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우당탕탕 체육 대회 (7)
***
“누나, 잠시만요.”
“응?”
툭, 하고 내 어깨를 짚으며 나를 부른 건 김시원이었다. 피구 예선을 앞두고 몸을 가볍게 풀던 중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자세는 풀지 않은 채 고개만 들어 올려 그를 보자 김시원이 입을 열었다.
“얘기 들었어요.”
“응?”
“휘혈이랑, …일이 있었다면서요.”
“…….”
우뚝, 스트레칭하던 몸이 멈췄다. 나는 잠시 그대로 굳어 있다가 다시 스트레칭을 재개했다.
“아, 뭐…. 그렇지. 누구한테 들었어?”
“같은 반 애한테서요.”
아, 그렇구나.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에 관심 없는 김시원이 알 정도면 반휘혈의 절교 선언이 온 학교에 퍼졌겠군. 당장이라도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괜한 걱정을 끼칠까 싶어 꾹 눌러 참았다. 잠깐 동안 잊고 있던 막막한 현실이 다시 눈앞에 드밀어진 건 참아 본다 해도 없어지지 않아 가슴 안쪽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휘혈이가 화낸 이유도 알아?”
“그 인간들이 누나 욕했다는 거요, 아니면 누나가 그 인간들 옹호해 줬다는 거요.”
우뚝, 그 말에 스트레칭을 하던 몸이 또 굳어졌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올렸다. 시선의 끝에선 김시원이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자세를 풀며 김시원에게 물었다.
“…혹시, 화났어?”
“네.”
그, 그렇구나…. 너도 화났구나…. 할 말을 잃고 시선이 방황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갈피도 잡히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는데 김시원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두 사람 사이야 제가 할 말은 없다지만…,”
“음.”
“누나는 저희가 피해를 입으면 바로 나서잖아요.”
안 그래요? 뒷말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마치 그 시선이 확신 어린 물음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괜히 찔리는 기분에 나는 멋쩍게 볼을 긁적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을 잠자코 지켜보던 김시원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누나가 저희들 때문에 화를 내는 것처럼 저희도 이런 얘기 들으면 화나요.”
“…….”
김시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누나 입장에선 달갑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반휘혈이 아니었어도 우리가 그 녀석들 가만 안 뒀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대응은 너무 과했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시원은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누나의 대처가 틀리지 않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짜증이 난다는 거예요.”
김시원의 진지한 눈빛이 내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저는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에요. 이건 기분 문제라고요.”
“기분….”
왠지 머리에 찬물을 들이부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멍한 시선으로 김시원을 보고 있자, 김시원은 인상을 살풋 찡그리며 머리를 헝클였다.
“…아무튼, 반휘혈이 그 녀석들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뭐가 됐든 한도훈이 직접 들은 게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엇.”
나는 그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아, 그러네. 오히려 반휘혈보다 한도훈이 들었으면 더 위험했던 게 아닌가…? 아, 아니. 잠깐. 근데 걔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 그럼 나 욕한 놈들의 생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
음. 모르겠군. 어차피 그놈은 내가 말린다고 들을 놈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았으니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슬쩍 눈을 흐리며 그들에게 닥쳐올 피바람을 외면하기로 하였다.
…갑자기 그렇게 성질이라도 내고 가 버린 반휘혈이 순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를 내고 가긴 했으나, 결국엔 내 말대로 따라 주지 않았는가.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귓가에 반휘혈이 내뱉었던 고함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것은 심장에까지 울리는 울분이었다. 나는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역시 얘기를… 다시 해 봐야겠어.’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화를 낸 건 나를 아낀다는 반증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감정도 몰라주고 말리는 내 모습에 그간 내재된 화가 폭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너무 많이 제약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게다가 화도 못 내게 해. 정말 반휘혈의 말대로였다. 어쩐지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도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푹 내쉰 후 툭, 하고 김시원의 등을 가볍게 쳤다.
