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19화 (219/306)

220. 이게 무슨 개판인지 (3)

…삼자대면이 아니라 사자대면이었구나.

나는 잠시 이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고파 눈을 흐렸다. 하지만 조용히 있고픈 내 간절한 마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 혼자 있을 때면 모를까, 고찬영과 다른 아이들까지 함께 움직이니 이쪽으로도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혼자 올걸.’

이런 관심, 반갑지 않다. 고찬영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어서 그런지 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소란이 일어나도 저들은 우리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역시나 인소 남주와 서브 남주, 그리고 악역답게 미친 마이웨이였다. 주연희는 인소 속 여자 주인공답게 둔했고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눈치 백 단인 고찬영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재밌는 걸 목격한 것처럼 웃고는 제 검지를 입에 대 가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말란 것처럼 주변의 학생들에게 무언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집단 최면이라도 당했는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이라도 반응이 튀어나올 것 같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서 나를 포함한 서이수와 아이들이 질린 시선을 보냈지만 고찬영은 일절 신경 쓰지 않고 해맑게 웃어 보였다.

“…백장미.”

기나긴 침묵 끝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최강혁이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전에 없이 차분했다. 인파 속에 숨어 있어서 그런지 앞사람 의해 최강혁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과연 최강혁은 대체 무슨 말을 할까. 최강혁이 왕따 사건의 내막을 파악한 이후로 두 사람이 만나는 게 처음일지도 모르는 걸 생각하면 묘하게 그에게 시선이 갔다.

“네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무뚝뚝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생각보다 침착한 대응에 나는 샐쭉 눈썹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참을성 좋은데?’

…혹시 진짜 첫사랑인가? 보통 인소 악역이 그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던가. 그 최강혁이 첫사랑이 있단 게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방금 보인 차분한 대응은 그런 의심이 들게 만들었다.

“왜긴. 당연히 널 보러 온 거지.”

백장미가 최강혁의 말에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누가 들으면 정말 여자 친구인 줄 알 정도로 친근하면서도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상기된 채로 화사하게 꽃을 피워 내며 웃는 모습은 가히 뭇 남성들의 심장을 부여잡게 했지만,

“으웩.”

나는 아니었다. 내숭 한번 장난 아니네. 소름이 돋은 팔을 북북 쓸어내는데 최강혁이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

쩌적. 냉정하다 여길 정도로 단호한 대꾸가 던져지니 백장미의 미소에 금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나는 쌤통이라고 여기며 평소엔 얄밉기만 한 놈이긴 하나, 지금만큼은 최강혁에게 박수를 보냈다.

“…후후, 너도 참. 짓궂긴.”

하지만 백장미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금세 평상심을 되찾곤 뻔뻔하게 대응했다.

“진심인데.”

그러나 역시 최강혁. 짧은 대꾸지만 아주 철저한 철벽을 보였다.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나, 이 부분에선 역시 백장미가 한 수 위였다.

“넌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구나? 그런 점도 역시 좋지만.”

백장미가 봄바람이 휘날리는 것처럼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와….”

그 모습은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저건 최강혁이란 사람을 잘 알지 못하면 누구나 다 속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최강혁의 대응은 모두 진심이었을 테지만 백장미의 자연스럽고도 낯 두꺼운 행동은 선을 그으려는 최강혁의 의도완 반대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

졸지에 솔직하지 못한 놈이 되어 버린 최강혁이 인상을 살풋 구겼다. 설마 백장미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지 예상 못 했나 보다. 하긴, 그 누가 최강혁을 이렇게 대하겠는가. 왠지 이번엔 최강혁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방금 이상한 소릴 들었는데.”

최강혁이 입이 막힌 틈을 타 백장미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주연희 쪽을 보더니 곤란한 것 같은 얼굴을 지어 보였다.

“혁이 너한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게 정말이야?”

감히 나를 두고? 라는 뒷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아니지? 혁아.”

그러곤 그녀는 조금은 초조한 듯, 불안한 듯한 시선으로 최강혁을 보고 있었다.

‘와, 저거 연기면 진짜 여우 주연상감이다.’

물론 저게 진심이어도 내겐 가증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백장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입장이었으면 저 여자애에게 상처를 준 최강혁을 속으로 한껏 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백장미는 최강혁의 청초하고도 아름다운 여자 친구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사귀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 바탕에 깔린 건 제삼자가 듣기에 오해하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최강혁은 이 부분에 대해선 꽤나 둔감한 모양인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또 그가 주목한 건 그 포인트도 아니었다.

“…여자 친구?”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목소리였다. 그의 시선이 백장미가 바라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백장미가 보던 이를 발견하곤 곧장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쟤가? 내 여자 친구라고?”

최강혁이 주연희를 콕 지목하며 다시 되물었다. 그 안에 내포된 황당함은 누가 보아도 그 소문이 개소리임을 눈치채게 만들었다.

“……나?!”

그리고 이번 소문의 희생자인 주연희도 화들짝 뛰며 식겁한 듯한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게 무슨!! 오해, 오해예요!!!! 대체 왜 저딴 놈이랑!!!!”

주연희는 칠색 팔색 하며 고개를 내저으면서까지 최강혁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저딴? 야, 그거 무슨 뜻이야.”

그러자 최강혁이 또 이상한 포인트에서 열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거기서 화낼 일이 아니잖아. 나는 속으로 최강혁에게 딴죽을 걸었으나, 그에게 닿을 일은 당연히 없었다.

