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서브 남주나 엑스트라의 운은 믿는 게 아니다. (5)
“찾으러? 뭐 잃어버렸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좀 걸리는 게 있어서.”
고찬영이 쓰게 웃으며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열이 나던 머리가 점점 식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무언가 감추고 있는 모습이 이상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이내 더 캐묻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그래서 찾았어?”
내 질문에 고찬영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그러더니 어딘가 읽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콧방귀를 뀌곤 녀석에게 다가가 그 등을 강하게 후려쳤다.
“윽-!”
“기운 빠지는 얼굴 하지 마. 답지 않게.”
나는 귀찮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고 녀석을 보았다. 아까부터 어깨에 힘이 빠진 게 도무지 녀석답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더 두고 보고 싶진 않아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중요한 거면 나중에 찾는 거 도와줄 테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
“엇….”
“경희랑 혜인이도 도와줄 거고.”
툭툭,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 주자 그는 어딘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이내 안도한 듯 얼굴이 풀어지면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응. 그러네….”
어딘가 한시름 놓은 것 같더니 곧 그는 평소처럼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팡, 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이야~. 왠지 친구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엄청 든든한데? 하하하.”
“악-!!”
힘 조절해, 이 자식아! 나는 후들거리는 몸뚱어리가 비명을 지르는 감각에 눈을 치켜뜨며 항의했다. 고찬영은 그런 내게 너털웃음을 흘리며 내 타박을 받고 있는데 꽉 하고 뒤에서 몸이 끌어당겨졌다.
이젠 당황스럽지도 않다. 고개를 올리니 역시나 반휘혈이었다. 그는 굉장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찬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
“흐음~?”
고찬영이 반휘혈의 태도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 진짜 재밌다. 내가 말한 거긴 하지만 너무 잘 이행하는 거 아니야?”
“시끄러. 닥쳐.”
“하하, 너무 그렇게 날 세우지 마. 난 응원하는 쪽이라고. 물론 너 때문은 아니지만?”
“…….”
이 새끼들은 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분명 한국어가 맞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용을 보아 하니 방금 전 그들만 주고받았던 내용의 연장선인 것 같긴 하다만. 나만 따돌리는 녀석들의 대화에 내 얼굴이 점차 험해지자 고찬영이 그런 날 발견하곤 슬쩍 윙크를 날렸다.
“벌써부터 약혼자라고 하는 사람이 참 속 썩인다, 그치?”
“…작작 해라?”
서슬 퍼렇게 경고했으나 고찬영도 전 사대천왕에 걸맞게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다. 그는 내 경고가 별로 타격도 없는지 능청스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이제 이벤트를 재개하겠습니다! 참여자분들은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앗.”
나는 진행자의 말에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내 피 같은 휴식 시간이…!
“어, 근데 경희는?”
사라진 시간을 한탄하고 있는데 고찬영이 자리로 돌아가려다 말고 불쑥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무대를 돌아봤다. 그제야 나는 안경희도 이 자리에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디 갔지?”
“여, 여기…! 허억, 허억…!”
의아하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때마침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안경희가 나타났다. 그리 급하게 어디 갔다 왔냐고 묻기 위해 뒤를 돌던 나는 멈칫하며 그녀의 손에 들린 걸 보았다.
“그건 뭐야?”
“허억, 헉. 어, 아, 응? 내 노트북. 헤헤”
그녀가 헤실 웃으며 들고 있는 가방을 살짝 올려 보였다. 갑자기 웬 노트북이지? 특히나 안경희의 노트북이라니. 그 주인이 주인인 만큼 호기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사회자가 그런 내 입을 막고 이벤트를 진행시켰다.
“자, 남은 팀은 총 열 팀! 본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아!! 사회자의 멘트에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잇따랐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직도 날 안고 있는 반휘혈의 품에서 익숙하게 벗어나며 자리에 섰다. 반휘혈이 불만스럽게 날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깡그리 무시했다.
살아남은 팀은 A, C, E, G, H, L, O, R, W, Z 팀이었다. 학교의 유명인들 가운데 탈락자는 없었다. 솔직히 서이수 팀은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는데, 역시 내 동생답게 강인한 의지로 살아남았다.
‘녀석. 누가 키웠는지 참 잘 키웠어.’
생존 명단을 보며 뿌듯하게 코를 비비적거렸다.
“이번 경기는 바로-! 서바이벌 생존 게임입니다-!!!!”
“응?”
그때 사회자가 경기 내용을 소개했다. 생존 게임? 앞의 내용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방향의 게임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이거 인소 세계 클리셰 스타일의 연애 게임으로 진행하려던 거 아니었어? 그런 내 의문에 맞춰 사회자는 게임 내용을 이어 설명했다.
“무대는 이곳이 아닌 바로… 저곳!”
