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우당탕탕 체육 대회 (12)
***
주연희가 반휘혈을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으….’
주연희는 더부룩한 속을 부여잡은 채 홀로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체하다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는 피로한 눈가를 꾹꾹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을 괴롭힌 가해자가 퇴학을 당한 이후, 그녀의 환경도 변하기 차츰 변해 갔다. 가장 먼저는 반 아이들의 변화였다.
‘연희야, 필요한 거 있어?’
‘아, 이거 도와줄까?’
그들은 언제 자신을 외면하고 따돌렸냐는 듯 자신에게 관심을 표했다.
‘불편해.’
그것은 현재 그녀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홀로 고립되었던 2개월의 시간은 주연희에게 있어서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가해자가 잡히면서 아이들은 변명을 시도하며 자신에게 접근했다. 자신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둥 같이 괴롭힘당할까 무서워 그랬다는 둥….
그 말을 듣던 그녀의 기분은 어떠하였던가.
주연희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응. 이해해.’
번뇌의 시간은 짧았고, 행동은 단순했다. 그것은 그녀가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연희는 제게로 다가오는 이들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외로우니까.
홀로 있던 그 시간이 지독히도 고독했고 또 괴로웠다. 가식이어도 좋았다. 그것이 제가 아닌 저를 도왔던 서이나라는 인맥을 탐내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들과 함께 지내되 선을 그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또 배신할 이들이었기에 마음을 그리 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주연희는 겉으로 보기엔 일상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늘같이 반이 단합하여 어울리는 날은 조금 무리였나 보다. 결국 먹던 게 체해 버리고 말았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주연희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도 언니랑 얘기하니까 좋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여전히 멋진 사람이었다. 주연희는 경기를 휩쓸고 다니던 서이나의 활약을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 좀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서이나는 금방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쉽지가 않았다. 덕분에 아쉬움을 안고 속으로만 인사를 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걔는 어디 간 걸까?’
어느 순간부터 보이질 않던 남자아이. 반휘혈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는 언제나 차갑고 과묵하지만,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큰 버팀목이 되었던 이여서 그런지 자꾸 눈길이 가는 것 같았다.
‘…아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긴 한데.’
하필 속이 안 좋아지기 시작할 때 들려온 이야기라 제대로 듣질 못했다. 주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털어 버리며 양호실의 문을 열었다.
“어…?”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주연희는 눈을 크게 떴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커튼. 그 창가에 기댄 채 서 있는 커다란 장신. 그리고 칠흑 같은 머리칼과 그 사이로 가려진 눈이 창밖을 보고 있는 그 모습은 순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주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그 장면을 보았다. 가벼이 흔들리는 커튼과 뺨을 간질이는 바람은 가슴팍에까지 순풍이 닿아 오는 것만 같았다.
“…….”
반휘혈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을 보곤 눈매를 살짝 좁혔다.
“아…! 아, 안녕!”
주연희는 그가 자신을 보자, 그제야 잠시 놓았던 정신을 되돌렸다. 그녀는 잠시 동안 넋 놓고 그를 보았단 사실이 무안했다. 설마 방금까지 떠올리고 있던 사람을 이렇게 만날 줄이야.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상황을 모면하고자 주연희가 시선을 방황시키며 멋쩍게 인사를 하자 반휘혈의 시선이 잠시간 그녀에게 머물더니 다시 밖을 향해 돌려졌다.
“어, 음…. 저, 저기 너도 어디 아파서 온 거…야? 그으… 저기, 양호 쌤은 어디로 가신지 알아?”
사실 전혀 아파 보이진 않았지만 주연희는 예의상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현재 부재중인 양호 선생의 자리를 힐끗거리며 물었으나 반휘혈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으음. 주연희는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익숙하게 약을 찾아 꺼냈다. 소화 불량으로 한두 번 찾아온 게 아니다 보니 이미 어디에 필요한 게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방명록에도 자신의 이름과 온 사유를 적고 약을 먹었다.
휴-. 아직 약발이 돌지도 않았는데 조금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바로 나갈까 하다가 문득 반휘혈이 보고 있는 방향이 신경 쓰였다. 주연희는 우물쭈물하며 슬쩍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하곤 아, 하고 감탄사를 내보였다.
“언니 진짜 멋있었지?”
주연희의 눈이 반짝 빛났다. 400m에서 보인 평범한 인간을 벗어난 듯한 인내심도 대단했지만, 그 이후에 보인 피구에서의 활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기 내내 수비 쪽 곳곳에 배치된 운영 측 인력의 훼방은 꽤나 까다로웠다. 돌발적으로 물풍선을 던지는데 그게 피구 공인지 물풍선인지 구분이 가질 않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주연희는 일찍이 공을 맞고 아웃을 당했었지만 안에서 공격수를 유지하는 입장들은 아니었다. 물풍선에 맞으면 아웃이 되진 않았지만 그 타격과 터지면서 옆으로 튀는 물줄기에 다들 움찔거리기 일쑤였고 그것은 그 대단한 일진들도 예외 대상은 아니었다.
