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서브 남주나 엑스트라의 운은 믿는 게 아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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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사람을 내려다보며 올려다볼 일 없을 것 같은 오만한 인간 한도훈. 그는 태어나 기억이 있는 그 순간부터 부모조차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하나 놀랍게도 그런 거만을 몸에 두른 것 같은 이마저 두려움을 안게 만드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BH 그룹의 세 남자. 바로 반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BH 그룹의 회장이자 가장인 반휘명은 그저 존재 자체로 사람을 짓눌리게 만드는 타고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반휘석은 그 아버지의 피를 이었으나, 그와는 달리 정적인 카리스마로 사람을 리드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 반휘석은 그 산하에서 빠져나와 자력으로 KOKOA 엔터프라이즈를 세워 시대에 흐름에 발맞춘 인재로서 전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반씨 가문의 막내이자 어엿한 성인이 된 첫째와 달리 아직 어린 학생이라는 이유로, 또 학교 성적과 행실로 인해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적게 받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 막내를 존재를 잊었고, 무시했다. 그도 딱히 그 처지에 대해 별말이 없었다. 아니, 무관심하다는 게 옳았다. 그러나 한도훈만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장담했다. 반씨 사람들 중 가장 눈여겨봐야 하며 요주의를 기해야 할 인물은 반휘명도 반휘석도 아닌 바로 그 관심 받지 못한 막내임을 말이다.
무엇보다 그 막내가 바로, 만사 두려울 것 없던 한도훈에게 처음으로 ‘두려움’과 ‘동경’이란 단어를 깨우치게 해 준 인물이기도 하였다.
위험하다.
이 말에 어울리는 인물이 고르라면, 한도훈은 단호히 반휘혈을 선택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그 위험 수위가 낮춰지긴 했지만, 그것은 전부 곁에 있는 서이나란 존재 덕분이었음을 한도훈은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반휘혈은 시한폭탄 같은 자였다. 타인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물체일지 몰라도 그 정체가 폭탄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이 눈 닿지 않는 곳에서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설령 눈치챈 이가 있을지라도 손쓸 도리가 없이 그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언제 그가 무슨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반휘혈은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다. 그를 가까이서 오랫동안 봐 왔고, 그에게 동경을 품고 있던 한도훈조차 한 발자국 물러설 만큼 그는 도무지 손쓸 도리가 보이질 않고 있었다. 마왕이란 별명은 괜히 붙여진 게 아니었다. 현재 그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고 어느 항간에선 비웃음마저 딸려 오고 있었지만 그 시절의 반휘혈을 보면 그런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비공식이고,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하나 있다. 그리고 한도훈만이 아는 진실이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 사건은 방과 후 하교 시간이었으며, 그날은 차가 밀려 차량이 늦게 도착한 날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작정한 것처럼 타이밍 좋게 낯선 이들에 의해 두 사람은 불시에 납치를 당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곧 무사히 구출되었다. 어떠한 상처도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아니, 정확히는 두 사람 다 혈흔이 묻어 있었으나 두 사람 다 상처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그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현장을 보곤 다른 의미로 기겁했다. 난자한 피 웅덩이, 그리고 쓰러져 있는 가해자들. 아무도 그 사실의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워했다. 다만 파악할 수 있는 건 이곳저곳 산재되어 있는 마약과 흉기로 쓰인 칼들. 그 속에서 두 아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른들은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 싶어 했으나 두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한 아이는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
한 아이는 그저 이 사실을 발설해선 안 된다는 두뇌의 명령에 의해.
그렇게 진실은 저 아래에 묻혀져 버렸고, 그날을 기준으로 한도훈에게 반휘혈이란 존재가 선명히 새겨지게 되었다.
그 뒤로도 반휘혈은 피를 보는 데 별 감흥이 없었다. 싸움을 걸어 와도 걸어 오지 않아도 똑같은 사내였다. 영혼 없는 눈동자로 만사를 바라보며 피 묻은 손으로 사람을 짓밟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피를 묻히는 그 순간이 그저 선홍빛 액체로 색이 더해지는 놀이에 불과한 걸지도 모른다. 마치 공허한 무채색의 영혼을 달래는 것처럼 다른 이의 색채와 영혼 그 자체를 파괴하는 자. 그게 바로 반휘혈이었다.
누가 그를 말릴 수 있을까. 누가 저 시계를 멈출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이 문득 들었을 때, 한도훈은 오히려 되묻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있어?
답은 당연하게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도훈은 그런 존재를 반쯤, 아니 완전히 기적과도 같다고 여기고 있었다.
‘…짜증 나.’
그런데 그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불현듯 반휘혈에게 색이 더해졌다. 무채색 같던 남자가 돌연 짜증이란 감정을 더하면서 폭주 기관차처럼 분노를 다스릴 줄 모르는 이가 되었다. 그것은 타인의 피로서 감정을 덧칠한 것이 아닌 제 본연의 색이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 한도훈은 얼마나 놀랐던가. 이것이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좀체 갈피를 잡질 못했다. 이대로 저 시계가 0에 도달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 봤자 한도훈은 그 시계를 멈출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방조했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 그리고 폭발의 여파에 자신이 휘말릴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시계는 오래지 않고 어느 순간, 불현듯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이전보다 더 느려졌다. 마치 어떤 것에 깊은 탈력감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더 어두워졌다.
그래, 어두워졌다.
무채색 같던 이에게 색이 확연히 깃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타인이 보기엔 미약하기 그지없는 변화였다. 알아차린 이도 한도훈,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나 그것을 알아챈 이가 한도훈이었기에 그는 그 이상 현상에 대해 의아함과 호기심을 감추질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바꾸어 놓았는가. 사람은 대부분 외부의 자극을 통해 그 행동이 바뀌기 마련이다. 그 당연한 법칙은 반휘혈에게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그래서 그는 기민하게 그의 기색과 주위를 살폈다.
