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우당탕탕 체육 대회 (10)
시발, 이게 뭐람. 너희들 대체 이게 뭔 짓거리야! 나는 당장이라도 이놈들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눈앞에 닥친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상의도 없이 무대에 끌려온 것도 모자라 이렇게 수백이 보는 앞에서 이 꼴이라니. 그것도 하렘의 정석 같은 자세로!
아아. 온몸이 따갑다. 관중석을 보지 않고도 이목이 전부 내게로 집중된 게 느껴진다. 무대에선 무슨 이상한 반주도 흐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뭔 상황인가 파악도 안 되는 상황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속으로 참으며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푹 숙였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었다.
그,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이대로 잠깐 나타났다가 빠진다면 저건 뭐야? 하는 수준에서 그칠지도 모른다. 나는 빨리 이놈들이 내게서 떨어져 주길 바랐다. 하지만 내 바람은 덥석, 손이 잡히면서 얇게 녹인 설탕처럼 손쉽게 박살이 나 버렸다.
“…받아 주실래요?”
뭐? 나는 뭔 개소린가 싶어 얼굴을 감싸던 손을 치웠다. 그곳엔 이재현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보석이 달린 팔찌를 내 팔에 대며 수줍게 웃었다.
“당신은… 제게 여느 보석보다도 의미 있는 사람이에요.”
WHAT. 나는 입을 떡 벌리며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이재현을 보았다. 이재현은 자기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자각이 없는 모양으로 웃고 있었다. 그에 나는 얘가 뭘 잘못 먹고 머리가 돌아 버린 건가, 진지하게 경악하고 있는데 불쑥 다른 손이 나타났다.
“…자요.”
“어?”
기, 김시원?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김시원은 나와 시선을 좀체 맞추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곤 머리를 헝클이며 고개를 돌리더니 휙, 하고 내 목 근처에 예쁜 보석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대었다.
“역시 잘 어울리네.”
시원아?! 나는 입을 떡 벌리며 너마저 그럴 순 없단 시선을 보냈다. 얘네들이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고 싶었으나 너무 당황해선지 몸이 굳어 버렸다. 좀체 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자, 누군가 헛기침을 요란하게 해 댔다.
“흠, 크흠…!!”
아니, 넌 또 뭐야! 그 주인공은 바로 서이수였다. 이 순간 나는 굉장히 불길했다. 앞서 두 놈이 이상한 소릴 지껄여서 내 동생 놈도 개소리를 지껄일 것 같았다. 그래서 황급히 막으려는데,
“그, 그니까 당신, 당신은… 에이씨, 안 해!!”
서이수가 중도 포기 선언을 외쳤다. 그 덕에 나는 소름이 돋으려던 팔을 쓸어 내며 안도했다. 만약 그 입에서 무언가 내뱉었다면 내 주먹이 어떻게 나왔을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도 이로써 하나 깨달은 바가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하나의 연극과 다름없다는 것. 이제야 눈치챘는데 저들에겐 마이크가 부착되어 있고 그들의 목소리가 운동장에 퍼지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긴 하였으나 서이수가 대사 비슷한 걸 읊어 줘서 분위기가 확실히 깨진 덕에 알게 되었다. 서이수가 연기를 못한다는 게 이 순간 이렇게 다행일 수가. 그런데 서이수가 돌연 내 품에 무언가를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하든가, 말든가! 호박이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아니, 저 새끼가? 품에 나동그라진 것은 예쁘게 보석이 세공된 머리핀이었다. 나는 확 저놈에게 다시 던져 버릴까 머리핀을 움켜쥐는데, 돌연 내 턱을 슬쩍 들어 올리는 손이 있었다.
“?!”
“음-. 역시. 내 안목은 틀림없다니까.”
싱긋, 내 턱을 들어 올린 놈. 고찬영이 나와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내 귓불에 보석이 세공된 귀걸이를 대었다. 차가운 금속이 무방비한 귀에 닿았고 그 곁으로 고찬영이 작게 속삭였다.