촤르륵-!! 사회자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천막이 둘러진 곳이었다. 그곳의 베일이 벗겨지며 무대가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나타난 광경에 입을 크게 벌렸다.
“워….”
저건 또 언제 준비한 거래. 나는 커다란 시설물을 보며 황당한 시선을 금치 못했다. 또 내 눈길을 또 사로잡는 건 그 시설물이 이어지는 게이트 구간이 두 개씩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우리 학교 운동장이 넓다지만… 아주 뽕을 뽑는구나, 한도훈. 이젠 경악을 넘어 감탄마저 일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걸 기획하고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한도훈은 대단한 놈이었다.
‘흠. 뭐가 됐든 저런 서바이벌이면 할 만할지도?’
나는 자신 있는 종목에 호기로운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이벤트로 워밍업은 옛적에 끝났으니 최고였다. 힘만 쓰지 않는다면 이 경기는 손쉽게 이길지도 몰랐다.
“이번 경기에서 살아남는 최후의 한 팀만이 산토리니 여행 패키지를 얻습니다! 과연 최후의 승리 팀은 누가 될까요?!”
오. 스케일이 큰 만큼 여기서 끝을 내려나 보구나. 하긴. 시간 문제도 있으니 오래 끌 수 없을 터였다.
“그럼 각 팀은 1번 주자와 2번 주자를 선별해 주세요-!”
경기 방식은 이러했다. 각 관문마다 출전할 선수를 한 명 배정한다. 관문은 총 세 개. 즉, 게이트는 총 여섯 개. 마지막 관문은 두 명 모두 출전하는 방식의 서바이벌 생존 게임이었다.
“그럼 각 팀은 첫 번째 선수를 골라 주세요!”
자리를 이동해 게이트에 앞에서 서자 나는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가장 먼저 나가는 걸 누구로 해야 될까. 나는 몇 번을 고민하다가 힐끔 다른 팀을 보았다. 그러다가 눈에 확, 하고 사로잡는 인물이 있었다.
“휘혈아, 내가 먼저 나갈게.”
그 인물을 보자 나는 바로 결정을 내렸다. 반휘혈은 내 말에 별 반항 없이 수긍했다. 이런 점은 확실히 좋다니까. 다른 부분에서도 말 좀 잘 들으면 참 좋을 텐데.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경기의 시작을 기다렸다.
“자, 그럼 첫 번째 관문 참가자들! 모두 나와 주세요!”
사회자의 호명에 나는 게이트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익숙한 음성이 나를 불렀다.
“오? 뭐야. 친구님이 먼저 나서는 건가?”
그러자 먼저 앞에 섰던 고찬영이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그에 호기롭게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왔으니 당연하지.’
고찬영의 분위기가 돌아왔다. 능청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이 자신만만한 태도. 언제 빼는 태도를 보였냐는 듯 당당한 자세였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나선 이유도 이런 탓이었다. 이 모습이라면 분명 그가 선택하는 게이트가 내게 최적의 답일 거란 판단이 내려졌다. 나나 반휘혈이 워낙 똥손이어야지. 반휘혈이 성격을 죽이고 고찬영과 같은 선택지를 둘 것 같진 않았기에 먼저 나선 것도 있었다. 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기도 하고 말이다.
“오호~. 나한테 지면 어쩌려고?”
“꿈 깨시지?”
우리는 서로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웃으면서 신경전을 펼쳤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경기가 곧 시작되었다. 참가자들을 둘러보니 꽤나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경희랑 찬영이, 이수랑 재현이… 그리고 연희인가?’
의외의 출전 명단에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씩 웃었다. 이 정도 명단이면 이번 관문은 쉽게 통과할지도 모르겠다. 위험인물들이 거의 다 후발 주자라니. 역시 고찬영 따라 나와 보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러나 내가 아직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고찬영의 운은 순전히 그의 위주로 흘러간다는 것을. 운의 중심에 선 것은 그였음을, 그렇기에 거기엔 내가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간과하고 있었음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은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
그리고 현재. 나는 스스로의 안일한 선택에 뼈저리게 후회 중이었다.
‘이런 미이이친…!!!!!’
훙-!!! 하고 빠르게 치고 드는 위협적인 각력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모래 위를 굴렀다. 그리고 얼굴 위로 떨어지는 발에 나는 곧장 옆으로 굴러 공격을 회피했다.
쾅-!!!
묵직한 울림이었다. 모래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간격을 벌린 후 눈앞에 있는 이를 경계했다.
“이제 좀 적당히 피하는 게 어때?”
척,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모래바람 너머로 인영이 다가왔다.
“슬슬 승부를 보자고.”
곧 모래바람이 걷어지고 짧은 단발의 여성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서이나.”
나는 그 여성을 보며 화답도 하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이지,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된다. 다름이 아니라 이 경기 안엔…
‘저건 대체 뭐야?!’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골 때리는 복병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