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우당탕탕 체육 대회 (8)
***
한도훈은 현재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큰일이다.’
이걸 어쩌지. 예상과 다른 노선에 그의 머리는 여느 때보다 팽팽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설마 반휘혈이 먼저 동생을 그만두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를 두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다니.
‘…망했는데?’
몇 번을 생각해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차질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이벤트들은 반휘혈의 둔함을 자극하기 위한 발화제였지, 촉진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의 불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여기서 기름을 붓는다? 가볍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쩌지.’
한도훈은 얼굴을 심각히 굳힌 채 책상에 팔꿈치를 괴었다.
“저, 한도훈 도련님.”
“네.”
그때 상석에 앉아 있던 그에게 근처에 있던 중년의 남성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손수건으로 자신의 빈 머리를 닦은 채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어째서 여기에 계시는지…? 아,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황송합니다만. 이런 늙은 사람보단 친구분들과 어울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럽니다, 네….”
도대체 한도훈은 왜 이곳에 온 건가. 이 방의 주인이자 교장인 남자는 갑작스레 찾아온 난입객에 땀을 뻘뻘 흘렸다. 올해 들어 한두 번 온 게 아니긴 하다만, 그럴 때마다 상석을 고스란히 내주는 그의 입장에선 매번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게 한도훈은 나이만 어릴 뿐이지, 이 학교의 최대 후원자였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혜택이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의 심기를 어지럽혀선 절대 안 될 노릇이었다. 게다가 교장은 몇 번의 대면으로 이 어린 도련님이 만만히 보면 안 될 인물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처음에 어리다고 얕봤다가 얼마나 크게 데었던가. 그는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손이 덜덜 떨리고 밤에 잠도 오질 않았다.
그런데 이 어린 물주가 오늘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상시 유들거리는 미소를 짓던 한도훈이었기에 가라앉은 그의 태도는 교장으로 하여금 긴장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교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을 기다리자 한도훈은 그를 한번 흘긋 본 후 짧게 대답했다.
“여기 의자가 가장 편해서요.”
“…….”
한도훈이 무심하게 대답하자 그는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하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 그, 그, 러시군요…! 네, 네! 그 의자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에 학교에 후원해 주신 도련님의 자비에 힘입어 이번에 새로 구매한 이태리산….”
교장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묻지도 않은 말들을 나열했다. 오랜 사회생활로 체득한 입바른 기름칠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으나, 한도훈은 그걸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단, 하나. 바로 반휘혈과 서이나의 관계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려나.’
이것을 자신의 계획과 병행해 기회로 삼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은 도박과도 같은 방법이었다.
‘잘못하면 휘혈이 손에 죽겠는데.’
이건 과장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사실 반휘혈이 방금 그 여자들에게 화를 낸 건 약과에 속한 편이었다. 다른 이들이 느끼기엔 이전의 별명을 연상할 정도일지 몰랐지만 이제껏 그를 가장 가까이서 봐 온 건 한도훈 자신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주 귀여운 수준에 불과했다. 한도훈이 방관하며 여유롭게 구경한 것도 그 탓이었다. 그렇게 화를 내더라도 그는 서이나를 생각해서 적당히 완급 조절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마 이렇게 일이 틀어질 수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도 말렸을 터였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다. 반휘혈이 그렇게까지 눈이 돌아간 건 처음이었다. 여자들에게 화를 낼 때보다 서이나와 절교 선언을 마치고 제게 뜻대로 하라는 말을 했을 때가 더 위험해 보였다. 한순간이긴 했으나, 그 찰나의 순간만은 확실히 중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 박력이 참 설렜지만, 그것을 즐기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는 현재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사태가 일어날 것 같았다.
“도련님, 무대 설치가 막 끝났다는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아.”
젠장.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는 자신의 곁에 서서 대기하던 비서가 올린 보고에 머리를 헝클였다. 한도훈은 지금이라도 취소를 해야 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보고 싶어!’
반휘혈이 질투에 불타오르는 모습! 그 모습을 직관하고 싶었다. 이성은 그만두라고 열심히 말리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은 저열한 욕망이 이겨 버렸다.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한도훈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는 다가올 일에 대한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끼며 입꼬리를 비죽 솟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도훈이 떠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비서가 그에게 다가오며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백장미 학생이 이 학교에 왔다고 합니다.”
“아, 그래요?”
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확실히 슬슬 올 타이밍이었다. 그 백여우가 범생이인 척 가증을 떠는 걸 생각하면 본 수업이 다 끝나서야 올 거라 예상했다만, 어쩜 이렇게 예상에서 빗나가질 않는지.
한도훈은 피식, 웃으며 교장실을 나섰다. 뒤에서 그제야 해방이 됐다는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교장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한도훈은 짓궂게 미소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주연들이 다 모였네.”
