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서브 남주나 엑스트라의 운은 믿는 게 아니다. (6)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잠시 10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자, 참가자분들 모두 준비 마치셨죠? 그럼 게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게임의 룰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게이트는 보다시피 두 개씩 있고요. 게임의 시작과 동시에 게이트 앞에는 문구가 적혀 있을 겁니다. 그 적힌 문구의 미션을 통과하신 분이 관문을 통과하게 됩니다.”
음? 이번엔 랜덤이 아닌가 보다. 나는 그 사실에 한시름을 놓았다. 게이트 근처에 웬 모니터 같은 게 있다 싶더니 저게 미션을 알려 주는 화면이었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왼쪽 게이트 너머엔 뭔가가 없고, 오른쪽 게이트엔 넓은 모래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앞엔 웬 상자가 보였다. 저건 대체 뭘까?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사회자가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게임 시작-!!”
나는 그 말에 바로 몸부터 튀어 나갔다. 뭔지 모르겠지만 가 보면 알겠지! 하는 심산으로 도착하자 두 개의 모니터가 동시에 켜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먼저 시선이 간 곳은 휑한 왼쪽 게이트였다.
“으엑.”
그리고 마주친 화면에 내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한 시간 내에 이 문제를 맞히시오.]
[실수 t에 대하여 함수 f(x)를… 라고 가정할 때. ……를 구하시오.]
아니, 미친. 저게 여기서 왜 나와?! 다름이 아니라 왼쪽 게이트에 나타난 것은 어떻게 봐도 수능이나 모의고사 수학 29번이나 30번 문제에 해당할 것 같은 서술형 문제였다.
“오, 왼쪽 게이트는 학생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주최자의 센! 스! 가 돋보이네요~. 그럼 다들 원하시는 게이트 앞에 서시길 바랍니다~!!”
그딴 센스 필요 없어! 체육 대회에 수학이 웬 말이냐!!! 한도훈을 향한 아부성 넘치는 사회자의 멘트에 나는 마음속으로 거세게 반발했다. 이런 더러운 자본주의 사회 같으니. 공식이 두 개 이상 나올 때부터 내 뇌가 글자를 받아들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내 발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향했다.
“하하, 저게 무슨 외계어람.”
“어우씨, 한도훈 저 악랄한 새끼…. 이런 날에 꼭 저딴 걸 준비하다니….”
나와 비슷한 처지인 건 고찬영과 서이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나처럼 일말의 망설임 없이 오른쪽 게이트에 섰다. 역시 공부 포기자들. 너희들이 있어서 내가 외롭지 않다. …물론 내가 그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이 공부를 한다는 처지인 건 지금은 넘어가도록 하자.
“음-. 그럼 전 여기로.”
“나, 나도…!”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재현과 안경희는 왼쪽 게이트로 향했다. 그래, 머리 좋은 놈들. 부럽다. 나는 돌머리인 스스로를 한탄하며 오른쪽 게이트에 있는 상자를 들었다.
오른쪽 게이트의 미션은 이러했다.
[상자를 연 후, 색을 확인하세요.]
그 말을 따르자 그 안엔 장갑… 아니, 글러브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음? 글러브?”
웬 글러브지. 반장갑 형태의 그것을 흔들어 익숙하게 착용하려다 새 거 특유의 빳빳함이 느껴져 가볍게 팍팍 두드리고 구긴 후에 착용했다.
“어, 언니. 방금 그건 왜 한 거예요?”
그러자 언제부터 왔는지 주연희가 얼굴을 빼꼼 내밀며 방금 내 행동을 물었다.
“음? 아, 장갑이 뻣뻣하면 사용하기 불편해서 길 좀 들였어.”
“아하.”
주연희는 내 말을 듣곤 알겠다는 것처럼 자신도 착용한 장갑을 벗고 나를 따라 하려는 건지 팍팍 휘둘렀다. 그 모습이 참 서툴러 보여 귀여웠다. 나는 픽 웃으며 바라보다 문득 그녀의 것과 내 것의 손목 쪽 띠의 색상이 다름을 눈치챘다.
“어? 연희야. 너 그 장갑… 파란색이네?”
“아, 네. 언니는 빨간색이네요?”
그 사실을 깨닫자 목과 어깨에 긴장이 들어갔고, 등골엔 싸한 불길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나는 황급히 모니터를 보았다. 모니터의 화면은 어느새 멘트가 바뀌어 있었다.
[자, 모두 글러브를 착용하셨죠?]
마치 상황을 미리 파악한 것 같은 멘트였다. 그리고 이어진 건 간단한 게임의 룰이었다.
[게임의 룰은 간단합니다. 색이 맞는 팀과 겨루어 장외 혹은 기권을 받아 내면 됩니다. 단, 색깔별로 살아남아야 하는 건 단 한 사람뿐. 두 사람 이상 살았을 시, 그 색에 속한 팀은 모두 실격 처리됩니다.]
“에이씨!!”
이게 뭐야-!!! 나는 절망적인 순간에 글러브를 땅에 던졌다. 결국 이건 그거잖아! 싸우라는 거잖아-!!! 장소도 모래판인 거 보니까 아주 딱이네-!!! 내 운을 보건대 대진표는 안 봐도 훤했다. 분명 서이수나 고찬영 둘 중 한 명이나 두 사람 모두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재현이 없어서 망정이지! 걔까지 있었으면 내 복장은 터질 대로 터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절망적인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에 대한 한탄을 금치 못하고 머리를 쥐어 싸맸다.
