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우당탕탕 체육 대회 (11)
더 이상 방관만 하는 건 그만두겠다. 서이나가 또 거절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어차피 이렇게 어정쩡하게 거리를 방치했다간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진다. 그러니 그럴 바엔 아예 반휘혈의 마음을 자각시키는 게 빠를 것 같았다. 반휘혈은 한번 작정한 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놈이니 그 이후엔 알아서 잘 하겠지. 그러니 한도훈은 재차 결심했다.
‘후후…. 그래, 반휘혈. 누가 이기나 보자.’
그렇게 한도훈의 반휘혈 고백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저 둔해 빠진 놈이 아무리 직설적으로 얘기해도 들어먹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한도훈은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감정 중 하나.
그것은 바로 질투였다. 이른바, 반휘혈 질투 대작전! 이 계획의 핵심 요지였다.
마침 체육 대회가 코앞이었다. 그래서 한도훈은 이 점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물론 적당히 무대만 만들어도 충분히 괜찮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도훈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HD 그룹의 자제이자 미래 경영자로서 대충은 없다는 지론에 의해 도방고등학교는 체육 대회 일주일쯤 앞서 큰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한도훈은 찬찬히 계획을 수립했다. 도중에 보이는 여러 변수에 질투 작전을 제외하고 이것저것 다른 계획도 추가됐지만… 뭐, 뭐든 좋은 결과만 있으면 장땡 아닌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연스럽게 작전을 추진했다.
물론 이 작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무대 인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반휘혈을 자극할 수 있는 인원들을 심사숙고 끝에 골라 냈다.
첫째로 이재현. 정말 인정하긴 싫지만 그는 명실공히 서이나에게 예쁨받는 동생이었다. 반휘혈도 그것을 내키진 않아 했으나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후보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김시원. 이번에도 정말 납득하기 싫지만 이 녀석도 예쁨받는 동생이자 인정받은 놈이었다. 이 녀석은 누나와의 사이가 가장 담백해 보일지 몰라도 사실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들만의 유대 관계가 단단히 설립되어 있었다. 대체 어느 세월에 저 둘이 저렇게 친해졌는지…. 아무래도 둘 다 뼛속까지 운동인이라 코드가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래선지 정말 자존심 상하게도 간혹 어떨 땐 자신보다 이 녀석을 더 의지하는 것 같아 기분이 다 나빴다. …아무튼, 이런 점 때문에 이 녀석도 반휘혈을 자극하기에 용이했다.
세 번째론 서이수. 연기를 지나치게 못한 게 흠이었지만 이놈은 절대 뺄 수 없었다. 바로 반휘혈이 노리는 동생 자리를 당당하게 태어날 때부터 차지한 놈이니까. 또 반휘혈이 서이나와 인연을 다지게 된 계기가 서이수인 것을 생각해서라도 뒤로 배제할 수 없었다. 서이수 자신은 그리 자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녀석이 없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설립되지 않는다. 좋아하진 않는 서열 싸움에 연루된 거나 유명해지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서이나가 오로지 동생인 서이수 때문에 이 바닥에 서게 되었다. 이걸 의미하는 바는 굉장히 컸다. 그러니 반휘혈도 그 동생이란 자리에 그토록 집착을 한 거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찬영. 한도훈은 이 자식을 꼭 고용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수없이 번뇌했다. 하지만 그는 같은 반 친구이자 절친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놈이었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반휘혈이 가장 견제하고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티는 거의 내지 않지만 고찬영이 서이나와 함께 붙어 있을 때마다 반휘혈이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걸 포착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도훈은 고민 끝에 그도 채택하기로 했다.
물론 당사자들의 의논 없이 벌인 일이었지만, 어차피 모든 일은 한도훈의 계획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 과정 중에 초반부터 공연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던 서이수는 공연 내용을 듣고는 더 질색해 하며 거절하는 일이 있었지만 뭐, 상관없었다. 제겐 그를 흔들 만한 수많은 당근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는 언제라도 상관없이 별장을 한 달 동안 이용하게 해 주겠다는 거래로 서이수를 낚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른 놈들은…,
‘…이렇게까지 휘혈이를 자극할 필요가 있을까? 근데 확실히 이대로 방치하는 것도 좀 그렇긴 해.’
‘하…. 내가 이번 일 도와주는 건 누나 때문이지. 그 자식 때문이 아니야. 둔한 것도 적당히 해야지.’
공연 준비 도중, 말하지도 않은 한도훈의 의중을 알아서 눈치채 버렸다. 그중에서 특히 고찬영이 가장 불쾌했다.
‘내가 왜 반휘혈을 도와줘야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네~. 그러게 처신을 잘했어야지. 양다리라니, 진짜 한심하다.’
누가 양다리야?! 자긴 여자한테 매번 뒤통수나 처맞으면서! 아, 역시 이 새끼한테 말을 건 것은 실수였다. 한도훈은 대번에 얼굴을 구기며 한 소리 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으나, 고찬영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받아 줄게. 친구님이 원하니까.’
…원한다고? 한도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으나 고찬영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리고 또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난 이런 이벤트 좋더라~. 두근두근하고 좋네!’
한도훈은 그 능청스러운 웃음을 한 귀로 흘리며 그대로 그를 무시했다.
그렇게 서이수만 모르는 작전명, 반휘혈 질투 대작전을 준비한 기간은 단 일주일. 그들은 밤낮 새워 가며 남들 몰래 준비를 하였다. 이재현의 학원 빼기? 그거야 껌이었다. 한도훈의 집안에서 과외를 붙여 주겠다고 하니 바로 OK 사인이 돌아왔고, 김시원과 서이수는 그냥 알아서 빼도 되어서 그냥 뺐다.
