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35화 (235/306)

236. 서브 남주나 엑스트라의 운은 믿는 게 아니다. (2)

아니, 그건 그렇고 진짜 어떻게 저딴 선택지만 나올 수 있지? 내 운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반휘혈마저 똥손일 줄이야. 나름 운명의 스케일을 기대하며 나쁘지 않은 선택지, 예를 들어 저기 있는 최강혁과 주연희같이 손잡기 1분, 서로의 장점 세 가지 말하기, 이딴 걸 기대했건만…. 물론 당사자들은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지만, 저렇게 안온한 걸 기대했던 난 피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다른 팀도 이 정도까지 박하지 않았다. 내가 운동에 재능이 없었다면 그냥 한 방에 나가떨어질 엑스트라였을 게 뻔했다. 이 정도까지 오니 이젠 오기밖에 생기지 않는다. 그놈의 운명이 뭔지, 이젠 고집으로밖에 느껴지질 않았다.

‘어차피 저딴 거 나와도 반휘혈 이 자식이랑은 로맨스 기류 하나도 없었을 텐데, 왜 나한테만 이래…!’

해도 해도 너무하단 생각에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옆에 있던 이윤에게 손짓했다. 이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총총총 다가왔다. 얼추 다가온 듯싶자 이번엔 허리를 숙이라고 손짓했다. 이윤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풀썩 내 앞으로 주저앉았다. 나는 그런 녀석의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는 긴 속눈썹이 자리한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갈색 눈동자는 참 예뻤지만… 평범했다.

“흐음.”

역시 지난번에 봤던 그 금색은 없나. 이전에 이윤의 집에서 놀 때도 확인해 봤지만 이번에도 변화는 없었다. 혹시나 시프와 만날 수 있다면 잠깐 한탄이라도 해 볼까 싶던 나는 조용히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우응?? 뭐예요, 누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차피 그와 대화를 해도 다른 놈들은 다 잊어버린다는 그 치트키 설정을 이용 좀 해 보려 했더니, 이번에도 글렀나 보다. 별로 기대는 없었지만 역시 이윤을 보고 있으면 그와 관련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그와의 만남을 기대했건만 그는 내 눈앞에 코빼기도 비추질 않았다.

“왜에요오오~?? 네? 무슨 일인데요~~???”

그런데 이윤은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걸 보니 쉽게 끝낼 모양은 아닌 듯했다. 나는 귀찮음에 얼굴을 살풋 구기며 그 얼굴을 치워 내려 하는데 나보다 더 빠른 놈이 있었다.

“이익…!! 누나, 왜 이딴 놈한테 말 걸어요! 저리 떨어져!!!”

한도훈이 잔뜩 성질을 내며 이윤을 가차 없이 내게서 떨어트렸다. 그는 얼굴을 한껏 구긴 채 내 어깨에 찰싹 들러붙었다.

“왜 친한 척 지랄이야?! 누나한테 접근하지 마!!”

…아니, 너도 좀 떨어져. 나는 소리 없이 식은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우으…!! 친한 척이 아니라 친한 거야! 우이씽, 도훈이는 맨날 나한테 성질이야!!”

이윤은 갑자기 밀쳐져 엉덩방아를 찍자 억울했던지 곧장 반박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한도훈은 가소롭단 듯 비웃으며 그를 한껏 깔보았다.

“하, 착각도 유분수지. 누나가 너랑 왜 친해? 어? 증거 있어, 증거?”

그러곤 마치 친분을 과시하듯 내 어깨에 팔과 머리를 기대며 오만한 자태로 콧방귀를 뀌었다.

“하, 없겠지. 혼자서 제멋대로 착각하지 말아 줄래? 그런 착각에 빠진 네 인생도 참 불쌍하다.”

“?!”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 한도훈을 바라보았다. 평소 한도훈을 아끼긴 하나 이 순간만큼은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고많은 말 중에 이런 막말이라니. 아니, 한도훈 성질머리가 더러운 건 알고 있다. 알고는 있으나…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본 적은 드물었다. 다른 아이들 말로는 나나 반휘혈 앞에선 내숭과 가식을 심하게 부린다고 말을 듣기도 했고, 간간이 이윤 앞에서만큼은 그게 제어가 안 되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인지 눈치는 채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말이 심하지 않나. 음. 역시 이윤을 싫어해서 더 그런 거겠…,

“누나가 호구같이 착해서 몇 마디 말 좀 걸어 줬다고 멋대로 떠들면 쓰나. 이제 알았으면 저리 꺼지시지?”

“……?”

잠깐. 나는 한도훈을 포장하려 든 것도 멈추고 눈살을 살풋 찌푸렸다. 호구 같다니. 착하면 착한 거지, 호구 같다니…? 잘 가다가 이게 무슨 독설인가. 역시 이 자식, 성질 더러운 게 맞았나 보다. 나는 한도훈을 변호하려던 생각을 싹 지우고 녀석을 떫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으이익…!”

“뭐, 왜, 뭐.”

한도훈이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이윤을 적나라하게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와, 진짜 재수 없어. 그런데 그 모습이 짜증 나는 걸 떠나서 되레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게 더 골 때리게 느껴졌다.

“이익! 있어! 증거!!!”

“허?”

그 말에 한도훈이 눈썹을 씰룩이며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이윤은 빠르게 품을 뒤적이며 핸드폰을 꺼내며 조작하는가 싶더니 불쑥 그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증거!!”

