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29화 (229/306)

230. FAKER (6)

“……!”

그 말에 안경희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그것은 새로운 사실을 접해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일이 들춰지면서 오는 놀라움에 가까운 것이었다. 덕분에 고찬영은 그 모습에 그녀가 자신의 정보를 정말 다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뭐, 그런 거지~. 자, 이런 기분 나쁘고 꿀꿀한 얘기는 그만.”

하지만 그는 이 이야기를 더 이을 생각이 없었다. 말해 봤자 입만 아프고 눈앞에 있는 이는 이미 이런 제 정보를 알고 있었던 분위기였으니 더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알고 있음에도 저를 동정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일절 없었다. 비록 그것이 친구님에게만 신경이 쏠려서 일어난 일일지언정….

고찬영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경기 늦겠다. 이만 가자.”

그는 안경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먼저 몸을 돌렸다. 안경희가 뭐라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입을 벌렸으나, 이내 도로 그 입을 닫았다.

“…응.”

고찬영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았다. 역시 이런 점이 마음 편하다니까. 고찬영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안경희와 함께 다시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들의 사이엔 잠시간 정적이 내달렸다. 소란스러운 주변의 공기는 이질적이기도 하면서 그들 사이의 침묵을 메꿔 주었다.

“저, 저, 저기…!”

그러나 그 침묵은 계속되지 않았다. 고찬영은 덥석 잡힌 그의 옷깃에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어딘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경희가 보였다.

“왜?”

그가 빙긋 미소 지으며 묻자 안경희는 움칫, 몸을 떨었지만 이내 고개를 휙휙 저으며 긴장을 털어 내려는 듯한 몸짓을 하더니, 굳은 마음으로 외쳤다.

“마, 말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네가 바란다면 이나가 원해도 너에 대해 말 안 할게….”

그 소리에 고찬영의 눈이 커졌다. 난데없는 소리에 꽤 놀란 그는 버릇처럼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갈 정도였다. 그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이, 이나가 중요해. 하, 하지만 이젠 너도 중요해. 나, 난 너희들의 우정이 깨지지 않길 바랐고…, 그, 그래서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런 거야. 나, 나 때문에 너희들이 소원해지는 게 너무 싫었는데…, 어, 그, 그러니까….”

그런데 말하면 말할수록 그녀의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던지 안경희의 눈엔 혼란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긴장에 먹혀 되는대로 말을 내뱉는 것 같아 보였다.

“푸핫!”

하지만 그 솔직하고도 투명한 모습은 고찬영의 입가에 다시 미소를 맺히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게 뭐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경희야! 으하하하!!”

터진 웃음에 안경희의 횡설수설이 뚝, 멈췄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한 얘기를 자각했는지 부지불식간에 얼굴이 타올랐다.

“아-. 진짜 친구님도 재밌지만, 너도 볼수록 재밌단 말이지?”

“으우….”

툭툭 건드리는 재미가 있는 그녀의 모습에 고찬영의 입가에 비식비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안경희는 그 모습에 항의 어린 목소리를 냈지만 그는 깔끔히 무시했다.

정말이지, 솔직한 친구 같으니.

그는 잔뜩 붉어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역시 이 학교로 오길 잘했어.’

자퇴가 아닌 전학을 선택한 건 신의 한 수였다. 그녀는 알까, 자신의 삶은 확실히 친구님으로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길이 더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몫도 있었음을. 뿐만 아니라 제겐 좀 틱틱거려도 꾸밈없이 친절한 이혜인도 말이다. 그는 이 투명하고도 어리숙한 친구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뭐, 놀리는 것도 이쯤 할까.’

고찬영은 슬슬 달래 주기 위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도 그렇게 진지하지…,”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에 어떤 인영이 스쳤다.

“?”

안경희는 갑작스러운 그의 모습에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찬영아?”

그러나 보이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굳어진 입매, 확장된 동공. 그리고 한층 창백해진 낯. 그것은 무언가 봐선 안 될 것을 본 듯한 모습이었다.

“차, 찬영아, 왜 그래?”

“…어, 아. 어?”

안경희는 갑작스러운 그 모습에 불안해져 그를 흔들었다. 고찬영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어리벙벙한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였다.

“무, 무슨 일이야…?”

걱정과 불안이 담긴 울망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고찬영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듯한 감각에 경직됐던 몸을 풀어 냈다. 그러곤 다시 흘끗, 제가 향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경희도 그 시선을 따라 옮겼지만, 수많은 인파가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는 게 보일 뿐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

의아한 시선이 다시 고찬영에게 향했다. 하지만 고찬영은 묵묵히 그곳을 보다가 이내 안경희의 시선을 눈치채곤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과 달리 그는 불안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그러한 제 조급한 몸짓을 느꼈지만 몸은 좀체 말을 듣질 않았다. 결국 그는 살풋 얼굴을 굳히며 이제는 사라진 그 인영을 떠올렸다.