“…고맙다.”
덕분에 정신이 좀 들었다. 아무래도 너무 내 일이라고 쉽게 말한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론 빡빡하게 굴지 말고 적당한 융통성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평소 말수 적은 놈이 이렇게까지 말한 걸 보면 김시원도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듯싶었다. 아마 그것은 이재현이나 앞으로 소식을 접할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무작정 막기보단 적당한 합의점을 차차 찾아가 보자. 그럼 괜찮겠지. 이것을 깨닫게 해 준 그에게 감사를 전달하자 김시원이 나를 흘끗 보더니 시큰둥히 대꾸했다.
“알았으면 됐어요.”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가자.”
“네.”
대화는 이 경기가 끝나고 나서다. 그러니…
‘빨리 끝내 주마.’
나는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경기장 안으로 진입했다.
***
학교는 체육 대회로 인해 한껏 들떠 있었다. 하나, 여기에 홀로 동떨어져 옥상 위에 유유자적히 누워 눈을 붙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 최강혁은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의 금빛 머리칼이 흔들리든 말든 그대로 몸을 맡겨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지잉- 지잉-.
그러나 그 단시간은 오래지 않고 깨졌다. 품속에서 울리는 가벼운 진동에 선잠이 깬 그는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하나 한참이 지나도 진동은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결국 최강혁은 품을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이라도 꺼 놓을 심산이었던 그는 발신인을 발견하곤 끄려던 손을 멈추었다.
[다정한]
그는 그 이름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손가락을 움직여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아, 이제 받았네.]
전화 건너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최강혁은 도로 눈을 감은 채 못마땅한 듯이 대답했다.
“뭐야.”
[뭐긴. 곧 점심시간 다 끝나 가는데 이제 슬슬 내려오는 게 어때? 네 몫도 남겨 놨어.]
…점심.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최강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간은 정직하게도 다정한이 말한 대로 얼추 점심이 다 끝날 무렵에 가까웠다.
“됐어. 어차피 이 시끄러운 대회도 곧 끝나잖아.”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배 안 고프겠어?]
“됐다고.”
대화를 이어 갈수록 점점 귀찮음이 올라왔다. 꺄꺄, 거리는 소음만 가득한 이런 대회, 머리만 아팠다. 이전이었다면 흥미와 자극을 위해 참여했을지도 모르지만, 요즘의 그의 감상은 이전과 좀 달라졌다. 권태로운 건 여전했지만, 어쩐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단 기분이랄까. 아무튼 말하기 복잡했으나, 이 고요한 시간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왠지 졸립군.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정한에게 따분한 어조로 말했다.
“더 할 말 없으면 끊어.”
물론 있어도 대단치 않으면 자신이 먼저 끊어 버릴 생각이었다.
[아, 나 할 말 있어.]
“…….”
그런데 생각하기 무섭게 다정한이 다른 본론을 꺼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점점 멀어지는 의식을 느끼며 그 말에 대충 귀를 기울였다.
[누가 안부 좀 전해 달래.]
“……?”
감겼던 눈꺼풀이 떠졌다. 최강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핸드폰을 슬쩍 노려봤다.
“안부?”
누가. 함축된 의문이 전달되었는지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후후, 그래. 누구일 거 같아?]
재밌어하는 듯한 다정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최강혁은 그 주인공이 누군지 바로 눈치챘다.
“하….”
그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최강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곤 흐트러진 머리칼을 더 헝클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 땅콩한테 필요 없다고 전해.”
누가 누굴 걱정해? 어이가 없네, 진짜. 그는 자꾸만 터지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후후, 꽤나 자존심 상했나 봐?]
“닥-쳐.”
다정한이 놀림에도 최강혁이 시큰둥하게 반박했다.
“그보다 네가 왜 땅콩이 하는 말을 전해 주는 건데.”
[음-.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꽤 큰일이 벌어졌었거든.]
“호-?”