“뭐긴! 그야 너 같은 녀석이랑 그렇게 엮이는 게 싫으니까 그렇지!!”

그렇지만 주연희도 만만찮은 아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싫은 것처럼 몸을 파드득 떨며 최강혁을 거부했다.

“누군 너 따위랑 엮이고 싶은 줄 알아?!”

얼결에 차인 꼴이 된 최강혁도 언성을 높이며 발끈하기 시작했다. 그는 척척 그녀 앞으로 걸어가더니 인상을 구긴 채 주연희의 이마를 콕 찔렀다.

“나도 너 같은 호박은 죽어도 사양이거든?”

“으악, 호, 호박…? 이익…!!! 누가 호박이야!!”

“흥, 호박이 말도 다 하네.”

주연희가 씩씩거리며 항의하자 최강혁이 한껏 빈정거리며 딴 곳을 본 채 그녀를 무시했다. 갑자기 만담이 되어 버린 그들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게 주인공들의 케미인가….’

순식간에 그들만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게 사랑을 속삭이는 게 아니라 서로 유치하게 헐뜯는 대화란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뭐, 보통 저러다가 정도 들고 사랑도 트긴 한다만….’

나는 흘끗 백장미를 보았다. 그녀는 한순간에 자신이 배경이 되어 버렸단 게 선뜻 믿기지 않은지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훗. 쌤통이구만?’

그 모습에 괜히 내가 기분이 좋아져 히죽 웃으며 몰래 이죽거렸다. 내가 직접 갚아 준 건 아니지만 이건 지난번에 백장미에게 약 올려져 맘속에 남아 있던 짜증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보다 왜 내가 대체 너랑 엮인 건데! 으, 진짜 싫어.”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의 말다툼은 계속되었다. 주연희는 정말 싫었던지 말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 것처럼 팔을 북북 쓸어내렸다.

“그건 내가 할 소리…, 야, 잠깐. 그거 뭐야.”

“음?”

“손에 그거.”

최강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주연희가 들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가 보이는 물체를 발견하곤 반사적으로 탄성을 터트렸다.

“아.”

저게 그 유명한…,

“네가 왜 내 체육복을 들고 있어.”

…최강혁의 체육복이구나.

“뭐? 어…?”

최강혁의 말에 주연희는 그제야 자신의 손에 있는 물체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들고 있던 긴팔 체육복이었다. 이렇게 더운 날 웬 긴팔인가 싶은 생각이 설핏 들었으나…,

“…꺄아!”

체육복이 한순간에 흉물을 본 것처럼 내동댕이쳐져 그런 헛생각 따위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그 돌발적인 행동에 최강혁의 이마에 핏대가 울컥 솟은 게 여실히 보였다.

“왜, 왜 내 손에 네 체육복이 있는 건데!”

“허어?”

주연희는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는지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했다. 최강혁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을 스산히 가라앉혔다.

‘엇.’

나는 그 모습에 손을 움찔 떨었다. 이제 곧 최강혁이 주연희에게 손찌검을 할 타이밍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강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몸에 긴장을 불어넣고 인파를 헤집고 나서려는데,

“하, 시발….”

그의 손은 허공에 잠시 움찔거릴 뿐, 주연희에게 닿지 않았다. 오히려 제 머리로 향해 그 화려한 금발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튀어 나가려던 몸을 곧장 멈추었다.

“으음??”

뭐지…? 나는 의외로운 그의 행동에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평소 그 더러운 성질머리대로라면 진즉에 멱살이라도 잡았을 텐데. 화를 쏟지 못하고 제 머리만 휘젓는 행동은 굉장히 짜증 난 게 여실할 정도인데 그는 주연희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무슨 징조지? 사랑의 전조…라고 하기엔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 안 좋아 보이고. 눈이 게슴츠레 떠지며 그를 살피고 있는데 돌연 고찬영이 의문 어린 탄성을 내뱉었다.

“음?”

작은 소리였으나 거의 내 몸에 자신의 몸뚱이를 기대고 있던 그였기에 그 소리는 내 귓가로 여실히 들렸다. 이번엔 대체 뭔 일인가 싶어 그를 보자, 고찬영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나를 내려다보곤 싱긋, 미소 지었다.

“이런, 들켜 버렸네.”

“응?”

누구한테? 나는 그 능청스러운 말에 눈썹을 기울였다. 그러자 고찬영이 앞으로 보란 듯 눈짓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자…

“으와악-!!!”

“…….”

잔뜩 얼굴을 가라앉힌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반휘혈이 눈앞에 서 있었다.

워, 미친. 깜짝이야! 난데없는 반휘혈의 등장에 내 심장이 쿵쿵쿵 소리를 내며 널뛰었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으니 반휘혈의 언짢은 시선이 내 어깨 언저리에 닿다가 고찬영에 향했다.

쯧.

그리고 무언가 신경질적인 마찰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엇.”

쑥, 하고 갑작스러운 힘에 몸이 이끌려갔다. 어깨에 무거운 짐덩이를 짊어지고 있던 몸뚱어리가 가벼워지자 그 변화를 적응하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왠지 따뜻한 무언가에 갇힌 기분이… 어, 잠깐?! 나는 당황스러움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휘, 휘혈, 휘혈아???”

다른 게 아니라 내가 현재 있는 곳은 반휘혈의 품 안이었으니까!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싶어 부릅뜨며 반휘혈을 보는데 그는 날 보지도 않고 고찬영을 똑바로 노려본 채 서슬 퍼렇게 뇌까렸다.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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