백장미가 찾아왔다는 소식은 필히 그 자식도 들었겠지. 그 더러운 성격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한도훈은 앞으로 다가올 파란을 얼추 그려 보며 스산하게 웃음을 지었다.
***
없어, 없다고.
‘반휘혈, 그 녀석 대체 어디로 간 거야아…!!’
시간이 촉박해 반이 있는 관중석으로 돌아온 나는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싸맸다. 이놈의 자식, 왜 이렇게 숨바꼭질을 잘하는 건데. 밥 먹고 그것만 하나? 어째 제대로 찾아본 적이 한 번도 없을 수가 있나. 맨 처음 그를 찾았을 때도 한도훈의 조력으로 겨우 찾았는데! 어떻게 같은 학교에 있는데도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 수 있는가. 학교 안이라면 그 흔치 않은 얼굴은 금방 보일 것이라 여겼던 스스로의 자만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심란한 와중에 들려온 소식 하나.
“와, 백장미 진짜 존나 예쁨.”
“멀리서 봤는데 진짜 여신이더라.”
바로 백장미가 이 학교에 왔다는 것. 나는 그 사실에 얼굴을 구기며 질색했다.
‘으, 나 걔 완전 껄끄러운데.’
요전번 만남 덕에 백장미는 내 안의 블랙리스트 1순위였다. 그녀가 이 학교에 온 이유 따윈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최강혁 때문이겠지. 굳이 또 나를 보러 오겠는가. 무엇보다 이전에 헤어질 때 서로 얼굴을 붉힐 때로 붉힌 전적이 있었다. 그 일은 아직까지도 떠올리면 뒤숭숭하기 짝이 없는 기억이었다. 그렇기에 주위에서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든 말든 나완 하등 상관없다, 이것이다.
…역시 저쪽으론 시선도 주지 말아야겠다. 혹시라도 재수 옴 붙으면 나만 고생하는 거였으니까. 혹시 만날 줄 알았으면 소금이라도 챙기고 나오는 건데, 쯧.
“대회 끝나고 기다려 봐야 하나….”
나는 백장미에 대한 관심을 금세 끊고 다시 반휘혈과의 대화 자리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온화하고 평화롭게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턱을 괸 채로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고 있는데, 이혜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 찬영이 어디 갔어?”
“음…?”
이혜인의 말에 정신이 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그러고 보니 고찬영이 안 보이네. 어쩐지 조용하더라. 나는 그제야 내 곁을 맴돌며 그 입을 쉬지 않던 친구의 존재를 떠올렸다.
“어, 찬영이…? 볼일 있다고 어디 가 버렸어.”
“음, 이 시간에?”
안경희의 대답에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또 여자한테 불려 갔나?”
이번 체육 대회에서 그를 노리는 여자들이 널리고 널렸으니, 그중 용자가 데려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 솔로이기도 하니 그들 입장에선 맛있는 먹잇감이 홀로 돌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렇다면 이번엔 좀 제대로 된 여자 좀 사귀면 좋겠는데. 여자 보는 눈이 더럽게 없다 보니 좀체 안심이 되질 않는다. 왠지 걱정이 되기 시작한 나는 괜히 그를 찾기 위해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어, 아, 아냐. 여자가 부른 건 아닌 것 같았어…!!”
“아, 그래?”
안경희의 말에 반쯤 떠 있던 엉덩이를 도로 내렸다. 그럼 다행이지. 나는 그제야 안심을 하며 턱을 괴었다.
‘흠, 이렇게 불안할 바엔 차라리 내가 여자나 소개해 줄까.’
이제껏 전적이 있다 보니 걔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번듯하고 괜찮은 여자 한 명 소개해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주위에 소개해 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후보를 추리는데 돌연 밝은 빛이 얼굴에 닿아 왔다. 기습처럼 뻗은 반사광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뭔… 으음?”
그리고 나는 보이는 것에 미간을 더 좁혔다.
‘뭐야, 저건.’
모자와 마스크. 게다가 선글라스로 풀 무장한 것도 모자라 손에 들고 있는 저 커다란 카메라. 누가 어떻게 보아도 대포 카메라를 든 저 수상한 인간은 대체 무엇인가. 거리가 좀 있었으나 보는 데 무리는 없었다. 나는 수상쩍은 시선을 금치 못하며 그쪽을 보았다.
‘…혹시 도촬범?’
아니, 그런데 너무 대놓고 촬영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여선지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굳이 왜 저렇게 꽁꽁 싸맨 거지? 뭐, 변태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긴 하다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깊게 따지지 않기로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여라도 저 녀석이 이상한 짓을 저지르면 안 되니 경비에게 따로 언질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메라를 보던 수상한 인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
우연찮게도 나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거리가 있어 착각일 법하였으나, 저 사람의 몸이 화들짝 놀란 것처럼 잘게 튀어 올라 착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