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FAKER (2)
칼끝에 옷이 걸리는 감각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안경희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그녀는 커터 칼을 든 손을 덥석 잡으며 창백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시, 싫…어!! 그만둬!!”
“싫은데? 야, 얘 팔다리 잡아.”
안경희는 도망치려 했으나 한순간에 팔이 붙잡혔다. 살려 달라 소리쳐 보았으나 이 건물엔 현재 체육 대회로 인해 사람이 없다는 걸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 건물에 있을 모든 인원이 운동장에 있을 테니까! 그것은 안타깝게도 눈앞에 있는 이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지 여유작작한 태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일이 정말 잘못됐음을 느꼈다.
“야, 더 움직이면 찔린다?”
움찔, 거세게 반항하던 안경희의 낯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피부에 닿는 차가운 쇠의 감촉에 바들바들 떨었다.
“제, 제발 그만둬….”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안경희의 몸이 멈추자 칼이 투둑, 하고 섬찟한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경희는 본능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핸드폰 뺏기자마자 이렇게 무력해질 수 있는 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당황스러웠으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속절없이 울고 있기는 싫어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음속으로 자신의 우상을 간절히 그렸다.
‘도와줘, 이나야…!!!’
그 순간,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아주 익숙한, 낮고도 매혹적인 미성이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뭐, 뭣…!!”
안경희는 퍼뜩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희망으로 환히 밝혀졌다.
“차, 찬영아…!!!”
고개를 돌린 그곳엔 고찬영이 2층 창가에서 팔꿈치를 댄 채 싱긋 웃으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경희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고찬영을 보았다. 고찬영은 그런 안경희의 시선과 마주하더니 서서히 미소를 지워 냈다. 그러곤 순식간에 창가를 뛰어넘어 바닥에 가뿐히 착지했다.
“옷 좀 편하게 갈아입으려고 조용한 곳으로 왔더니만-.”
그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터벅터벅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에선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져 그를 지켜보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옥죄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린지 모르겠네?”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고찬영은 그들 코앞까지 다다른 뒤였다. 고찬영은 안경희를 위협하는 팔을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은 스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꽈악, 가냘픈 팔을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꺄아…! 아, 아파…!!!”
여자가 비명과 함께 커터 칼을 놓쳤다. 고찬영은 그것을 감흥 없이 보다 손을 놓았다. 그러자 여자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제 손목을 쥔 채 뒤로 물러섰다.
“왜, 왜 고찬영이 여기에… 있는 거야?!”
“말했잖아? 옷 갈아입으러 왔다고.”
고찬영이 시큰둥히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고찬영의 말대로 그의 옷은 더 이상 무대 의상이 아닌 평범한 체육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 아니, 왜 네가 이 돼지를 감싸는데!”
“돼지?”
그런데 고찬영은 이상한 포인트에서 반응을 보였다. 고찬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휙, 하고 안경희를 돌아봤다.
“푸핫-! 돼지래-!!”
그러곤 빵 터져 버렸다.
“으하하-!! 경희야. 너보고 돼지래. 아, 어떡해. 돼지 돼지. 귀여운 돼지~.”
“우으…. 그, 그만해애….”
고찬영이 친근하게 안경희의 어깨를 감싸며 그 볼을 찔러 댔다. 안경희는 그 장난에 상황도 잊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몸을 물리려 했으나 잡힌 어깨로 인해 쉽지가 않았다. 결국 집요한 놀림으로 인해 심통이 난 안경희의 볼이 부풀어졌다.
“돼지라고 하지 마아….”
“으하하, 미안. 기분 나빴어? 하긴. 그러긴 하겠다.”
고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볼을 양손으로 꾹 눌렀다.
“넌 볼 빵빵한 햄스터가 더 잘 어울리니까.”
“우으…! 그게 므슨 츠으은데에…!”
그게 무슨 칭찬인데! 결국 뚱뚱하다고 놀리는 거잖아! 안경희는 불만스럽게 고찬영을 노려보았다. 하나 고찬영은 아주 당연하단 걸 말한다는 듯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번엔 그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무슨 소리야~. 네 비상식량이 친구님에게 얼마나 유용한데.”