“여기, 이곳. 내 흔적을 만들고 싶어.”
“……!!!!!!!!!!!!”
미이친-!!!! 나는 예상치 못한 기습에 기함하며 파박, 하고 얼굴을 떼어 냈다. 그의 대사와 함께 운동장 전역이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들 중 나보다 더 놀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황스러움에 심장이 쿵쿵 뛰며 얼굴에 열이 몰렸다. 그런데 정작 대형 폭탄을 터트린 당사자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오히려 내게만 보이는 짓궂은 미소를 짓고는 슬쩍 물러나 주었다.
폭풍이 휩쓸어 간 것 같은 감각에 아무것도 못 하고 그가 다가왔던 귀를 어리벙벙하게 매만졌다. 그런데 갑자기 손이 잡혔다.
“흐음~.”
이번엔 또 뭐야…! 나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내 손을 잡은 놈을 보았다. 그 주인은 바로 한도훈이었다. 그는 내 손가락을 어루만지더니, 고개를 크게 갸웃거리며 능청스레 물었다.
“여기 자리, 비었나요?”
“어?”
“툭툭, 여기요.”
한도훈은 내 약지를 왼손 약지를 툭툭 건드렸다. 나는 그 행동에 얼굴을 굳혔다. …있겠냐, 이 자식아!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해선 안 될 것 같았기에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 있어.”
그러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뻥이군. 거짓말이구나. 하는 생각들이 얼굴에 다 쓰여 있었다. 당연하다. 이놈들은 내가 남친이 없다는 걸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당하고 있어선 안 될 것 같다는 쓸데없는 오기와 승부욕이 발휘되어 버렸다.
자, 한도훈. 이러면 너라도 당황스러울…,
“아, 그래요? 뭐, 그래도 괜찮아요.”
…거, 엥?
“치워 버리면 그만이니까.”
“…….”
나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째선지 한도훈의 말이 연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내용도 내 마음을 차지해 상대를 치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조용히 있을걸.’
괜히 입 열어서 간담만 서늘해졌다. 나는 눈을 흐리며 다시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음? 왜 그래요. 보석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 중에 한도훈이 방금 자신이 한 말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능청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타인이 보기엔 꽤나 귀여워 보일지 몰라도 지금의 내겐 아니었다. 이 가증스러운 녀석 같으니…. 질린 시선으로 보고 있어도 한도훈은 괘념치 않았다. 그는 행복한 듯 사랑스럽게 웃더니 내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 내 손을 제 볼에 가져가서는 반지를 내 약지에 대었다.
“하긴, 그렇겠다. 이런 보석보다 훨씬 더 예쁘니까.”
“?!!?!”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미친, 괜히 들었다! 나는 오소소 돋는 닭살에 손가락이 곱아들며 덜덜 떨었다. 하지만 한도훈은 한 번 더 제 볼에 내 손을 누르며 천연덕스럽게 웃는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의미심장한 서두와 함께 한도훈의 시선이 카메라로 움직였다.
“당신의 선택은?”
한도훈이 찡긋, 윙크를 날렸다.
촤륵-!!
그와 동시에 앞에 설치되었던 천으로 된 임시 가림막이 쳐지며 무대가 폐막했다.
그리고…,
“꺄아아아아아아-!!!!!!!!!!!!”
학교가 뒤집혔다. 멀리 있는데도 학생들의 흥분이 여실히 전해졌다. 나는 공허한 눈동자로 가림막을 보다가 하늘을 보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쾌청했던 하늘엔 구름이 끼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날은 좋았다. 나는 그 맑은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는 건가.’