검은 머리의 장발, 그리고 안경.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몸집. 그것은 여느 학생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본능이 반응했다. 찰나였지만 그 분위기는 분명….

‘…아니야.’

우연일 뿐이다. 자신의 착각이다. 제가 아는 그 녀석과 방금 그 사람은 머리 길이도, 교복도 달랐다. 무엇보다 그가 저런 교복을 입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본능처럼 쿵쿵 뛰는 심장의 소리를 무시하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리고 그는 불안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안경희를 발견했다. 그에 고찬영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더위를 좀… 먹었나 봐.”

“응?”

그 말에 안경희는 고찬영의 안색을 다시 확인했다. 확실히 그의 낯은 더위를 먹은 것처럼 좋지 않았다.

“빨리 돌아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아, 응!”

고찬영이 말을 돌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안경희는 그 말에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랐다.

“…….”

하지만 안경희는 어딘가 석연찮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가 봤던 그 자리를 보았다. 그곳을 물끄러미 보는 그녀의 시선은 빠르게 주위를 탐색하며 모든 인물을 제 눈과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것은 몇 초 되지 않는 찰나에 불과했다.

“가, 같이 가!”

그리고 안경희는 시선을 거두며 고찬영의 뒤를 황급히 따라갔다.

***

“…….”

나는 현재 굉장히 불편했다. 그 불편한 심리를 반영한 듯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휘혈아, 굳이 여기 이렇게 있어야 하니.”

바로 내 옆에 버젓이 자리를 잡은 반휘혈 때문이었다. 자기 반이 버젓이 있음에도 반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내 옆을 아주 떡하니 차지하는 꼴은 굉장히 당당했다. 누가 보면 이 녀석 반인 줄 알겠다. 하지만 붉은 체육복 사이로 검은 체육복을 입은 그는 굉장히 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휘혈에게 별다른 타격도 없는지 되레 새초롬한 얼굴로 나를 힐끗거리곤 코웃음을 쳤다.

“흥.”

게다가 그는 굉장히 심통이 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불과 몇 분 전의 일.

아까부터 묘하게 부루퉁해져 있는 그의 모습이 거슬렸다. 그 프러포즈 같지 않은 프러포즈를 거절해서 그런 걸까 싶었던 나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며 단호하게 내 의견을 주장했다. 하나 반휘혈이 대답한 건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누나도 똑같잖아.’

‘뭐?’

내가 대체 뭐가 똑같….

‘누나도 화냈잖아.’

‘…어?’

‘거봐. 누나도 똑같이 화낼 거면서.’

‘…….’

할 말이… 없었다. 반휘혈의 말대로였다. 방금 난 안경희가 위협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완전 눈이 돌고 말았다. 반휘혈을 말릴 입장이 못 되었음을 이 순간 제대로 깨달아 버린 나는 한순간에 반박할 말을 잃고 말았다.

‘미안.’

그래서 사과했다. 그나마 할 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자 반휘혈은 날 지그시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결혼하든가.’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그게 이거랑 대체 무슨 연관이 있길래 갑자기 또 결혼이 나와, 결혼이!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시선에 결국 나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싫어.’

또한 그 답은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현재. 그의 심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언짢은 기분은 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혜인이 이쪽을 눈치 보며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제발 어떻게든 해 달라는 분위기가 반에 감돌고 있었다. 결국 난 어쩔 수 없단 심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아-!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잘못했어! 내 주제도 파악 못 하고 멋대로 말한 거 미안하다고!”

“알면 됐어.”

“그럼 화 좀 풀든가!”

“결혼해 주면.”

“그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이 꽉 막힌 놈을 다 봤나.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해?! 나는 당장이라도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답답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아, 됐다, 됐어.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 실랑이는 나의 체념으로 끝이 났다. 나는 뚱하니 턱을 괴며 손을 휘저었다.

“…마음대로?”

그러자 반휘혈이 불쑥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쩐지 포인트가 이상했다. 왠지 불길한 기분에 슬쩍 자리를 무르려는데, 그보다 더 빨리, 공중에서 휘젓던 손이 덥석 잡혔다.

“……?”

아니, 왜 갑자기 손을? 나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보이는 광경에 움찔, 몸을 떨었다.

파아앗-.

갑자기 반휘혈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아니, 표정은 그리 달라진 바 없었으나, 그의 주변을 떠도는 공기가 밝아졌다. 이게 무슨 변환가 싶어 얼떨떨히 보는데 문득 손에서 낯선 악력이 전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잡혔지, 내 손.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설마, 하는 가정이 스쳤다.

‘…얘 혹시 내 손 잡아서 그런 거야?’

에이, 설마. 하고 넘기고 싶었으나 그 생각은 반휘혈의 눈을 보곤 쏙 들어갔다.

“…….”

반휘혈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평소보다 초롱초롱 빛내며 내 손을 조심스레 쥐고 있었다. 그것은 소중한 물건을 쥐는 것처럼 보였고, 또한 그리 원하던 보물을 만지는 손길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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