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23화 (223/306)

224. 이게 무슨 개판인지 (7)

반휘혈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애처로웠으며 그 누구보다 진지했다. 나는 그 빤한 시선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오해 사기 좋은 플러팅 같은… 아니, 플러팅이 맞긴 한데 작업하는 의미의 플러팅은 또 아닌 멘트를 던지는 반휘혈의 모습에 나는 꽤나 당황했다.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낯선 것일까? 자꾸만 정말 고백을 받은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초조하게 잡힌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반휘혈도 그런 내 떨림을 느꼈는지 단단하게 더 마주 잡았다. 그에 왠지 모르게 전기가 오는 것처럼 짜르르한 감각이 팔을 타고 전해지는 그때,

“…미친놈. 아주 꼴값을 떨어라.”

“?!”

혀를 가볍게 차며 끼어드는 목소리 하나가 있었다. 그 소리에 찬물을 뒤엎은 것처럼 정신이 퍼뜩 들었다. 고개를 휙, 돌리자 최강혁이 질린 얼굴로 우리를, 정확히는 반휘혈을 보고 있었다.

“혁아! 쉿! 중요한 순간이라구!! 조용히 해-!!”

“내가 뭐.”

“윤아, 네 목소리가 더 큰 거 같아….”

엇. 이윤이랑 다정한? 언제부터 저기에… 어라, 이윤의 손에 저건 솜사탕인가.

‘솜사탕이 솜사탕을 들었….’

…라고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나는 잠시 집 나간 정신을 서둘러 돌이키곤 휙휙,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나는 숨을 짧게 들이켜며 몸을 경직시켰다. 우리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둘러싼 채 흥미로운 눈으로 구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현재 여기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여기는 학교 운동장 근처이며, 또 체육 대회임을. 그리고 방금까지 반휘혈과 최강혁의 싸움의 여파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몰려 있음을…!!

“!!!!!”

펑-!!!! 그 사실을 깨닫자 내 얼굴은 부지불식간에 타올라 터져 버렸다.

“누나?”

그러나 반휘혈은 주변의 상황은 전혀 눈에 들어오질 않는지 오로지 나만 보며 의아한 듯 나를 불렀다. 나는 차마 반휘혈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속삭였다.

“…어.”

“음?”

반휘혈이 들리지 않았는지 몸을 기울였다. 나는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에 기겁하며 왁 소리쳤다.

“싫다고-!!”

“?!”

내 말에 반휘혈의 눈이 커졌다. 그러곤 못마땅한 듯 낯이 찌푸려졌다.

“왜? 내가 가족이 되는 게 불만이야?”

지금 그게 문제냐! 나는 시뻘게진 얼굴로 반휘혈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수치심 때문에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붙잡으며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불만이고 자시고… 난…. 난…!!”

“…난?”

쉽사리 맺지 못하고 더듬는 말에 반휘혈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손을 뻗어 푹 숙인 내 얼굴에 닿을 즘,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고 버럭 소리쳤다.

“난 나 좋다고 하는 놈이랑 결혼할 거다! 이 망할 동생 새끼야-!!!”

“?!”

그리고 튀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튀었다.

망설이지 않고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부끄러워. 부끄러워. 엄-청 부끄러워…!!!’

나는 창피함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반휘혈 저 녀석은 왜 저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서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가! 왜 이 모든 수치는 내 몫이어야 하는데-!! 앞으로 내 평판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정말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타오르는 볼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힐끗, 뒤를 보았다.

“?!”

동시에 진심으로 식겁했다. 다름이 아니라 뒤쪽에선…

“왜, 왜 쫓아오는 거야-?!”

반휘혈이 빠르게 날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지 마!!”

“싫어!”

“오지 말라고!!”

“싫다고!!!”

저 말 더럽게 안 듣는…!!! 나는 얼굴을 확 구기며 그를 욕했다.

‘안 되겠다. 따돌려야지.’

내 달리기가 비교적 빠른 편이긴 하다만 신장 차이 때문에 언제 잡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만 더 가서 학교 건물 뒤편에 있는 열린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통 1층 창문은 환기를 위해 열어 두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려면 이 사이가 더 메워지기 전에 따돌려야만 했다. 나는 격차가 벌어지지 않게끔 좀 더 발에 힘을 놀렸다. 그리고 코너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돌았고, 반휘혈과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억-!!!”

“커헉-!!!!”

“꺄앗-!!!”

“끄악-!!”

콰당탕탕-!!! 몸이 무언가에 거세게 부딪히며 동시에 바닥을 굴렀다.

“뭐, 뭐야??”

나는 당황스레 눈을 깜빡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눈앞에 나와 같이 구른 듯한 여자와 남자가 세 명쯤 보였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눈을 끔뻑이고 있는데, 옆에서 익숙한 호칭들이 들려왔다.

“…이나야?”

“친구님?”

고개를 퍼뜩 들어 그쪽을 확인하자 그곳엔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안경희와 고찬영이 있었다.

“너희들이 왜 여기에…?”

