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이게 무슨 개판인지 (1)
주연희는 험악한 반휘혈의 분위기에 땀을 삐질 흘렸다.
‘역시 얜… 이나 언니를….’
아니, 그게 당연한 거다. 그녀가 봐 온 그는 언제나 서이나를 중심으로 돌아갔으니. 주연희는 어쩐지 입 안에 쓴맛이 도는 듯했지만 의식지 못한 채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반휘혈은 현재 기분이 심히 안 좋았다. 이렇게 불쾌한 건 또 처음이었다. 그는 너무나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한 기분도 들어 실소마저 터질 것 같았다.
“…….”
하나 그를 감싸는 건 고요한 침묵이자 무거운 분노였다. 그는 얼굴을 살벌히 가라앉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한도훈이 이러한 계획을 꾸민 것보다 그를 가장 화가 나게 만든 건 서이나의 반응이었다.
‘그 반응은 대체 뭐야.’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하는 다섯 사람의 그 고백 같지도 않은 고백에 설레는 듯 보였다. …실상 얼굴이 빨개진 건 당혹감에서 나오는 분노로 인한 열이었지만, 반휘혈이 당장 그 사실을 알 방도는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
특히 그 자식. 같은 반이랍시고 늘 같이 다니는 것도 거슬렸는데 이번엔 그 뻔뻔한 낯짝을 누나한테 들이대다니. 그리고 …뭐, 흔적을 만들어? 그리고 거기에 또 얼굴을 붉히는 건 또 뭔지.
이번에도 서이나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가 당황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애꿎은 반휘혈의 화풀이가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하나 반휘혈은 그러한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이를 아득 깨물었다.
‘한도훈, 진짜 죽여 버리겠어.’
그리고 그 방향은 끝내 이 계획의 주체자인 한도훈에게 향했다. 그 섬뜩한 살기가 순간 한도훈에게 끼쳐 그가 몸을 섬찟 떠는 일이 일어난 건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다고 한다.
복장이 뒤집힐 것 같은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전신을 덮었다. 어디로 튈지 몰라 반휘혈의 끝없는 인내를 발휘하고 있을 때였다.
“아.”
“…….”
설상가상으로 그의 속에 불까지 지를 인물이 나타났다. 반휘혈의 짙은 눈동자와 누구의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 딱, 하고 부딪혔다. 동시에 너 나 할 것 없이 두 사람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재수 없게시리….”
최강혁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흩트리며 혀를 찼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저 낯짝을 눈앞에서 없애고자 떠나려는데, 가냘픈 미성이 그의 발을 잡았다.
“어, 너, 넌…??”
주연희가 놀라 소리를 지르며 지목하자 최강혁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아, 시발. …너도 있었냐.”
하필 있어도 저 자식까지. 성가신 걸 발견해 버린 최강혁은 혀를 쯧, 차며 귀찮다는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고 여실히 드러냈다. 주연희가 그 말에 울컥해 볼을 부풀렸다.
“잠깐. 그거 무슨 뜻이야?”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웬 시비인가! 주연희의 심통맞은 얼굴을 본 최강혁은 더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무시한 채 그들을 지나려 했다.
“꺼져, 최강혁.”
우뚝. 그러나 군말 없이 떠나려던 최강혁의 발걸음을 사로잡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최강혁은 돌아서려던 발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뭐라 했냐, 반휘혈.”
“그 귀는 장식인가? 꺼지라고.”
“…….”
“…….”
휘이잉-. 주연희는 순간 팔을 쓸어내렸다. 어라, 지금 여름 아니었던가? 왜 갑자기 북풍의 설한이 느껴지는 걸까. 그녀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며 바쁘게 눈을 굴렸다.
“하… 시발. 마음을 곱게 처먹으려고 해도 별….”
최강혁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그러자 반휘혈이 픽, 하고 조소를 그리더니 싸늘한 시선으로 최강혁을 보았다.
“개소리.”
“…….”
휘오오오-. 차가운 바람이 거세졌다. 이 순간 주연희만 눈치챈 하나의 사실이 있다.
‘이거 혹시… 화풀이?’
어쩌다가 줄곧 반휘혈과 같이 있게 된 그녀의 잠자던 눈치가 생존 본능에 발버둥 치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연희는 반휘혈이 최강혁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음을 빠르게 눈치챘다.
‘어, 어쩌지…?’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주연희는 서릿바람이 부는 두 사람의 사이에 두 눈만 데록 굴리며 초조하게 발을 굴렸다.
“너….”
최강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울컥 치밀고 올라오는 화에 최강혁의 눈빛이 더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스산히 반휘혈에게 다가갔다.
“…아?”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최강혁의 발이 돌연 멈췄다. 무언가 생각이 스친 듯했지만 그게 무언지 짐작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오래지 않아 최강혁의 입 밖으로 내던져졌다.
“아-. 맞아. 너 땅콩한테 차였다, 했나?”
큭, 하며 조소를 짓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비꼬기 위한 얼굴이었다. 평소라면 그따위 도발에 넘어갈 반휘혈이 아니었으나…,
“…누가 차였다고?”
사안이 사안이라 제대로 걸리고 말았다. 반휘혈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지며 최강혁을 노려봤다.
“누구긴. 너지, 너. 내숭 존-나 떨더니 결국 까발려졌냐?”