아니, 암살을 당할지도 몰라. 뇌가 더 이상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걸 포기했고, 내 심장은 차게 식어 갔다. 이로써 두 번째 삶은 이들 중 팬이었던 괴한에게 습격당해 죽는 걸로 엔딩. 이 세상에 온 지 약 3년. 거참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유서는 어떻게 적으면 좋을까. 아니, 적을 게 있긴 하나. 왠지 모르게 허파에 바람 빠진 소리가 입에서 자꾸 터져 나왔다.
“수고했어요~! 누…, 앗.”
그때, 한도훈이 발랄한 음성으로 내게 수고의 인사를 걸어 왔다. 하지만 끝맺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내가 그 머리통을 한 손으로 쥐어 잡았으니까.
“도훈아, 뒤질래?”
왠지 갑자기 나 혼자 죽기가 싫네? 살벌히 얼굴을 굳히며 한도훈의 머리를 으깨려는 것처럼 더 강하게 쥐어 잡았다.
“누, 누나? 저 진짜 아픈…, 아아아! 아! 잠깐! 악-!!!”
한도훈이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놈이 받는 고통은 방금 내가 얻은 마음의 상처에 비할 바가 못 되니까!
나는 그 머리통을 힘을 준 채 가벼이 흔들며 스산히 말했다.
“이 같잖은 계획을 꾸민 이유가 뭔지, 당장 말해라. 한도훈.”
안 그러면 이 작은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어.
***
한도훈은 어째서 이런 계획을 꾸몄는가.
그것은 몇 주 전, 서이나가 반휘혈의 집에 집들이를 갔다 온 게 계기였다.
‘어째서.’
왜 이렇게 파탄이 났는가. 한도훈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반휘혈이 서이나를 피한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대체 왜?!’
판이란 판은 다 깔렸잖아. 그런데 어째서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틀어질 수 있는 건데? 반휘혈이 이번엔 분명 조급해서라도 누나에게 고백할 줄 알았다. 대놓고 좋아한다, 뭐 이런 게 아니어도 좋았다. 그 비슷한 말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반휘혈은 이번에 여유가 없다는 게 여실히 보였으니까!
주연희인지 조연인지 뭔지 때문인지 애매하게 거리가 벌어진 건 반휘혈도 느꼈을 터였다. 하나 반휘혈에게 있어서 서이나는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도훈에게도 서이나는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반휘혈이 여기는 바엔 따라갈 수 없었다. 그만큼 그의 마음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렇지만 한도훈은 반휘혈이 누군가에게 그런 관심을 준다는 것 자체가 기꺼웠으며 그 대상이 서이나란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래서 한도훈은 그들의 사이를 응원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 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하지만 집들이 이후로 두 사람의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한도훈은 고뇌에 빠졌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면 그것은 자신에게도 영향이 크게 올 거다. 아니, 이미 오고 있었다. 두 사람 관계로 스트레스를 받는 게 그 증거였다. 그만큼 반휘혈과 서이나는 한도훈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생각해, 생각해야 돼.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을.’
그래서 한도훈은 우선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았다. 가장 근본이 되는 문제부터 차분히 생각을 해야 했다. 당장의 상황만 넋 놓고 바라봐선 안 된다.
반휘혈과 서이나의 사이가 멀어졌다.
그 이유는?
집들이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
그게 무슨 일인가?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예상 가는 범위는?
한도훈은 최근 보았던 반휘혈의 얼굴을 떠올렸다. 서늘히 가라앉은 그 얼굴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아.”
한도훈은 번뜩 눈을 떴다. 기억났다. 그것은 분명…,
‘휘석이 형이 군대 갔을 때.’
분명 반휘혈은 그때와 비슷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반휘혈이 거절당했다는 것.
그렇다면 고백이 거절당했나?
아니, 그건 아니었다. 고백을 거절당했다고 보기엔 서이나의 행동이 너무 담백했다.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고백을 받은 모습은 아니었다. 서이수만큼은 아니어도 서이나도 거짓말을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한도훈은 확신했다.
‘그렇다면….’
가능성, 있나?
한도훈은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가늠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만들자.’
그 상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