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31화 (231/306)

232. 이벤트 경기, 스타트! (2)

***

“야, 한도훈!”

한도훈은 스태프와 말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돌렸다. 무대에 오르기에 앞서 우연히 한도훈을 발견한 난 반휘혈을 먼저 올려 보낸 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사뭇 진지했던 한도훈의 낯은 나를 발견하곤 대번에 환해졌다.

“누나~!!”

그는 곧장 총총총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다짜고짜 내 손을 하나씩 잡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누나, 휘혈이랑 결혼한다면서요! 축하해요!!”

“뭔 개소리야!”

팟, 황당무계한 소리에 나는 강하게 손을 뿌리치며 부인했다. 하지만 한도훈은 실실거리는 낯을 풀지 않고 오히려 더 해죽거렸다.

“아이참, 결혼을 하겠다면 말을 하지, 그랬으면 혼인 신고서도 미리 준비했을 텐데~. 앗.”

텁, 한도훈의 작은 머리통이 한순간에 타인의 손에 들어찼다. 그 손은 주인은 바로 나였고, 나는 그 머리를 꽉 쥐며 경고했다.

“우리 1절만 하자.”

“넵.”

고분고분한 그 소리에 나는 혀를 차며 손을 놨다. 하여간 매를 벌어요, 매를. 질린 낯으로 그를 보고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야, 그리고 너 랜덤이라며. 저 명단은 대체 뭔데?”

내가 척, 하고 대문짝만한 명단을 가리키자 한도훈이 그것을 보곤 눈썹을 살짝 기울였다.

“아아. 저거요?”

“그래! 저게 어딜 봐서 랜덤이야?!”

누가 봐도 주작의 흔적이 넘쳐흐르는 명단 배정에 항의를 넣었다.

“무슨 소리예요. 랜덤 맞아요, 랜. 덤.”

하지만 한도훈은 뻔뻔했다.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꼴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나는 얼굴을 팍 찌푸리며 대꾸했다.

“나랑 휘혈이는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애들이 거의 다 나오는 건데?”

그도 그럴 게 대충 훑어만 봐도 익숙한 이름이 빼곡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A 팀 : 반휘혈(1-4), 서이나(2-6)]

[C 팀 : 한도훈(1-4), 안경희(2-6)]

[E 팀 : 김철수(2-1), 고찬영(2-6)]

[G 팀 : 서이수(1-5), 서강이(1-6)]

[H 팀 : 이윤(1-3), 박한별(2-8)]

[L 팀 : 다정한(1-1), 이재현(1-5)]

[O 팀 : 김시원(1-6), 조선지(2-5)]

[Z 팀 : 최강혁(1-1), 주연희(1-2)]

이게 말로만 듣던 올스타전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냥 대놓고 특정인의 명단만 정하고 다른 학생들만 랜덤 돌렸다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 시선을 가로챈 건 Z 팀이었다.

‘하필 쟤네들이 같은 팀이냐고.’

이게 바로 운명이라 이건가? 한도훈의 고의라고 하기엔 그만한 이유가 마땅히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미심쩍긴 하나 나는 그 부분에선 의심의 시선을 거두었다.

“에이, 무슨 소리예요~. 저만큼 투명한 사람이 어딨다고~.”

“너만큼 속 검은 놈이 없을 텐데, 무슨….”

“예?”

“아무것도 아냐.”

한도훈의 말에 무심코 진심이 튀어나왔다. 그가 그늘진 웃음을 띠며 한 반문에 나는 휙,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뭐, 아무튼 먼저 무대로 올라가세요. 전 조금 있다 올라갈게요.”

한도훈은 아직 볼일이 있던 모양인지 나에게 어서 올라가라는 것처럼 재촉했다. 나는 그것을 불만스럽게 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그를 흘겼다.

“너, 이따 두고 봐.”

“우우, 도훈이는 결백하다~!!”

나는 항의 어린 목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성큼 무대로 올랐다.

***

한도훈은 서이나에게 야유를 한껏 보내다 그녀가 사라지자 뚝, 하고 멈췄다. 그러곤 시큰둥히 숨을 작게 내쉬더니 슬쩍 명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재미를 위해 확률을 살짝 손보긴 했지만-.”

