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이게 무슨 개판인지 (5)
분명 내 귀를 막고 있을 때 고찬영의 입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분명 무언가 석연찮은 말을 한 건 분명한데 나에게만 비밀을 만드는 게 굉장히 불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미간을 살풋 구기며 못마땅히 묻자 반휘혈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한순간에 그의 분위기가 평소의 알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흥.”
하지만 그래 봤자 뭐 하나. 반휘혈은 입을 꾹 다물더니 몸을 돌려 버렸다. 이번에도 명백한 무시였다.
…아니, 대체 무슨 의미냐고!
아까부터 나 가지고 내 거네 뭐네 했으면서 저 태도는 도대체 뭔데?! 방금까지 느꼈던 두근거림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영문 모를 그의 행동에 어이가 자꾸만 탈출해 황망히 입을 벌리고 있는데 갑자기 품 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이 타이밍에 대체 뭔가 싶어 확인하자 발신인의 정체는 가히 놀라운 인물이었다.
[반휘혈(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잠깐. 이건 또 뭐야.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내 동공이 자연스레 흔들렸다. 하나, 물어본 이는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잘난 뒤통수를 어처구니없이 보다 그 내용을 떨떠름히 열어 보았다.
[몰라.]
…이거 진짜 뭔데?! 나야말로 네 의중을 전혀 모르겠다! 이 자식아!!!
“흐음-.”
그때, 어느샌가부터 조용히 있던 최강혁이 낮게 숨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러곤 시큰둥히 중얼거렸다.
“내가 할 소리는 아니다만, 완전 골치 아픈 놈들이 꼬였네.”
“……진짜 너한테 듣고 싶지 않다.”
왠지 갑자기 현실 타격이 극심하게 찾아왔다. 결국 몰려드는 자괴감과 피로감에 한 손으론 옆구리를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론 얼굴을 감싸며 허탈히 대꾸하고 있자, 불현듯 내 몸이 또 내 의지를 벗어난 채 쑥 잡아당겨졌다. 떨떠름히 고개를 들자 역시나 보이는 것은 반휘혈이었다.
이번엔 또 뭔가. 이젠 네가 뭐라 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 같다. 내 떫은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반휘혈은 최강혁을 똑바로 노려보며 단호히 말했다.
“접근하지 마.”
하하, 그래, 접근하지… 잠깐. 뭐라고??? 체념이 어리려던 내 얼굴에 뜨악한 감정이 찾아왔다.
“…허?”
그 말을 정면으로 들은 최강혁은 또 어떻겠는가. 그는 제가 들은 것이 순간 분간이 안 됐는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말 걸지 마. 시선 주지 마.”
“……뭐?”
“그냥 관심 자체를 주지 마.”
반휘혈은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처럼 신경을 곧추세우며 최강혁을 경계했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가시 같은 말에 내 낯은 점점 벙찐 표정으로 변해 갔다.
“야, 너 뭔 말…! 으븝.”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항의하고자 입을 열었으나 바로 큰 손에 의해 입이 막혔다. 그 입 다물라는 의도가 여실히 느껴지는 손의 악력에 급습당한 내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대뜸 공격당한 최강혁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이 대체 무언지 좀체 갈피를 못 잡는 듯 오리무중에 빠진 낯이었다. 하나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곧 그 의미를 파악한 듯 최강혁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잔뜩 물들었다.
“허, 시발…? 야, 내가 땅콩이랑 대화하는 게 너랑 무슨 상관….”
“있으니까 꺼져.”
최강혁이 발끈해 대꾸했으나, 단번에 잘렸다. 그러자 최강혁의 이마에 핏대가 울컥 솟는 게 보였다.
“있다고? 하…! 존나 어이가 없네. 그래. 뭔 상관인데?”
별거 아니면 널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살벌한 기운이 피부가 저릿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막힌 입을 떼어 내려다 말고 반휘혈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얘가 뭔 생각으로 이렇게 나오나 진심으로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때 반휘혈이 짚고 있는 내 어깨와 입 쪽에 있던 손길에 힘이 더 깃들어졌다.
그리고 그는 한순간에 폭탄을 터트렸다.
“그야 내 누나니까.”
“…으읍?”
“뭐?”
“엥?”
“으음???”
“????”
그 당돌한 말에 나와 최강혁뿐 아니라 상황을 관전하던 서이수와 아이들까지 반응했다.
“뭐어-?! 야! 너 동생 그만둔다며!!!”
특히 서이수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서이수는 튀어나오며 반휘혈을 향해 눈꼬리를 한껏 치솟은 채 삿대질을 했다.
“그만뒀어.”
“…으잇. 그럼 뭔데?! 왜 그딴 되도 않는 말을 하는 건데? 뭐, 누나랑 사귀고 싶은 것도 아닐 거 아냐?!”
서이수는 성질이 잔뜩 났는지 발을 거세게 굴렸다.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에 반휘혈의 대답도 굉장히 심플했다.
“맞아. 안 사귀어.”
그럼 뭔데?!
“그럼 뭔데?!”
내 생각과 서이수의 말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나도 같이 눈을 치켜뜨며 반휘혈을 보자 반휘혈은 흥, 하고 단조로이 코웃음을 치더니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결혼할 거야.”
