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서브 남주나 엑스트라의 운은 믿는 게 아니다. (4)
오소소, 팔에 소름이 돋았다. 평소 느껴 보지 못한 살기가 뒤에서 묵직하게 전해져 왔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주치는 순간 그게 제 임종의 순간임을.
평소 그가 자랑하는 포커페이스는 옛적에 무너졌다. 한도훈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인 것처럼 요란하게 흔들렸고, 식은땀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일 수도 있겠지만 몸을 움직였던 걸 감안해도 많은 땀이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서이나는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반휘혈이란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한도훈은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만큼 무겁게 와닿는 살기를 이제껏 느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지체되면 진짜 제삿날이다. 빨리, 빨리 수습해야만 해.’
입을 잘못 놀린 걸 탓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임기응변만이 답이었다. 후회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다. 그의 영민한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며 반휘혈과 서이나에 대한 정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천만다행히도 임기응변은 그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재능 중 하나라는 사실. 그 재능이 확실하게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무울론…!”
반휘혈의 화를 가라앉힐 만한 최고의 답안은 무엇인가.
수많은 가정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그 결과를 내렸다. 목숨의 위협을 받은 한도훈의 머리는 빠르게 그 가운데 답을 내렸고, 그것은 약 2초도 안 되는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결론을 내린 한도훈은 지체할 틈 따위 없다는 것처럼 재빨리 서이나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당연히 휘혈이는 못 따라가지만요! 누나랑 가장 친한 사람은 휘혈이가 틀림없고말고요!”
“으음?”
서이나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한도훈을 돌아봤다. 하지만 한도훈은 서이나에게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시치미를 뚝 떼며 철판을 깔기로 하였다.
“그야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같.은. 지.붕. 아래서 같.이. 잔. 사이잖아요? 그것도 누.나. 집.에서!”
“?!”
특정 단어에 힘까지 줘 가며 말한 한도훈은 뻔뻔한 얼굴과 달리 뒤의 기척을 예민하게 살폈다. 지금 저를 경악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건 이 순간만큼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후환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어차피 이 호구같이 착한 누나는 적어도 자신을 죽이진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선택한 현명한 판단이었다.
“…….”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공기만으로 누구 한 명 죽일 것 같던 살기가 한순간에 누그러진 게 느껴졌다. 한도훈은 그에 안도의 숨을 속으로 내쉬며 더더욱 뻔뻔한 미소로 무장하며 뒷짐을 진 채 뒤로 뱅글 돌았다.
“그런데 제가 감히 어떻게 최고의 동생을…, 누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내세우겠어요.”
“어? 난 거기까지 말한 적… 악!”
한도훈은 그의 말에 반박하려던 이윤의 발을 모른 척 빠르게 밟았다. 이윤이 발등을 붙잡으며 그에게 항의 어린 시선을 보냈으나, 다른 사람이었으면 모를까 당장이라도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그 순진한 눈망울은 한도훈에게 통할 사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흠.”
지금 반휘혈의 표정이 꽤나 만족스러운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변했다는 사실이니까! 남들이 보기엔 무표정한 건 그리 다를 바 없었지만 그를 잘 아는 한도훈의 눈엔 그것은 다르게 비쳐졌다. 그의 눈빛과 분위기가 말해 주고 있다. 그가 자신의 말에 만족했음을!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 게 약간 언짢은 것 같긴 했지만 방금과 비교하면 그것은 우스우리만치 미약했으니 괜찮았다.
‘큰일 날 뻔했네. 안 그래도 방금 전 고백 무대로 굉장히 화나 있었을 텐데…, 누나랑 팀 맞춰서 풀어져서 망정이지, 여기서 더 자극하면 진짜 큰일이야.’
물론 이 모든 걸 계획하에 만든 무대긴 하지만, 아까와 같은 행동은 너무 충동적이었다. 하마터면 건너면 안 될 강을 건널 뻔했다는 사실에 한도훈은 자신을 질책했다. 이윤만 관련되면 자꾸만 이성을 잃어서 탈이라니깐.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며 가증스러운 미소를 장착했다.
“아이참, 윤이 너도 그런 말 하면 안 돼~.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엥?”
이윤은 순간 이게 욕인지 아닌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의 방향이 자신만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아서인지 그의 표정이 아리송해지자 한도훈은 때를 놓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이윤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아, 곧 다시 시작할 거 같으니까 다시 자리로 돌아갈까?”
“으응…? 어어.”
이윤은 평소 살갑다고 절대 말할 수 없는 한도훈이 제게 살갑게 웃어 주니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곧 그것이 싫지 않았는지 그는 얼떨떨해하기만 할 뿐 눈만 멀뚱히 껌뻑이며 별 태클 없이 자리로 돌아갔…,
“한도훈.”
흠칫, 한도훈은 나직하게 부르는 자신의 이름에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안 보면 안 된다는 이성의 경고가 울렸다. 결국 녹이 슨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덜컹이며 돌렸다.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자 반휘혈은 그를 싸늘히 보며 입을 움직였다.
다음은 없어.
최후통첩. 마지막 경고가 그의 망막에 소리 없이 새겨졌다. 한도훈은 마른침을 겨우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 앞을 보며 안도의 숨을 쓸어내렸다.
‘살았다…!’
한도훈은 그렇게 반휘혈에게서 목숨의 위기를 무마했다.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에 그는 언제 긴장했냐는 것처럼 금세 자신의 페이스로 돌아왔다.
“응? 무슨 일 있어?”
“어? 아, 뭐야. 왜 네가 여기 있어. 꺼져.”