설마 나도 저렇게 나올 줄은 몰랐네.

그는 자신도 의외의 결과물을 본 것처럼 말했다. 서이나의 의심대로 한도훈이 명단을 조작했느냐,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사실이었다. 그가 명단을 고정시킨 건 단, 두 팀이었다. 다른 특정 이름들은 그저 관객의 재미를 위해 랜덤 배정 확률만 높였을 뿐, 딱히 고정되게끔 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작정했다면, 명단이 저렇게 나올 리 없었다. 더 자극적이게 만들었으면 몰라.

또한 그의 취향은 참여하는 것보단 위에서 내려다보며 제가 계획한 그림 속에 속한 참여자들의 분투를 구경하는 것을 즐기는 쪽이었다. 저 안에 속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단 뜻이다. 서이나가 이 사실을 들었다면, 거참 취향 한번 고상하다며 질색해 했겠지만 한도훈은 개의치 않고 명단을 다시 훑었다.

“뭐, 그건 그렇고 설마 경희 누나라… 흐음-.”

한도훈은 이번에 제 짝이 된 이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톡톡, 입가를 두드리는 손짓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흥미로운 미소를 입가에 어렸다.

“뭐, 이것도 재밌겠네.”

그는 웃음을 작게 흘리며 핸드폰을 보았다. 그리고 도착한 답신을 확인하곤 짓궂은 미소를 더 짙게 그렸다.

[개새끼 : ㅗ]

욕이 담긴 메시지였으나, 그의 표정은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였다.

“좋아, 여기도 됐고.”

한도훈은 핸드폰을 끄며 관중석의 어딘가를 보았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칼의 소유자는 많은 사람에게 시선을 받으며 당당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한도훈은 그런 그녀를 아니꼽게 바라보며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잘 봐. 백여우. 이건 너를 위한 무대기도 하니까.

한도훈은 지난날, 백장미가 서이나를 찾아갔던 사실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제가 서이나에게 관심을 덜 가졌었던 그 시점의 사각을 이용해 협박의 수단으로 사용하다니. 그것은 제 사람만은 끔찍이 아끼는 그에게 있어서 더없이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엔 제가 그녀에게 굴욕을 선사해 주기로 했다. 한도훈은 가지고 있는 패를 움직이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였다. 이번에 그가 특별히 최강혁을 주연희와 같은 팀에 넣은 것도, 최강혁을 억지로 이 경기에 참여시킨 것도 그 탓이었다.

벌레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던 여자와 어릴 때부터 줄곧 노리던 남자가 한 팀이다. 게다가 매사 불성실한 남자가 이번만은 달리 움직인다, 라.

이러한 상황 속에 과연 백장미는 어떤 기분일까?

한도훈은 비죽 웃음을 흘렸다. 손이 닿을 수 없기에 짓뭉개질 자존심은 가히 짜릿했으니. 무엇보다 앞서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백장미는 방금 전 꽤나 굴욕적인 상황을 겪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앞날의 승리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

“하여간, 한도훈. 사람 귀찮게 만드는 데 선수라니까.”

나는 툴툴거리며 다시 반휘혈 곁으로 갔다.

“누우~나!”

“왓!”

그러다 나는 덥석 끌어 안겨진 몸을 휘청였다. 곧 중심을 잡고 몸을 세우자 내 뒤를 덮친 놈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윤아. 네 팀은 내가 아니잖아.”

“알아요! 근데 반가운걸요~!”

내가 저기로 가라고 손짓하자 이윤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그 티끌 없이 해사한 미소를 떨쳐 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점점 마음이 약해졌다.

“앗.”

이걸 어쩌지, 하고 고민하는 건 짧았다. 다름이 아니라 이윤이 내 손이 아니라 반휘혈의 손에 의해 덜렁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으엥? 아코.”

이윤이 얼떨떨한 소리를 내뱉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반휘혈은 그런 그를 냉담히 내려다보더니 덥석, 내 손을 잡곤 자리를 이동했다.

“음?”