최강혁은 그 말에 흥미를 보였다. 땅콩이 엮일 땐 보통 재밌던데. 그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도 일이 재밌게 돌아감을 눈치챘다. 다정한도 그의 관심을 눈치챘는지 방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줬다.
“…푸핫!”
그리고 설명을 다 들은 최강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완전 골 때리네.”
반휘혈이 학교에서 난동을 부린 것도 모자라 그 목매던 땅콩과의 절교 선언. 곧바로 사대천왕인 백설의 등장.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백설에게 서열 싸움을 건 멍청이라니. 게다가 웬 여자애가 나타나 땅콩의 욕을 한 놈을 쥐어팼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그 백설의 동생? 이보다 더한 막장이 어딨는가.
자신이 한가로이 여기서 시간을 보내던 사이에 이런 난장판이 벌어질 줄이야. 이런 재밌는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귀찮더라도 조금쯤 참여할 걸 그랬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서, 또 뭐 없었어?”
[있었지. 그 와중에 그 선배가 속한 팀이 연전연승 중이야. 우리 팀도 다른 팀도 50m 제외하곤 완전히 져 버렸거든. 방금 전엔 피구 했는데 기세가 꽤 무섭더라.]
“오.”
또 그 와중에 착실히 우승을 거머쥐고 있다니. 거참 여러모로 대단한 땅콩이 아닌가.
뭐, 당연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이긴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최강혁은 히죽 웃으며 무릎을 세워 팔을 걸쳤다.
[아무튼 이번 대회 꽤 재밌어. 너도 그러고 있지 말고 참석하는 게… 응?]
“뭐야.”
그런데 돌연 다정한의 말이 끊기었다. 그 반응에 최강혁이 의문을 나타냈다. 다정한은 잠시만, 하고 그를 잠깐 기다리게 했다. 다정한의 말이 끊기고 핸드폰 너머에선 여러 소음이 들려왔다. …왔대! 진짜? …미가 왔다고? 여러 목소리가 분잡스럽게 섞여 있다. 귀를 기울인다면 무슨 내용일지 알 수도 있었으나 그것은 최강혁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하품을 하며 다정한을 잠깐 기다리다가 도로 누웠다.
이제 슬슬 끊을까. 유쾌했던 기분에 점점 지루함이 찾아오자 그의 인내심은 순식간에 휘발됐다. 그는 자연스럽게 통화를 종료시키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타이밍 좋게 다정한이 돌아왔다.
[아, 안 끊었네?]
“흠.”
웬일로 안 끊었냐는 뉘앙스였지만, 돌아온 그에게 딱히 해 줄 말은 없었다. 최강혁은 시큰둥하니 하늘을 보았다. 누워서 올려다본 하늘은 지나치게 쾌청했다. 그는 그것을 지긋이 보다가 눈을 감았다.
[혁아, 방금 재밌는 손님이 찾아왔어.]
“…손님?”
여기서 재밌을 게 더 있나? 손님이라. 백설 이외의 재밌는 방문자라 하면, 마땅한 인물이 극히 적었다.
“왜, 정태우나 김율이라도 왔나 보지?”
그럼 진짜 재밌겠네. 큭큭 낮게 웃으며 대꾸하자 다정한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쉽게도 그 정돈 아니야.]
“뭐어-야. 그럼 재미있는 게 아니….”
[장미 선배가 학교에 왔어.]
“…뭐.”
감겼던 그의 눈이 떠졌다.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붉은 눈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널 보러…,]
뚝.
전화가 끊겼다. 최강혁의 손가락은 어느새 통화의 종료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는 잠시간 말없이 하늘을 보았다.
“…….”
그 잠깐 사이에 푸른 하늘에 구름이 설핏 끼어 있었다. 그는 구름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이내 눈꺼풀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 후, 그는 몸을 곧장 일으켰다. 그러곤 척척, 옥상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옥상의 문이 열리고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최강혁은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둑한 통로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예리한 빛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