이윤이 그런 한도훈을 보며 의아하게 물어보자 한도훈은 제가 스스로 잡았던 그의 어깨를 매몰차게 떼어 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윤은 가차 없는 한도훈의 처사에 너무하다고 바로 항의했다. 물론 한도훈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서이수는 미친놈 보는 얼굴로 한도훈을 향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또라이 새끼는 대체 뭐지?’
아니, 그보다 아무리 목숨의 위협이 오갔다고 한들 누나를 팔다니. 제정신인가? 서이나가 한도훈네에서 가서 벌인 만행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서로 이성적인 관심이라곤 일절 없는 두 사람을 생각건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분명 한도훈이 서이나를 납치하듯 끌고 갔을 게 자명했을 거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그냥 자신만 알고 있을 것이지 답지 않게 저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아무리 이윤이 싫어도 저렇게 퓨즈가 나갈 일인가.
게다가 그 뒷수습으로 서이나를 이용하다니…. 반휘혈이 누나와 같은 지붕 아래서 잔 건 맞았지만 그와 가장 가까이서 잔 사람은 정확히 말하자면 저였다. 그건 한도훈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고 말이다. 저 자식, 누나의 후환이 두렵지 않은 건가?
다행히 무대의 마이크가 전부 꺼져서 망정이었지, 하마터면 전교생이 난리 칠 큰 소동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물론 이 무대가 다 끝나면 또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귀찮은 짓을 공연히 저질렀다.
‘…뭐, 반휘혈 저 자식도 만만치 않다만.’
서이수는 혀를 차며 질린 시선으로 반휘혈을 보았다. 반휘혈은 어느새 다시 서이나에게 찰거머리가 되어 딱 달라붙어 있었다. 아까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반응이었다. 서이수는 방금 전, 제가 본 광경을 떠올리곤 조용히 기억을 묻었다. 별로 다시 떠올리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경고임과 동시에 보호였다.
‘젠장.’
그래서 서이수는 한도훈의 선택지를 면전에 대고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잠시 동안 식은땀이 잔뜩 배인 손을 느꼈다. 그 순간, 반휘혈은 정말로 온몸이 섬뜩해질 만큼 위험하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아마 그것은 저만이 느낀 감정은 아닐 터였다.
새삼스럽지만 그가 한때 동경했던 남자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임을 새로이 자각했다. 그런 인물이 집착하는 게 다름 아닌 제 누나라니. 서이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아냐, 방금 걸로 누나도 휘혈이를 조금 멀리할지도 몰라.’
그 위압감을 지척에서 느꼈는데 서이나도 분명 무언가 느꼈을 터였다. 서이수는 방금까지 굳어 있던 제 누나를 떠올리곤 황급히 그녀를 돌아봤다.
흠칫!
하지만 마주친 그녀의 형상에 의해 불안감은 홀연히 사라졌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의 눈앞엔 분노로 전신을 불태우고 있는 서이나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죽인다, 한도훈.’
나는 타오르는 살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도훈을 노려봤다. 저 새끼가 아주 내 평판을 나락으로 꽂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구나. 저 혼자 살자고 나를 팔아먹는 그 행위에 치가 다 떨려 왔다.
언젠간 저 새끼를 반드시 족치고 말 거다. 감히 나를 팔아? 아무리 반휘혈이 방금 위협적으로 느껴졌어도 그렇지, 감히 나를? 저 간사한 새끼를 다 보았나. 한도훈은 내가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버젓이 알고 있음에도 이쪽은 전혀 보질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시선을 돌리며 외면하고 있었다. 그에 나는 배신감에 치 떨며 눈에 쌍심지를 세웠다. 다시 한번 저 새끼를 조져 놓겠다고 다짐을 하던 도중이었다.
“으음? 여기 분위기 왜 이래?”
그럴 때 상황에 맞지 않은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홱 돌리니 고찬영이 무대 계단을 오르다 말고 어정쩡히 서 무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분위기가 어수선한 무대를 둘러보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이코. 깜짝이야. 친구님 표정은 또 왜 그래? 나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는 계단을 다시 오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나 또한 녀석에게 다가가며 바로 한도훈의 만행을 알리려는데 내 앞으로 커다란 장벽이 세워졌다.
“아니, 글쎄…! 엥?”
“오지 마.”
그 정체는 바로 반휘혈이었다. 경계를 날카롭게 세우며 고찬영을 막았다. 고찬영은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서곤 잠시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흐으음??”
그는 자신을 향해 적대감을 보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무언가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사랑싸움?”
“아니야!!!”
저놈의 자식, 지금 장난칠 때냐! 나는 앞을 가로막는 반휘혈을 밀치고 대번에 부정했다.
“하하, 미안 미안. 분위기가 너무 살벌하길래 풀어 보려고 농담 좀 한 거야.”
“너도 그런 말을 하니까 자꾸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거잖아!”
“하하하하하, 어차피 걸러 들을 사람은 알아서 걸러 들으니까 괜찮지 않아?”
“안 괜찮아!”
넌 소문에 익숙하다 이거지! 평소 이목을 끄는 놈이다 보니 아주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내 속만 더 답답해져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문득 녀석이 어딘가를 갔다 왔다는 걸 눈치챘다.
“근데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화장실?”
휴식 시간이 10분 남짓이었던 걸 떠올리며 그사이에 뭘 하고 온 건가 싶어 묻자 고찬영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눈을 데록 굴리며 난처히 미소를 그렸다.
“아-. 뭐 좀 찾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