 좋은데.”
“…쳇.”
그 말에 서이수를 할 말을 못 찾고 혀를 찼다. 평소 묵묵히 공부에 전념하는 이재현을 알다 보니 서이수는 불평을 내뱉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는 입을 삐죽이다가 성큼성큼 어딘가로 향했다.
“어디 가, 이수야?”
이재현이 그런 서이수를 불렀다. 서이수는 뒤를 보지 않은 채 외쳤다.
“음료수 사러!”
“아, 내 것도 부탁할게!”
“…으으! 알았다고!”
서이수는 버럭 외치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옮겼다. 하여간 원수가 따로 없는 누나 같으니. 방금 사 온 음료수만 있었다면 제가 이렇게 두 번이나 자판기로 향할 일이 없잖은가. 오늘따라 사람은 왜 이렇게 많고, 가는 길은 왜 이렇게 험한지! 게다가 다 젖어서 그런지 구경꾼들이 너무 많았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그렇게 우스운가? 곳곳에서 입가를 가리며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게 심히 거슬렸다.
“으, 찝찝해.”
하필 체육복도 검은색이다. 안 그래도 쪄 죽을 날씨에 검은색이 웬 말인가. 물론 누나네처럼 강렬한 빨간색보단 낫다만. 그래도 불만인 건 불만인 거였다. 이 체육복 디자인 대체 누가 정한 거야? 그는 딱 들러붙는 체육복을 떼어내며 탈탈 털어 냈다. 그러자 배가 살짝 드러나면서 숨겨진 복근이 나타나자 곳곳에서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서이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짜증을 부리며 자판기로 향했다.
“하여-튼! 내 거 마셔 놓고 지기만 해 봐! 이렇게 확-! 으왓?!”
서이수는 코너를 꺾으며 섀도 복싱을 하다 말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은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뻗은 손은 멈출 수가 없었고, 그는 당황하며 서둘러 빗맞히기라도 하고자 궤도를 틀기 위해 몸을 비트는데,
텁-.
…주먹이 가볍게 막히었다. 서이수는 가로막힌 제 주먹을 보며 얼떨떨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보이는 건 커다란 안경과 장발이었다.
“음?”
갑자기 나타난 이는 제가 쥔 주먹을 보며 눈살을 살풋 찌푸렸다. 마치 이게 왜 여기 있느냐는 듯한 낯이었다. 마치 무의식적으로 막은 모양새였으나, 서이수는 그 짤막한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기에 그 미묘한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서이수는 서둘러 사과하며 뻗은 주먹을 회수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런 서이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서이수는 안경으로 가려지긴 하였으나, 그 시선이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 눈 둘 곳을 못 찾다가 이내 저 멀리 있는 자판기를 발견했다.
“아, 잠시만, 잠시만요!”
그리고 그는 후다닥 뛰어가 자판기 앞에 섰다. 황급히 음료수 하나를 누르고 꺼내 그 사람 앞에 다시 섰다.
“이거, 죄송하단 의미입니다. 받아 주세요.”
그 사람의 시선이 음료수를 향하였다. 빤히 쳐다보길 몇 초, 다시 그 시선이 서이수에게 향했다. 서이수는 받지 않고 자신만 멀뚱히 바라보는 그 시선에 슬슬 무안해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누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의 머리가 번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훗….”
그런데 돌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이수가 놀라 눈앞에 있는 이를 보자, 그는 자연스럽게 음료수 캔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 곁을 지나쳤다. 그 옆태를 본 서이수의 눈은 한순간에 커졌다.
“어…….”
서이수는 멍하니 떠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잘생겼다….”
순식간이긴 하나, 안경 속에 가려졌던 그 얼굴은 확실히 미인이었다. 서이수는 짧고도 강렬했던 그 만남을 머릿속으로 다시 되새겼다. 미인은 숱하게 만나 봤지만, 저런 타입은 처음이었다.
“…여자가 잘생긴 건 처음 보는데.”
서이수가 짧게 중얼거렸다. 그의 안에서 머리 긴 남자일 거란 사실은 당연히 배제되었다. 그 사람이 바지를 입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서이수에겐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방금 지나갔던 그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청려여고에 저런 사람이 있던가…?”
여자 고등학교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