“우…응?”
안경희는 얼굴을 찌푸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비상식량?”
휘둥그레진 시선을 마주하며 고찬영이 싱긋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을 벙찌며 지켜보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야, 잠깐. 근데 저 여자애도 고찬영이랑 친한 거야?”
“그, 그 서이나인가 뭔가랑만 친한 거 아니었냐고.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시발. 우리 지금 좆 된 거냐…?”
눈에 띄게 위축이 된 이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 일행의 모습에 가장 앞에 섰던 여자가 낯을 굳히며 소리쳤다.
“야! 남자 새끼들이 가오도 없게! 겨우 한 명을 상대로 뭘 쫄아?! 고, 고찬영이 뭐 대수라고! 이젠 사대천왕도 아니잖아. 아, 혹시 그거 아냐? 이제껏 사대천왕 자리도 그 허울 좋은 꼴로 운 좋게 자리 잡고 있었을지 또 알아?”
‘아닌데.’
안경희는 떨떠름히 부정했다. 고찬영의 실력은 사대천왕이란 자리에 앉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상황이 좋질 못해 불명예처럼 허무히 내려가고, 그 이후 행보가 미미했으나 실력이 퇴보한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안경희는 슬쩍 고찬영을 보았다. 고찬영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달며 그들의 헛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 그것도 그렇네? 그럼….”
무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나 안경희는 이 싸움의 승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고찬영에게 향했다.
“흠-. 뭐, 좋아.”
고찬영의 그들의 변화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그리고 그의 낯에 어린 건 예리한 빛을 띠는 짐승 같은 호기로운 미소였다.
“기분 좀 거지 같았거든.”
그것은 평소 유들거리는 미소를 짓던 때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안경희는 간접적으로 퍼지는 위압감에 순간 몸을 떨었다.
한순간에 일변한 분위기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것이 공포라는 걸 바로 눈치채는 이들은 없었다. 그만큼 그것은 찰나였고,
“자, 그럼 누가 먼…,”
“억-!!!”
“커헉-!!!!”
“꺄앗-!!!”
“끄악-!!”
콰당탕탕-!!!
누군가가 그 자리에 탄환처럼 뛰어드는 것도 한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순식간에 일타쓰리피를 날린 그 정체는,
“뭐, 뭐야??”
바로 방금 전, 안경희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그리던 이였다.
***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였다. 안경희는 닥쳐온 현실에 눈동자를 심히 요동시켰다.
‘크, 큰일이다.’
서이나가 반가웠다. 그녀의 우상이 혜성처럼 나타나 줬는데 어떻게 반갑지 않을 수가 있는가.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곧 안경희의 머리가 비상하게 경고를 보내왔다.
두려움과 반가움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서이나가 조커란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점…! FAKER의 사이트장이자 그녀의 열성 팬인 안경희의 몸에선 식은땀이 뻘뻘 나오기 시작했다.
‘화, 화내겠…지?’
자신의 우상은 자신의 사람에게 닥쳐온 불의를 못 보는 타입이었다. 서이나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 상황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고, 당연히 얼굴 따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상대하려 들 확률이 높았다.
‘그럼 안 되는데…!!’
그것은 그녀의 팬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자신 때문에 그 숭고한 정체를 드러내다니! 이처럼 격분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자신 때문에 이리 어이없게 정체가 드러난다면 조커 팬클럽을 탈퇴해야만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또 중요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이나가… 여자를 때릴지도 몰라.’
그것은 서이나의 신념에 위배되는 행위 중 하나였다. 이것을 알게 된 건 순전히 그 곁에서 오래 지켜보다 우연찮게 깨달은 것이었다. 서이나는 여자를 때리지 않는다. 그것도 운동은 해 보지도 않았을 법한 여자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화가 나면 위협을 할지언정, 그것도 최후의 보루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 같은 사람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안경희가 아는 서이나는 그만큼 자신의 사람에게 한없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것만큼은 틀림없는 일인지라 거듭 생각할수록 같은 결론이 나왔다.