하나 그 존재를 찾아낸 건 그 한도훈치고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때는 바야흐로 반휘혈이 실로 드물게 서열 전쟁에 참여한 날이었으며 또는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오짱이 되었던 그날이었다.
그다음 날, 오랜만에 웬일로 학교를 방문한 반휘혈에게 의아함을 품고 한도훈이 물었다.
‘휘혈아, 오늘 학교 왔네? 아, 그보다 너 어제 웬일로 그런 데엘 다 참여했어?’
‘…….’
반휘혈은 그 질문에 침묵했다. 하나 그것은 그리 놀랍지도 않고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한도훈은 사소한 그의 여흥에 불과했나, 하며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다.
‘…….’
그의 시선이 한 차례, 어느 한쪽에 물끄러미 머물다가 떨어졌다.
‘!’
한도훈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신속히 반휘혈의 시선이 머문 방향을 확인했다. 그 끝에 보이는 이는 그에게 있어 낯설지도 그리 익숙지도 않은 존재였다.
저 녀석은 그러니까… 아아, 이재현이랑 붙어 다니는 그 녀석이잖아?
이름은 모른다. 알 가치도 못 느꼈다.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할 이를 기억해 봤자 쓸모없었기에 그 존재는 그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중이떠중이가 반휘혈의 시선을 한순간이라도 잡았던 이라면? 그때부터 얘기는 달라진다. 한도훈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치부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잠시간 그 어중이떠중이와 반휘혈을 관찰했다.
그리고 한도훈의 감은 적중했다. 반휘혈의 시선에 유난히 그 어중이떠중이가 눈에 밟히고 있는 게 맞았다. 한도훈은 그로서 더는 지체치 않고 그 인물에 대해 조사했다.
이름 : 서이수
나이 : 16살
가족 : 서이석(부) 이정화(모) 서이나(누나)
‘특이 사항은 도방중 오짱. 서이석(부)은 무에타이 체육관 운영. 성적은 중하위…, 그리고 누나와의 마찰이 많다.’
한도훈은 툭툭, 자료를 건드렸다. 그리고 불쑥 중얼거렸다.
‘너무 평범한데.’
이렇게 평범한데… 겁도 없이 경찰서에서 반휘혈을 데려갔단 말이지. 한도훈은 넘겨받은 진술서를 훑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혹시 취향이 이런 건가.
한도훈은 머릿속으로 한 가정이 스쳤다. 기실 반휘혈이 관심을 보인 첫 상대인 만큼 그 가정은 그리 이상하질 않았다.
뭐, 어때. 휘혈이가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러나 성적 취향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그 반휘혈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표했다는 것. 그게 가장 핵심이었다. 그래서 한도훈은 서이수와 가까워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얼마 후, 한도훈은 생에 다시 없을 정도로 기겁할 장면을 포착하고 말았다.
‘어, 안녕?’
‘…….’
뻘쭘히 손을 흔들고 있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 그리고 그 여학생을 피하지 않고 빤히 보고 있는 반휘혈. 그 장면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한도훈은 그가 했던 지난날의 가정을 완벽히 수정해야만 했다.
서이수가 아니라 서이나였구나!
설마 그 누나가 원인이었다니. 완전히 사각이었다. 그의 예상 범위를 완전히 벗어났다. 한도훈은 제 추측이 틀렸음에 일차적으로 충격을 받았고, 얘도 대다수의 취향이긴 했구나, 라는 게 이차적으로 충격이었다.
‘저, 저 사람 대체 뭐야?’
‘음? 아, 너 몰라? 이수 누나잖아. 가끔 서열 싸움에도 나타나는데… 아, 넌 모를 수도 있겠구나.’
그의 혼란스러운 혼잣말을 들은 이재현이 반응했다. 마치 무언가 아는 듯한 반응에 한도훈의 시선이 그에게로 빠르게 돌아갔다. 서열 싸움에 나타나? 아, 마찰이 있다는 그 보고인가. 한도훈은 그와 관련된 보고의 내용을 살피며 이재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세히 말해 봐.’
‘응? …으음. 유명한 이야기니까 괜찮겠지. 별건 아니고 이수 잡으러 싸움터에 나타나거든.’
‘서이수 잡으러?’
‘응. 싸움 끝나자마자 이수가 부리나케 도망치거든? 그러면 저 누나가 이수를 잡으러 가. 최근엔 시원이랑 같이 누가 이기나 내기를 시작했는데….’
그의 이야기는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그간 그의 눈에 잡히질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로. 그리고 그의 영민한 머릿속으로 하나의 사실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나타났다.
시계를 멈출 단 하나의 열쇠가, 기적과 같은 영웅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저번엔 이수가… 어?’
불현듯 이재현이 말을 잇다 말고 잠시 멈추었다. 그에 홀린 듯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도훈은 답답함을 못 이겨 그의 대답을 종용했다.
‘왜 거기서 얘기를 끊어, 이수가 어쨌는데? 누나한테 맞았어? 응?’
‘응? 아, 응. 마, 맞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그래서 또 무슨 일이 있었어? 빨리 말해 봐.’
‘어? 어….’
그리고 그때 이재현이 말을 한순간 멈췄던 사실에 대해선 한도훈은 몰랐던 사실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눈동자가 마치 어린아이가 동화를 듣는 것처럼 순수한 눈망울로 반짝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
“…….”
“…….”
그리고 현재, 그 기적과 같은 인물에 대해 감히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진짜 뒤지게 생긴 한도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