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같은 길, 다른 선택 (2)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대로 경기장 밖으로 나뒹굴 줄 알았건만, 왜 여기에 서이수가…. 멀거니 그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 언제부터 있었냐?”
“뭐?”
서이수가 내 말에 황당히 얼굴을 굳혔다. 그러곤 대번에 낯을 찌푸리더니 버럭 외쳤다.
“뭔 소리야! 처음부터 계속 같은 경기장에 있었구만! 모래 날려서 기침을 얼마나 했는지 알아?!”
아, 맞아. 그랬지 참. 조선지의 공격을 피하기 급급해서 녀석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막 그 사실을 떠올리고 있자 서이수가 짜증이 났는지 툭툭 몸을 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쳇, 도와줘도 이러지. 그냥 장외로 날아가게 내버려 둘걸.”
“하하, 미안, 미안. 정신없었던 거 알고 있었잖아. 덕분에 살았다, 야.”
나는 사과의 의미로 서이수의 옷을 터는 걸 도와줬다. 쓸데없이 크기만 한 줄 알았는데, 꽤 몸이 탄탄한걸? 나는 히죽 웃으며 칭찬을 담아 그의 몸을 두드렸다. 서이수는 뚱하니 입을 다물며 삐죽였다. 나는 그런 동생의 머리를 털어 주기 위해 손을 올렸다. 부루퉁한 얼굴이었지만 그는 내 손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의 먼지를 털면서 그에게 말했다.
“뭐, 마침 잘됐다. 이수야. 네가 나 좀 도와줘.”
“어?”
이건 또 뭔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뒤를 눈짓했다.
“보다시피 내가 힘겨워서 말이지.”
“음.”
“네가 나 대신 쟤 좀 상대해 줘.”
내가 상대해 주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영 상황이 마뜩잖아 별수가 없었다. 마침 서이수가 여자애들을 어떻게든 뿌리치고 달려와 줬으니 이왕 도와줄 거 더 도와 달라 부탁했다. 서이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조선지를 보았다. 그러곤 단조롭게 말했다.
“무린데. 저 누나 너무 세.”
단호한 부정이었다. 나는 그 말에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네가 상대하기엔 좀 부담스럽지? 다 안다는 눈으로 보자 서이수는 그런 내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나는 그런 서이수의 몸을 좀 더 숙이게 한 후, 그 귀에 뒷말을 속삭였다. 서이수는 내 말을 잠자코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확실히.”
“그렇다니까. 넌 그 상황만 노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아니, 그건.”
서이수는 석연찮은 눈으로 나를 뚱하니 보며 말했다.
“내가 존나 위험한 거 아냐?”
“걱정 마.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게.”
“흠. …알았어.”
걱정 말라며 독려해 주자 어딘가 찝찝한 얼굴이었지만, 서이수는 별다른 항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런 서이수의 등을 툭, 두드리며 그를 앞세웠다. 우리 두 사람을 잠시 벙찌듯 보던 조선지는 이 모습을 보곤 정신을 차렸는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뭐야, 너 설마…!”
“예예. 그 설마입니다. 선수 교체~. 가라, 이수몬!”
나는 척, 전방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서이수가 얼굴을 구기며 출전했다.
“뭐, 그렇게 됐으니 잘 부탁드림다.”
서이수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설렁설렁 자세를 잡았다. 상황이 뒤바뀌자 사회자 쪽에서도 관객석에서도 난리가 난 게 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예의 주시했다. 조선지는 이 상황에 얼이 빠진 듯했으나 곧 정신을 수습하곤 이를 꽉 깨물었다.
“웃기지 마, 난 서이나 너랑…!”
“예, 그럼 먼저 실례요.”
서이수가 먼저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정공법으론 질 확률이 높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지는 그의 공격을 뒤로 물리며 피했다. 당황한 듯싶었지만 곧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다시 자세를 잡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스텝을 갖추더니 그대로 뒤돌아 차기를 했다. 그 공격에 서이수는 접근하려던 걸 멈추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우와, 존나 무섭네.”
서이수는 난처하게 눈썹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태권도를 한 만큼 그녀의 동작은 재빨랐다. 게다가 방금까지 나를 상대하면서 몸이 풀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공격을 내지르는 것도, 회수하고 자세를 다시 잡는 것도 더 빨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 못 할 것도 없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서이수에게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서이수! 방금 내가 한 말 기억해!!”
그러자 서이수가 몸을 움칫, 떨며 나를 떨떠름히 돌아봤다.
“아, 순간 아빤 줄.”
“뭐, 인마?”
못마땅히 대꾸하자 서이수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시큰둥히 말했다.
“걱정 마. 안 잊었으니까. 그러니까 거 조용히 좀 하쇼.”
저 새끼가…. 걱정해 줘도 뭐라 하네. 험상궂게 낯이 찌푸려지는데 서이수가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방금 조선지의 대응으로 기합이 들어갔나 보다. 서이수의 분위기가 한층 더 진지해졌다. 아무래도 저 공격을 잘못 맞으면 진짜 골로 간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겠지. 나는 힐끔 제한 시간을 봤다. 대충 남은 시간은 3분 남짓.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몸에 긴장을 풀지 않고 앞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공방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아니, 정확히는 서이수가 꽤나 선방했다. 자칫 판단 실수를 해 나가떨어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오른쪽!!”