“아, 그래. 결….”
…음?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막은 입을 두 손으로 억지로 내리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에게 되물었다.
“야, 잠깐. 잠깐만. 방금 뭐…?”
“겨, 뭐…?”
삿대질을 하던 서이수도 그의 발언에 낯이 아연하게 변했다. 그러든 말든 반휘혈은 낯 하나 바뀌지 않은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짚던 손을 내려 내 왼손을 들어 보이더니 툭, 하고 약지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결혼할 거라고.”
그의 천연덕스럽고도 일방적인 폭탄선언이 교내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폭탄을 직격으로 받은 나는 입을 쩍 벌리며 굳어 버렸다. 이건 뭐지? 이거 진짜 뭐지?! 이, 이것도 혹시 인소의 클리셰… 뭐, 이, 이런 거야…?
‘아니, 내가 언제 이런 걸 바랐냐고…!’
내가 흔히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의 삶을 살짝… 아주 사알짝-! 부러워한 적이 있기야 하다만, 내가 원하는 방식은 이게 아니었다. 대체 정식적인 절차는 다 어디로 내던진 건가. 썸 타고 연애하는 그 기간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냐고! 나는 어처구니가 탈주하는 기분에 입을 뻐끔거렸으나 자꾸만 말이 막혔다. 그러다 두 눈을 질끈 감아 아찔한 시선을 진정시키며 숨을 고른 후 겨우 질문을 하나 던졌다.
“휘혈아, 하나 묻자….”
내 말에 그의 시선이 힐끗 닿았다가 사라졌다. 아니, 저 새끼가? 지금 이 상황에도 날 안 봐? 하지만 이런 걸로 꼬투리를 잡고 있을 정신은 없었다. 나는 못마땅한 시선을 잠시 그를 흘겨 준 후 조용히 물었다.
“너, 그거 언제 정한 거야.”
내 직감이 불길할 정도로 말하고 있다. 이 지독한 마이웨이 인간은 분명…
지잉-.
[반휘혈(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방금]
…방금 정했을 거라고. 나는 그의 입이 아닌 메시지로 온 답을 보며 불현듯 어디선가 혈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지독한 세계의 지독한 새끼였다.
***
파삭, 금속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스쳤다. 하나 수많은 군중 속 그 누구도 그 기묘한 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단, 한 존재를 제외하고서. 영롱히 빛나는 금빛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운명을 옥죄는 사슬에 금을 낼 정도의 감정의 격류라….]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종잡기 힘들단 말이지.
하나 의문스러운 말과는 달리 그 음성엔 즐거운 기색이 다분했다. 파멸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의 사슬이 움직였다. 그것은 중심에 선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처럼 기이한 흔들림을 자아내고 있었다. 형체가 불분명한 무언가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것이 네가 원하던 방향인가.]
시프는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에 대한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외계인 씨?”
…않았어야 했다. 시프의 금안이 잠시 크게 뜨였다가 이내 온화하게 휘며 뒤를 돌았다. 그곳엔 자기 얼굴보다 큰 솜사탕 막대를 든 채 휘둥그레한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이윤이 있었다.
“외계인 씨!”
이윤은 그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환히 밝히며 그쪽으로 다가가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다.
“앗.”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앞에 당도한 것은 시프였다. 그는 이윤을 향해 고개를 조용히 내젓더니 작게 속삭였다.
[양반은 못 되는구나.]
하나 우리의 대화는 아직 이르다. 시프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대가 고대하던 결말이 얼마 안 남았다.]
“…결말, 이요?”
이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를 똑바로 보았다.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 하는 듯해 보였으나 시프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낮게 웃음을 흘리더니 툭, 하고 이윤의 이마에 제 형체를 부딪쳤다.
[이번엔 부디 그대에게 만족할 결말이길.]
그 목소리엔 짙은 애정이 묻어났다.
“으음? 무슨 소리예요??”
이윤은 그 말이 무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시프는 금빛의 눈을 휘기만 할 뿐 어떠한 대답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형체를 움직여 이윤의 머리를 한번 훑는가 싶더니,
“앗…!”
사라졌다. 이윤은 입을 삐죽였다.
“뭐어야. 오랜만에 봤다 싶더니, 이상한 말만 하고 사라지고!”
심통맞게 부풀려진 그의 볼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하나 그것은 오래지 않고 풀어졌다.
“윤아! 혁이는??”
뒤에서 황급히 뛰어오던 다정한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을 걸자 이윤은 퍼뜩 생각난 것처럼 눈을 크게 깜빡였다.
“아! 맞아!”
이럴 때가 아니지! 이윤이 급하게 이곳으로 오고 있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제 친구인 최강혁과 반휘혈이 싸움을 일으켰단 소리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윤은 뒤늦게 자신이 온 목적을 다시 상기시키며 들고 있던 솜사탕 막대를 소중히 붙잡은 채 다시 인파를 헤쳐 갔다.
“혁…! 엇.”
“음…?”
그리고 그들이 본 광경은…,
짝-.
청명한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간 반휘혈과,
“정신 차리자, 반휘혈.”
차분한 얼굴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서이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