“누나, 색 뭐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서이수가 바로 내 색부터 확인했다.
“아, 빨강이네? 난 검정.”
“어, 정말?”
그런데 예상외로 서이수와 다른 색이 걸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말에 내 얼굴이 펴졌다.
“음? 오~. 다들 다른 색이네? 난 파랑인데.”
게다가 고찬영까지 다른 색이라니! 최악만 가정했던 내게 있어선 최고의 상황에 얼굴이 자연히 확 펴졌다. 하지만 고찬영이 편성된 색을 들은 사람이 주연희만은 아니었는지 그녀를 포함한 해당되는 이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게이트 변경 가능하나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주연희가 손을 들어 사회자에게 질문했다. 그것은 간절함마저 베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고찬영이 적이란 걸 깨닫자마자 패배를 직감한 게 틀림없었다. 또 그 판단이 정확했고 말이다. 하긴, 미운 최강혁과 별꼴을 다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리 끝내고 싶진 않긴 할 거다. 그런데 과연 한도훈이 게이트 변경을 쉽게 허가…,
“아직 미션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가능합니다.”
…해 주네? 손쉽게 통과된 사안에 주연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왼쪽 게이트로 향했다. 아무래도 저쪽이 더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나 보다. 그 생각은 파랑 팀에 속한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은 빠르게 왼쪽 게이트로 사라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럽지? 저 문제를 풀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질투 날 일인가. 나도 이왕이면 몸 말고 머리를 쓰고 싶은데 말이다. 나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남몰래 시샘 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데 서이수가 그런 내 정신을 일깨웠다.
“누나, 빨리 들어와!! 지금 안 들어오면 실격이야-!!”
“헉.”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모니터를 보았다. 모니터는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는지 5에서부터 찬찬히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 차리자, 서이나! 나는 재빨리 모래판 위로 발을 내디뎠다.
“자, 그럼 이제부터…! 배틀 로열을 시작하겠습니다-!”
허허. 아주 대놓고 싸우라고 알려 주는구나. 배틀 로열이라니. 아주 이 무대와 찰떡같은 이름이었다. 나는 관중들의 환호성을 귓등으로 흘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다행인 게 있다면, 이 중에 내가 경계해야 될 대상들이 다른 팀에 편성됐다는 점이었다.
“2인 이상 이뤄서 연합해도 좋습니다. 살아남는 건 단, 하나의 색!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색은 필요 없다! 모두 사력을 다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척, 사회자가 돌연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돌리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엥???”
뭐야, 저거!!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나온 참여자들을 제외한 다른 참여자들이 의자에 앉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위에 불길한 장치까지…!
“여러분들의 파트너가 물 폭탄 세례까지 맞을 거니까요!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야겠죠! 물론 이건 문제를 풀지 못한 참여자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헐. 나는 터져 나오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주연희에게 향했다. 주연희는 어딘가 심하게 갈등 어린 얼굴이었다. 마치 고의로 오답을 낼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에 맞춰 사회자가 불쑥 그 희생양들에게 마이크를 드밀었다.
“자, 그럼 같은 팀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해 주시겠습니까?”
그것도 하필이면 최강혁이었다. 최강혁은 시큰둥한 눈으로 주연희를 보더니 슬쩍 눈썹을 기울이며 담담히 말했다.
“틀리면 뒤진다.”
저거 진심이다. 매우 진심이다. 최강혁의 뒤틀린 심기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주연희는 이로써 고의로 틀린다는 선택지가 머릿속에서 지워진 게 결정됐다.
“하, 하하…! 거, 거참 달콤 살벌한 응원이네요! 그럼 다른 팀도 응원 들어 보겠습니다!”
사회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행히 그 뒤는 온건한 쪽에 속했다.
“어…. 힘내세요.”
“너무 무리하진 마. 재현아.”
“별이 누나! 져도 괜찮아요! 누나, 파이팅-!!”
어색한 응원을 해 주는 김시원과 부드럽게 웃으며 독려하는 다정한, 그리고 활기차게 응원을 남긴 이윤. 참 훈훈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그 외의 팀도 어색하거나 힘찬 응원을 남겼고, 서강이는… 자니까 패스. 이때 서이수의 표정이 저 새끼를 물 폭탄에 맞게 해, 말아? 하는 갈등 같은 게 스친 걸 봤지만 나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
반휘혈의 앞으로 마이크가 대어졌다.
“자, 그럼 여자 친구분께 응원 한마디를!”
…저 멘트 누가 지시한 거야! 나는 눈을 험하게 뜨며 한도훈을 노려봤다. 한도훈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오, 저 밉상을 어쩌면 좋냐. 진짜 내가 저 자식 꼭 때리고 만다. 나는 이를 박박 갈고 있는데 낮은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울렸다.
“그럴 필요 있나?”
“예?”
음? 그의 엉뚱한 소리에 나는 눈살을 살풋 찌푸렸다. 사회자가 당황하며 선뜻 반응을 못 하고 있자 반휘혈이 시큰둥한 얼굴로 몸을 뒤로 기대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길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