서이수에겐 서이나가 도중에 눈치채지 않게 입 간수 잘하라고 얼마나 주의를 줬는지 모른다. 거짓말을 못해도 정말 정도껏 못해야지. 다행히 서이나도 요즘 반휘혈 일로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어서 서이수의 수상한 낌새는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고찬영이야 원래 한량이라 시간이 많았으니, 프리패스. 다섯 사람은 쉴 틈 없이 일주일간 무대를 준비했고, 곧 대망의 날이 찾아왔다.
하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찾아왔다. 반휘혈이 생각보다 이르게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도훈은 거듭 고민한 결과,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기름을 팍팍 뿌려 보자! 반휘혈이 질투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은 이제껏 그를 봐 온 것 중에 가장 짜릿할 테니까! 비록 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한도훈에게 있어서 황홀한 영광이 될 터였다. 그렇게 계획은 이변 없이 진행되었고…
현재 한도훈은 반휘혈이 아닌 서이나에게 목이 졸리고 있었다.
“야, 대답 안 하냐. 한도훈.”
“목…! 모옥…!”
한도훈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의 팔을 연신 두드렸다. 목을 조르는데 대답을 어떻게 해! 다른 놈들은 이미 한도훈을 배신한 지 오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딴청을 부리고 있는 게 한도훈의 눈에 저절로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그래, 풀었다. 대답해, 한도훈.”
한도훈의 항의에 서이나가 그의 목을 풀어 주었다. 숨통이 트이자 한도훈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다가 결연히 말했다.
“몇 번을 물어도 제 대답은 똑같아요. 제가 누나를 사랑하기 때…!!!! 아팟-!!!!!”
한도훈은 또 머리를 한 대 쥐어박혔다. 이걸로 벌써 오늘만 세 번째였다. 한도훈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를 감쌌다. 한도훈은 자신만 홀로 구박받고 있는 처지가 속상하고 서운하고 슬펐지만, 참아 냈다.
“어째서 믿어 주지 않는 거죠?!”
누나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몰라주다니! 한도훈이 눈물을 대롱대롱 단 채 눈을 치켜떴다. 서이나는 그런 한도훈에게 냉정히 말했다.
“영혼이 안 느껴져서.”
“아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언제나 진심으로 그녀를 대했던 만큼 한도훈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게 다 저 좋자고 하는 게 아니라 누나를 위해서인데! 그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꾹 눌러 담으며 시선에 설움을 가득 담고 그녀를 보았다.
“야, 다짜고짜 상황 설명도 안 하고 날 사랑해서라고 하면 퍽이나 믿겠냐고.”
그러나 서이나는 인상을 대번에 찌푸리며 반박했다. 그렇다. 사실 한도훈이 이렇게까지 구박받는 것은 내밀한 사정 따위 다 생략하고 ‘제가 누나를 사랑해서 이런 걸 준비했어요.’라고 뭉뚱그려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기회를 더 주었지만 반복되는 상황에 참다못한 서이나가 주먹을 든 것도 그 탓이었다.
“우우-. 하지만 그게 맞는걸요-.”
“너, 이 새끼….”
하지만 한도훈은 끝내 숨겨진 진실을 입에 올릴 생각이 없었다. 특히, 서이나가 진실을 알게 되면 대번에 도망칠 테니까! 한도훈은 서슬 퍼렇게 다시 다가오는 서이나를 빠르게 피하며 외쳤다.
“전 틀린 말 하나도 안 했어요!”
“야!!!”
한도훈은 재빨리 경호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대기하던 경호원들이 서이나를 막아섰다.
“크윽…!!”
서이나가 덩치 큰 경호원들에게 막히자 분통의 침음을 흘렸다. 한도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도망쳤다.
“누나, 그럼 이따 또 봐요-! 제 마음 알죠?!”
“몰라-!!!”
“하하, 저도 사랑해요!!”
“귓구멍 막혔냐!!!”
아름답게 퍼지는 그녀의 음성을 배경 삼아 한도훈은 능청스럽게 떠나갔다. 적당히 멀어지자 한도훈은 가림막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넌 진짜 나한테 잘해야 된다, 반휘혈.”
내가 이렇게 몸 바쳐 가며 응원하고 있다는 걸 그놈은 알까 모르겠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무대의 여파로 뻐근해진 몸을 쭉 폈다.
***
그래서 한도훈의 작전은 먹혔을까?
“…….”
고오오-.
정답은 먹혔다, 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반휘혈은 얼굴을 스산히 가라앉힌 채 이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무대를 맹렬히 노려보고 있었다.
‘죽인다. 한도훈.’
무슨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짰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따위로 자신을 희롱하다니. 반휘혈의 살의가 뜨거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저 새끼한테 마음대로 하라고 한 게 자신의 실수였다. 아무리 화가 나 이성을 잃었어도 저 새끼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반휘혈은 악물었다. 주먹 쥔 손등과 드러난 팔에는 힘줄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그런 반휘혈의 서슬 퍼런 기세에 그 주위로 아무도 다가올 생각을 못 하며 점점 멀어졌다.
“…….”
그러나 단, 한 명. 예외는 언제나 있었다.
‘난 왜 여기 있는 거지.’
얼결에 그의 곁에 있던 주연희는 땀을 뻘뻘 흘린 채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