생각도 못 한 조합의 등장이었다. 저 두 사람이 왜 여기 있는가. 그리고 이 바닥에 나뒹구는 사람들은 또 뭐고. …아니, 낯선 이는 저 세 사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뿐 아니라 주위를 둘러싼 이들이 여섯 사람은 더 되고 있었다. 나는 이 심상찮은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그리고 고찬영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덥석, 내 어깨가 붙잡히는 게 빨랐다. 나는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존재를 겨우 상기해 냈다. 온몸에 오소소 돋은 소름을 느끼며 삐걱거리는 몸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깊이 빡친 얼굴을 한 채 스산히 얼굴을 가라앉힌 반휘혈이 있었다. 고찬영은 갑자기 나타난 반휘혈에 놀란 듯싶더니,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묻고 싶은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친구님.

그의 눈빛에서 그 의중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나야말로 너한테 묻고 싶다.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소리 없이 서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

“…허.”

최강혁은 헛웃음을 흘리며 사라진 서이나와 반휘혈의 자취를 떨떠름히 보다 곧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젠장. 눈 버렸어.”

그는 머리를 휙휙, 헝클이며 몸을 돌렸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짓인가 모르겠다. 갑자기 시비가 걸리질 않나, 난데없이 고백 현장을 보질 않나. 최강혁은 왠지 모르게 더러워진 기분에 혀를 가볍게 차며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의미가 없었다.

‘하여간 그 새끼, 내숭 한번 요란하네.’

언제나 무감정한 얼굴로 감흥 없이 만사를 보던 놈이 좋아 죽는 여자 앞에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온갖 내숭을 부리는 것이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최강혁은 방금의 작태를 다시 떠올리며 으, 하고 질색을 표했다.

‘가족이 되고 싶어서 결혼하고 싶다고?’

미친놈. 최강혁은 질린 듯한 시선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차라리 그냥 고백이 더 낫겠네.”

“응? 뭐라고, 혁아?”

최강혁의 곁을 따라가던 이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혼잣말을 재차 물었다. 하지만 최강혁은 대답하지 않고 못마땅한 얼굴을 짓고는 이윤을 힐끗 보며 시큰둥히 말했다.

“솜사탕이나 먹어.”

이 녀석은 먹어도 꼭 저 같은 것만 먹네. 최강혁은 낮게 코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웅? 아, 그러고 보니 너 휘혈이랑 싸웠다며~? 누가 이긴 거야?”

“하, 그야 당연히… 음?”

멈칫, 성큼성큼 앞을 걸어가던 최강혁의 발이 멈추었다. 그는 불현듯 무언가를 잊은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뭐지. 최강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왠지 기분이 굉장히 거슬리는 게 당장이라도 짜증이 치밀 것 같…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장미 선배도 거기에 있었지? 이상한 소문도 나고 있던데 너희들끼리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

다정한이 마침 떠올랐다는 듯 꺼낸 말에 최강혁은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최강혁에게 완전히 잊혔던 백장미는 치욕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지금 나… 공기 취급당한 거야?’

이 나를? 이 백장미를? 살면서 이렇게 완벽히 잊힌 적은 처음이었다. 하물며 가족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잊힌 적은 없었다. 최강혁뿐 아니라 여기 있던 모든 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주목했다. 자신이 지나가는 모든 길에 시선을 주지 않는 이는 없었다. 백장미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이렇게 완벽히 자신의 존재가 지워진 건 그녀로선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로 인한 당혹감은 꽤나 컸다. 백장미는 있을 수 없는 치욕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티 낼 순 없어 주먹을 꽉 쥐며 떨리는 주먹을 감쌀 때였다.

“큭-.”

“?!”

낮은 비웃음 소리가 그녀의 귀를 강타했다. 군중에 섞인 작은 소리였으나 어쩐지 귀를 사로잡는 소리였다. 백장미는 표독스러운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재빨리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야.”

하나 그곳에 있는 것은 흩어지려는 사람들뿐,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한 이는 없었다. 백장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곳을 노려보았다.

기분 탓인가.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던 걸까. 백장미는 주먹을 잠시 강하게 말아 쥐었다가 숨을 고루 내쉬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완벽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학교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온 그녀였다. 이렇게 정돈되지 못한 행동을 타인에게 보일 순 없는 일. 무엇보다 아직 체육 대회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와 최강혁의 자리를 세간에 더 돈독히 자리를 잡을 기회는 아직 남아 있었다.

‘사랑 없는 결혼이라.’

백장미는 반휘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살풋 미소가 돌았다.

“마음에 드는 말도 할 줄 아네?”

그가 했던 말은 자신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백장미는 여유로운 손짓으로 자신의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언제 기분을 망쳤냐는 것처럼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

그리고 그런 백장미의 뒷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흠.”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이의 두꺼운 안경 너머로 눈이 살짝 좁혀졌다. 백장미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이는 떠나가는 백장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는데 품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어떠신가요.]

도착한 것은 단조로운 한 마디가 적힌 메시지였다. 그 내용을 확인하던 이의 입이 비식, 하고 그 입가가 삐뚜름히 기울였다. 그리고 툭툭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다.

[개판이다]

메시지가 발송되고 화면이 까맣게 점멸했다. 핸드폰을 끈 이는 다시 그것을 품에 넣은 후, 기대어 있던 나무에서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이 학교의 주연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로 향해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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