이대로 서이나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상황을 알아챈다면… 꽤나 큰일이 벌어질 것임을. 안경희는 상상만으로 심장이 쿵, 떨어질 것 같은 사안에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그런 안경희의 기분을 전혀 모르고 있을 서이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이 어색한 분위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너희들은 뭔데 내 친구들을 둘러쌌냐.”
하지만 말과 달리 그 얼굴은 스산히 가라앉힌 채 이미 답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친구님, 그게….”
고찬영이 그런 서이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지 못하고 막혔다. 고찬영은 열던 입을 다시 닫으며 뒤를 보았다. 그곳엔 안경희가 간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제 팔을 붙잡고 있었다.
‘말하지 말아 줘…!’
“……?”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고찬영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왜 자신을 막는지 모르겠다는 그 얼굴은 방금 화가 났던 여파가 덜 지워져 조금의 짜증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저를 향한 화가 아니었기에 안경희는 조금 무섭긴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았다.
“경희, …둘이 뭐 해?”
“어, 어?! 아, 아니, 그, 그게 어, 어어어 아무것도 아니야!”
주위를 의심쩍은 시선으로 훑던 서이나가 그런 두 사람을 발견하곤 의아한 얼굴을 지었다. 안경희는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붙잡던 손을 파드득 떼어 냈다. 그러자 자신을 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짙은 의문이 깃드는 게 느껴졌으나 이것은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음? 잠깐. 이건 뭐야.”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이 상황을 외면하고 있는데 서이나가 불쑥 중얼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안경희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하다 이내 히익, 하며 새된 비명을 삼켰다.
“…커터 칼이 왜 여깄어.”
서이나의 시선이 더 서늘히 좁혀졌다. 그에 안경희의 심장도 함께 쿵쾅쿵쾅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그냥 바닥에 떨어져 있으면 좋을 것을 하필 또 그 칼날이 의심쩍게 빠져 나와 있었다. 왜 저게 저기에…! 안경희는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느끼며 서이나의 손에서 황급히 그것을 뺏어 갔다.
“그, 누, 누가 떨어트렸나 봐…! 위, 위험하다, 그, 치…?”
누가 봐도 수상쩍게 보이는 행동이었다. 서이나의 시선에 의심이 가득 메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서이나는 조용히 그녀를 보다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잠깐. 경희, 너 옷 그 부분 왜 그래.”
“어, 어…?!”
또?! 안경희는 당황하며 그녀가 바라보는 부근을 더듬었으나, 이상함을 찾지 못하고 손을 방황했다. 서이나는 그런 안경희 손을 붙잡아 치운 후, 그녀의 목 부근을 툭 건드렸다.
“여기.”
“…….”
“왜 이렇게 잘렸어?”
안경희의 목 부근을 보는 그녀의 눈은 건네는 질문과 달리 이미 확신을 하고 있었다. 안경희는 그 무거운 시선에 숨을 짧게 들이켰다.
“경희야.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
서이나가 조용히 뒤를 돌았다. 우드득, 그와 동시에 쇠가 기이하게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시선을 내리자 어느샌가 서이나의 손에 들려 있던 커터 칼이 휘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안경희의 낯은 파리하게 질려 버렸다.
“찬영아. 잠깐 얘 눈 좀 가려.”
최악이었다.
서이나가 고찬영에게 부탁했다. 조금이라도 막아 줬으면 하였지만 그럴 턱이 없는 고찬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안경희에게 다가왔다. 안경희는 당황하며 발을 물러섰다. 그리고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제게 다가오는 고찬영과 서이나를 말릴 기미가 전혀 없는 반휘혈뿐이었다.
“이 새끼들이 지금 누굴 건드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런 쪽으로 평범하고 둔한 안경희에게도 여실히 느껴지는 위압감이었다.
‘아, 안 돼…!’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안경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엇…!”
고찬영이 방심한 것처럼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너희들 다 제삿날… 으억?!”
“이나야, 안 돼-!!!”
퍽-!! 안경희의 몸이 서이나의 배후를 거세게 추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