서이나 측 팀도 그 훼방에 처음엔 주춤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익숙해져선 오히려 그 타이밍을 노리며 공격을 더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서이나였다. 작은 몸으로 자신의 배는 되는 커다란 남자들을 호령하는 그 모습은 굉장히 전율적이었다. 평소엔 다가가기 쉽고 편한 언니였지만, 그 순간에 보이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가히 일반인이 보이기 힘든 분위기였다. 주연희는 어느 순간부터 멍하니 그녀의 활약을 지켜보다 자기 팀이 아니란 것도 잊고 응원을 할 정도였다.
자신도 이러할진대, 오로지 언니만을 바라보는 반휘혈은 오죽할까. 주연희는 반휘혈이 경기에 나서지 않았던 건 아마 서이나와 싸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지금도 보아라. 현재 그가 보고 있는 대형 스크린에선 오전에 치러졌던 경기의 활약상이 정리된 내용들이 다시 나열되고 있었다. 그곳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당연히 서이나였다.
반휘혈은 커다랗게 잡힌 서이나의 얼굴을 빤히 보며 툭, 하고 머리를 벽에 기대었다. 바람이 살랑거리며 그의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언뜻 스친 그의 입가에선 서이나가 우승에 기뻐하며 환호하는 그 순간에 자그마한 미소가 설핏 어렸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주연희는 그 모습을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러한 스스로의 시선을 눈치채곤 화들짝 놀라 시야를 돌리면서 볼을 훔쳤다.
‘…그러고 보니 나에 대해 알려 달라고 했던… 그 말은 무슨 의밀까.’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문득 그녀는 이전에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마침 지금이 기횐가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있잖아. 이전에 나한테 나에 대한 걸 알려 달라 했던 거… 그건 무슨 의미였어? 아, 오해하는 건 아니야! 너한텐 언니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
그녀의 질문에 스크린으로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하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무감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지나치게 서늘한 기운이었다. 주연희는 생각지 못한 그 차가운 시선에 움찔 몸을 떨며 말하던 입을 굳혔다.
“별거 아니야.”
“어?”
그런 중 반휘혈이 입을 열었다. 주연희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뒤늦게 그게 무슨 의민가 곰곰이 생각했다. 딱 잘라 말하는 게 굉장히 단호한 느낌이라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딱히 의외인 건 아니었기에 눈을 멀뚱히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나도 별거 아닌 거 아는데…. 그,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
…어라? 어쩐지 입으로 직접 말하고 있으니 가슴이 쿡쿡 찔렸다. 하지만 기분 탓이라 느끼며 훌훌 털어 낸 채 더 밝게 재차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반휘혈은 잠시 그녀를 가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숨을 작게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거슬려서.”
“……거슬려?”
쿵, 어쩐지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자신은 그때 그에게 방해가 되었던 걸까. 그라면 자신이 왕따를 당하든 안 당하든 별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더더욱 위안이 되었던 건데.
‘나는 무슨 오해를 했던 거지.’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면서 부끄러움이 온몸을 감쌌다. 붉어지는 얼굴을 감출 새 없이 달아올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눈에 자꾸 띄니까, 거슬렸어.”
“…어?”
그러나 이어지는 반휘혈의 뒷말이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시선이 가는 곳에 네가 있었으니까.”
반휘혈의 시선은 여전히 밖을 본 채였지만, 그의 말은 확실히 주연희를 향하고 있었다.
읏, 주연희는 그 말에 부지불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것은 방금과는 명백히 다른 기분이었다. 그녀는 왠지 시선을 둘 바를 못 찾고 방황시키며 초조히 손을 움켜쥐며 외쳤다.
“바, 바보! 내가 아니라 어, 언니겠지!”
지금도 봐!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 시선은 확실하게 서이나가 나오는 스크린을 향하고 있질 않은가. 제게 향하는 그 말이 별거 아님을 알면서도 자꾸만 더워지는 얼굴에 억지로 손으로 부채질했다. 반휘혈은 그런 그녀의 말에 갸웃,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인데.”
“으극…!”
저, 말 좀…! 원래 저런 애였나?! 주연희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라 눈만 데록 굴리다 곧 뒤이어 이어지는 반휘혈의 말에 몸을 뚝 그치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어?”
반휘혈은 벽에 기대던 몸을 떨어트렸다.
“이젠 다 상관없어졌어.”
그리고 그는 주연희의 곁을 지났다. 주연희는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멀거니 보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곤 그 뒤를 쫓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그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주연희는 자꾸만 알쏭달쏭한 얘기를 하는 반휘혈의 태도가 자꾸만 아리송했다. 하지만 반휘혈은 더는 할 말이 없었기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밖을 향했고….
고오오-
“…….”
“…….”
현재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