“왓!”
물론 내 어시스트 덕도 있었지만 말이다. 서이수는 내 말에 반사적으로 오른뺨을 향하는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걸음을 물리며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야, 정신 똑바로 안 차려?! 그 정도 공격은 알아서 피해야지-!!”
“아, 시끄러-!!!!”
그는 팩 소리를 지르며 다시 조선지에게 재빨리 접근했다. 조선지는 내지르는 서이수의 주먹을 피하고 발을 놀리더니 그대로 내려 차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서이수는 재빠르게 몸을 꺾어 그 기술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습 공격의 탓일까, 순간 그 몸에 제동이 걸렸다. 그것을 간파한 조선지가 틈을 주지 않고 몸을 한 바퀴 돌려 다리를 날렸다.
“이수…!”
“와씨!”
저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순간, 나도 모르게 뛰쳐 나가려는데 서이수가 뒤로 몸을 확 꺾어서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그에 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생각보다 쓸 만한데?’
나는 예상외로 꽤 분발하는 서이수의 몸놀림에 감탄하며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끼던 팔짱을 풀어 냈다. 슬슬 타이밍이었다.
내가 서이수에게 일러 준 것은 별거 아니었다.
‘잘 들어. 이수야. 쟤는 기술이 태권도뿐이야. 알다시피 그거 하나론 복합식 경기를 하는 복싱 선수를 완전히 제압하긴 힘들어.’
‘근데 쟨 너무 빨라서 네가 감이 잡힐 때까지 상황을 지켜봐야 돼.’
‘네가 감이 좀 잡힌 것 같다 싶을 때 내가 신호를 줄게. 그럼….’
“잡아-!!!”
나는 정확한 순간에 버럭 소리쳤다. 서이수는 피하던 몸짓을 바로잡고 옆으로 파고드는 발을 이를 악물고 잡아냈다. 조선지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웃기지 마…!”
그러나 그녀는 이내 이를 악물며 잡힌 채이지만 반대로 발을 도약했다. 정확한 판단, 깔끔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읏!”
“!!”
그 회심의 일격은 서이수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
‘그래, 너 그럴 줄 알았다.’
왜냐하면 내가 서이수의 뒷덜미를 잡아채 그 공격을 회피시켰기 때문이었다.
경기를 뛸 때 태권도 기술이 골치 아픈 건 그 위력과 변칙 기술이다. 특히, 발을 잡아 공격을 막았다 싶은 순간 치고 오는 뒤 차기는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이제껏 봐 온 기술을 보건대 당연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싶어 모험을 걸었다. 발이 잡혀 당황을 해도 좋았고, 그대로 공격을 시도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발이 잡히는 순간 게임은 끝난 거니까.
“이건 반칙…!”
“아닌데?”
히죽, 웃으며 그녀의 상체를 제압했다.
“이건 경기가 아니라 게임이라고. 다른 팀과 연합해서 승리하는 것도 룰이야.”
“이 치사한…!!”
“흡!!!”
나는 그 말을 말끔히 무시하며 그대로 힘을 가해 쭉 밀어 버렸다. 중심을 잃은 조선지는 헛발을 내지르다가 그대로 선을 넘었다.
삐익-!!
“장외, 실격!”
그리고 심판의 휘슬이 울리며 판정이 났다. 나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손을 들었다. 곧 큰 손 하나가 가볍게 맞부딪쳐 왔다.
“수고.”
“엉.”
짝-, 하고 경쾌한 소리가 손바닥을 울렸다. 내가 먼저 수고를 알리자 서이수가 피로한 듯한 목소리로 간결히 대꾸했다. 이어 A 팀의 통과를 외치는 사회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경기장을 벗어났다.
“대충 하다가 실수해서 지진 마라?”
그 전에 충고 하나 정도 남기자. 아직 경기가 남은 서이수가 못마땅히 얼굴을 찌푸렸다. 남은 시간은 30초 정도. 하지만 서이수는 내게 그런 걱정 하지도 말라고 야멸차게 대꾸했다. 나는 픽 웃으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돌연 손목이 잡혔다.
“잠깐! 이건… 이건 난 인정 못 해!”
조선지는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납득하지 못한 듯 소리쳤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귀찮은 걸 숨기지 않고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있잖아. 네가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만… 그냥 하고 싶으면 하는 게 어때?”
“뭐?”
“너 태권도 다시 하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벙찐 듯 보였다. 예상치 못한 기습이라도 당한 것 같은 얼굴에 나는 떨떠름히 그녀를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안이 반대해? 아니면 환경이 어려워? 그게 아니라면 그냥 해.”
굳이 남을 발판 삼아 그 열등감 채워 봤자 뭐 하는가. 거기에 매여 있기엔 그 실력이 너무 아까웠다.
“보니까 실력도 꽤 좋더만.”
힘이 빠진 손을 손목에서 빼내며 나는 그녀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그 굳은 몸만 어떻게 해 봐. 응원할 테니까.”
이것은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조언이었다. 같은 선수의 길을 간 그녀를 위한 나의 오지랖이었으며,
“…내 몫까지 힘내.”
다시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그 길을 걷지 않은 나의 대리 만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