최강혁은 반휘혈을 한껏 이죽거렸다. 누가 그 또라이랑 소꿉친구 아니랄까 봐 이 새끼도 땅콩 앞에서 갖은 내숭을 떨던 게 꽤나 아니꼽던 최강혁이었다. 물론 다정한을 통해 반휘혈이 서이나와의 관계를 거부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강혁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는 반휘혈을 잔뜩 약 올릴 구실이 필요한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그 입, 닥쳐.”
반휘혈이 그 앞으로 척, 걸어갔다. 그의 눈에 명백히 살기가 더해졌다. 최강혁은 피식, 냉소를 흘리며 눈썹을 기울였다.
“싫은데?”
“…….”
후-. 반휘혈은 잠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직후,
빠악-!!!!!
“꺄아-!!”
주먹이 최강혁의 얼굴로 직격했다. 갑작스러운 폭력의 현장에 주연희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정작 강한 힘에 얼굴이 돌아간 최강혁은 몸을 잠깐 휘청이더니,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제 볼을 쓸었다. 무감한 얼굴이 흐르는 피를 만졌다. 그리고 픽, 웃더니 최강혁은 걸치고 있던 긴 팔 집업을 어느 한편에 던졌다.
“넌 뒤졌어.”
옷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그가 빠르게 발을 박찼다. 스산히 가라앉은 얼굴엔 더 이상 미소는 없었다.
“으붑…!”
두 사람이 격돌하던 그 순간, 주연희는 갑자기 날아온 무언가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커다란 천 같은 것이 온몸을 덮자 그녀의 손이 방황했다.
‘뭐, 뭐야,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반휘혈과 최강혁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려는 순간에 시야가 가려져, 지금 그녀로서 파악할 수 있는 건 이 천 너머로 들려오는 소음이 다였다. 퍽, 빡, 뻐억-!! 보이지 않지만 살벌한 타격음이 요란하게 오가는 것만은 확실히 들렸다. 주연희는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자신을 뒤덮은 천을 벗었다.
“푸하-! 어, 어…?”
그리고 주연희는 시야가 해방되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즉각 입을 벌렸다. 싸움에 대해 일절 모르는 그녀였으나, 눈앞에 보이는 화려한 싸움은 그녀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 그들 사이로 주먹이고 발이고 오가는 게 지나치게 가감이 없었다. 이런 쪽으로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한 대 잘못 맞으면 정말 뼈가 나갈 것만 같은 묵직함이 여실히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그녀 혼자선 저 두 사람을 말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그들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저기, 저 두 사람 같이 말려 주세요!”
“…예? 미, 미쳤어요?!”
“도와주세요!”
“이 재밌는 걸 왜 말려? 이상한 여자네.”
그 대답들에 주연희는 다시 당황했다. 누가 보아도 저들보다 덩치 큰 이에게 도움을 요청도 해 봤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낯을 질리며 떠나갔고, 어떤 이는 이 재밌는 구경거리를 왜 말리냐고 오히려 주연희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왜 안 말리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주연희의 눈은 당혹감에 흔들렸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았다.
‘다른 사람이 말리지 않으면 나라도 말릴 거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여긴 학교였고, 이런 싸움으로 저 두 사람이 의미 없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얘들아-! 싸, 싸우지 마-!!”
퍽, 빡, 퍼억-!!!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주연희는 첫 시도의 실패에 울상을 지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외쳤다.
“그만 싸워!!! 얘들아-!!!!”
뻐억! 펑, 팍!! 퍽!!
두 번째 시도도 여지없이 실패였다. 주연희는 답답함에 저도 모르게 들고 있는 천을 꽉 쥐며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러면서 여러 번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만류했지만 통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익…!!!”
그것이 계속되니 주연희의 인내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그녀는 얼굴을 심통맞게 부풀리더니 대뜸 그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만하라고-!!!”
“!”
“?!”
한창 주먹을 서로에게 뻗던 그들이 갑자기 난입한 여자애 한 명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를 악물며 공격을 멈추었다.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뛰어들어?!”
공격을 지근거리에서 겨우 멈춘 최강혁이 얼굴을 확 구기며 소리쳤다. 그리고 주연희도 지지 않고 그에 맞춰 대꾸했다.
“그만하라고 몇 번을 말해-!!!”
“네가 무슨 관곈데!! 죽고 싶어 환장했어?!”
최강혁이 성질을 버럭 내질렀다. 주연희는 그 박력에 움찔 몸을 떨었으나, 이내 눈매를 다잡고 당당히 소리쳤다.
“죽기 싫어!”
“그럼 나서길 왜 나서냐고!”
답답한 듯 소리치는 최강혁의 말에 주연희는 곧장 대꾸했다.
“그야 너희들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뭐?”
그 소리에 최강혁의 낯이 벙쪄 보였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릴 다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지 않아 또 다른 난입객에 의해 그의 정신은 금방 되돌아왔다.
“……혁아?”
***
그리고 한편, 이런 소란이 벌어진 와중 운동장 어느 한쪽에선…
“야!!! 대박!!! 최강혁 깔이 나타났대-!!! 그것도 삼각관계래-!!!!”
“푸웁-!!!!!”
난데없는 괴소문에 마시던 물을 뿜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