잠깐. …손? 너무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상황을 채 따라가지 못한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지정된 위치에 다다랐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힌 손은 풀릴 줄 모르고 있었다.

“…저기, 휘혈아. 손 좀 풀지?”

내가 잡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반휘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여보세요, 휘혈아? 휘~혈~아~???”

나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눈앞에 대놓고 잡힌 손을 흔들어 봤음에도 불구하고 반휘혈은 여전히 모른 척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 어처구니없이 바라보고 있던 중, 사회자가 마이크를 울렸다.

“슬슬 모든 팀이 다 올라온 것 같군요. 아직 올라오지 않은 팀은… 아, C 팀이랑 G 팀. V 팀, Z 팀인가요?”

나는 그 말에 무대를 보았다. 어느샌가 무대는 참여자들로 가득했다.

“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보며 잠시 감탄했다. 이렇게 모여서 보니 진짜 화려하긴 엄청 화려하네. 학교 굴지의 미남들이 총출동했더니 굉장한 자리가 되어 버렸다. 덕분에 관중석에선 벌써부터 흥분의 소리가 감돌고 있었다.

찬찬히 익숙한 얼굴들을 둘러보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눈짓이나 손을 저어 인사했다. 그러다 안경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모양인지 몸이 어색하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경희야, 도훈이가 있잖아. 너무 긴장하지 마.”

나는 그런 친구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설마 주최자랑 같은 팀인데 별일이야 있으려고. 걱정해야 되는 건 오히려 다른 팀인 내 쪽이었고 말이다.

“으, 응…!”

하지만 대답과 달리 안경희의 낯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멀찍이 있긴 하지만 고찬영에게도 도움을 바라며 그를 찾았다.

“찬영이, 너도 뭐라…! 찬영아?”

그런데 저놈도 뭔가 이상하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멍한 시선과 굳은 낯이었다. 나는 의아함에 그를 재차 불렀다. 그러자 곁에 있던 그의 짝이 내 부름을 듣곤 고찬영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고찬영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퍼뜩 고개를 올리며 남학생을 보다가 그의 설명을 듣곤 내 쪽을 보았다.

“아, 아-. 미안. 뭐라고 했어?”

이쪽을 보는 그의 얼굴은 다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 얼굴을 얼떨떨히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어, 아니, 그냥 경희가 긴장한 것 같길래….”

“경희가?”

내 설명에 고찬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안경희를 보곤 이내 알겠다는 것처럼 빙긋 웃으며 안경희에게 말을 던졌다.

“경희야, 뭘 그리 긴장해~. 한도훈 그 녀석이 네 짝인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너무 굳어 있지 마~.”

역시 저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닌가 보다. 나는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고찬영의 말에 동조했다.

“음…!”

그런데 왠지 안경희의 얼굴은 더 사색이 되어 갔다. 왜 저러나 싶은 순간, 안경희의 짝이자 주최자인 한도훈이 무대에 올라섰다. 그러자 안경희의 낯에 이젠 끝이다, 라는 체념이 깊게 드리워졌다.

‘…뭐지. 이 불길함은.’

뭔가 알고 있는 듯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내 감각은 오래지 않아 곧이어 보이는 광경에 잊히고 말았다.

“아, 좀! 놓으라고-!”

“시끄러-.”

저게 뭐야. 나는 떨리는 동공을 느끼며 입을 벌렸다. 다름이 아니라 최강혁이 주연희의 뒷덜미를 붙잡고 무대에 오르는 그 모습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도망치려던 주연희를 잡아채 억지로 끌고 온 모습이 아닌가.

‘…쟤가?’

쟤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경기에 참여한다고? 나는 순간 찾아온 현실의 괴리감에 표정이 묘해졌다. 본래라면 이런 경기 따위 관심 가지지 않고 그냥 탈주했을 텐데. 나오는 것도 기적인데 저렇게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한도훈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랬다. 그리고 곧 보이는 광경에 나는 짜게 식은 눈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흠~.”

당연하단 듯 바라보고 있는 그 눈빛과 미소. 나는 그것을 보며 하나의 깨달음이 스쳤다.

저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만든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도훈이란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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