뭐지? 나는 호기심이 차올라 그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자마자 탄성을 내뱉었다.

“아, 저번 주?”

“정답!!”

이윤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한껏 끄덕였다. 그 안엔 내가 밴드를 덕지덕지 붙인 채 조이콘을 잡고 한껏 집중하고 있는 모습과 함께 이윤이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즉, 이것은 저번 주 주말, 이윤과 얼결에 약속을 잡고 그의 집에서 놀았던 날의 모습이었다.

“…저번 주?”

멍한 중얼거림이 들리는가 싶더니 팟, 하고 눈앞에 있던 핸드폰이 사라졌다. 그 행방의 자취를 따라가니 그것은 한도훈에 손에 들려 있었고, 한도훈은 그 액정을 뚫어질 듯 맹렬히 노려보고 있었다.

“흥! 이제 나랑 누나가 친하단 거 증명됐지?”

이윤이 어깨를 당당히 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에 한도훈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로 향해졌다.

“…누나, 여기 제가 생각하는 그곳 아니죠? 하하,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죠, 네?”

아니라고 말해. 라고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에 조용히 눈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누나…?!”

그런 내 반응에서 답을 파악했는지 한도훈의 목소리에서 기함이 느껴졌다. 그러한 한도훈에게 단호히 쐐기를 박은 건 이윤이었다.

“후훗! 우리 집에서 나랑 하루 종일 게임하고 놀았다구-! 부럽지? 부럽지이-!!”

이윤이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놀리듯 쿡쿡 웃어 보였다. 한도훈은 그에 나를 배신 어린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저 모든 말이 사실이라 딱히 할 말이 없던 나는 그냥 그렇게 됐다는 의미로 조용히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자 한도훈이 분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이윤을 매섭게 노려봤다.

“하, 하나도 안 부럽거든?! 누나는 우리 집에도 온 적 있어!”

“흥, 그래도 단둘은 아니었을 거 아냐? 난 단둘이 논 거라구!”

이건 대체 무슨 유치한 설전인가, 아니, 대화 주제가 대체 왜 저러나. 저게 자랑거리가 맞나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대화에 점점 내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아니거든!”

거참, 무리의 귀여움을 담당하는 것들끼리 참 귀여운 주제로 싸운다 생각마저 들려는데 돌연 한도훈의 강한 반박이 이어졌다.

“우리 집에 누나 혼자만! 온 적! 있거든?! 나랑 단둘이 있었고!”

“?”

…그런 적이 있던가? 나는 순간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질 못했다. 만약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게다가 우리 집에서 샤워도 했다고!”

이다음 말도 잇지 않게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

“샤, 샤워??”

나는 삽시간에 터진 말에 두 눈을 부릅뜨고 한도훈을 보았다. 이윤도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당황스러워했다.

“뭐?”

“뭐라고요???”

“헐?”

그리고 곳곳에서 기겁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의 설전에 잠시 내 혼이 빠지기라도 했던지 무대 위에 있던 대다수의 아이들이 이곳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챘다. 특히 서이수는 엎어져 있던 몸까지 벌떡 일으키며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이 미친놈아. 아무리 지기 싫어도 그렇지, 여기서 그딴 말을 꺼내면 어떡해!

나와야 될 말은 나오지 않고 당황스러움에 입만 뻐끔거렸다. 그래도 황급히 부정하고자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고개를 열심히 저어 보였으나, 이윤이라는 존재 하나로 평소보다 이성이 맛이 가 버린 한도훈의 망할 입은 멈추지 않았다.

“하, 겨우 집 한번 찾아가는 걸로 유세는. 뿐만 아니라 우리 집 별장에도 놀러 갔어! 하하, 그러니까 너보단 내가 더 친…!!! 으븝!!”

“너야말로 그만 유세 부려! 이 자식아!!”

끝내 나는 쓸데없이 나불거리는 녀석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고 주변의 아이들에게 항변했다.

“아냐. 그런 거 아냐. 진짜 그런 거 아냐. 그냥 우연이야, 우연!”

“…우연으로 샤워를?”

그런 내 반박에 누군가 불쑥 중얼거렸다. 안다, 나도 알아. 내가 미쳤지, 아무리 얘를 남자로 안 보고 한도훈이 날 여자로 안 봐서 그렇지, 그건 나나 얘 기준에서만 그런 것이다. 남들 눈에는 또래의 여자아이가 남자아이 집에 가서 씻은 일이란 것을 평소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팍팍 회전을 하며 일깨워 주고 있었다. 아무리 고용인이 집에 있었다고 해도 한도훈네에서 샤워를 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현실을 빠른 속도로 깨닫고 있으려니 식은땀이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호오.”

“?!”

그때, 곁에서 소름 끼치는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그 순간 잠시나마 잊고 있던, 잊어선 안 됐을 존재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존재를 깨달은 것은 나뿐이 아니었는지 내가 입을 막고 있는 한도훈도 흠칫, 몸을 떨며 가출했던 이성이 서서히 돌아오는 게 보였다.

한 걸음, 존재의 인기척이 방금보다 가까워진 게 느껴졌다. 그것은 한도훈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안색이 점점 새파래졌다.

“재밌네.”

묵직하게 다가오는 인기척은 한순간에 우리의 뒤편에 자리했다.

“더 지껄여 보지? 한도훈.”

그 주인공, 반휘혈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고, 그것은 북극의 한파를 뚫는 것 같은 감각임과 동시에 반휘혈에게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었노라며 먼 훗날 회고될 순간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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