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같은 길, 다른 선택 (3)
첫 관문이 끝났다. 배틀 로열 경기의 결과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고찬영, 나, 서이수로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다른 쪽은 당연하게도 안경희, 이재현이 손쉽게 문제를 풀어냈고,
“H, Z 팀 정답입니다.”
“아자-!!!”
“으랴앗!!!!”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주연희와 이윤의 팀이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아이들의 파이팅 넘치는 힘찬 외침을 마무리로 첫 관문은 끝났다.
“자, 그럼 벌칙이 있겠습니다. 통과자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 주세요!”
그리고 남은 것은 벌칙의 시간이었다. 결과를 듣고서 반휘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곧장 내게로 향하더니 슥 내 팔을 들어 올렸다.
“응? 뭐…, 아얏.”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올려다보다가 나는 습격하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 결국 부었나.’
뼈가 상한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무리한 탓에 인대를 좀 다친 모양이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상태를 점검하고 있자 반휘혈이 몸을 숙이며 내게 말했다.
“무리하지 마. 여행은 내가 보내 줄게.”
그러곤 조심스럽게 다친 내 손을 제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깊고 검은 눈동자에 한순간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나 곧 파드득 정신을 차린 난 황급히 손을 빼내며 고개를 돌렸다.
“돼, 됐거든! 아직 멀쩡해.”
괜찮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나는 휙휙 팔을 휘둘러 보였다. 살짝 저릿하긴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서 더 무리하지만 않으면 주말 내로 다 나을 수준이었다.
“그리고 너 또 신혼여행 어쩌고 하면서 헛소리할 생각이지? 몇 번을 말하지만 난 안 받아 준다고 했다. 그냥 누나 동생으로 만족하는 게 어때?”
어차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미지, 너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니까 그놈의 약혼자 소리 좀 그만하라고 말하는데 반휘혈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잘랐다.
“싫어.”
“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잖아! 그럼 그놈의 약혼자나 신혼여행에 그만 집착해도 되는 거 아냐? 이해할 수 없는 시선으로 그를 보자 반휘혈은 뚱한 얼굴로 입매를 앙다물더니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싫으니까.”
뭐래, 이 자식이. 꽉 막힌 대답을 어처구니없어하고 있는데 벌칙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다 나는 어?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촤악-!!
한순간에 많은 물이 낙하했다. 물을 맞은 참여자들은 하나같이 죽상이었는데 그중에 예외가 있었다.
뚝, 뚝.
“……선배.”
“…….”
김시원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시선을 위로 올린 채 제 대신 맞은 여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뒷모습 때문에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김시원을 대신해 물을 맞은 조선지는 잠시간 그 물을 털지도 않고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휙, 몸을 돌렸다.
“!”
그리고 나는 그 얼굴에 움칫 몸을 떨었다. 조선지는 그런 내게 척척 다가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다음번엔 절대 안 질 거야.”
그 말을 전하는 그녀의 콧등과 눈시울이 붉었다. 얼굴은 맞은 물 때문인지 아니면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 때문인지 잔뜩 젖어 있었다. 나는 서럽고도 분함이 가득한 그 낯을 바라보다 이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다음엔 피구 빼지 않을게.”
조선지는 내 말에 입을 앙다물며 살짝 일그러트리더니 강하게 몸을 돌리며 성큼성큼 경기장을 벗어났다.
“선배.”
아니, 그 전에 김시원에게 말로 붙잡혔다. 조선지는 그의 부름에 움찔하며 발을 멈췄다. 살짝 위축된 그녀의 어깨가 죄책감을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김시원은 여상히 말했다.
“멋졌습니다. 저도 상대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로요.”
“!”
무심한 격려였으나, 굉장한 위력을 가진 말이었다. 조선지는 놀란 듯 그를 보더니 이내 파아앗-, 하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시원아….”
뒤의 말에 하트가 뿅 하고 달린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야…. 청춘이네.’
나는 그 모습을 떫은 눈으로 보며 김시원 저 자식도 유죄남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
“우와, 이수 진짜 대단한데요? 관장님 기분 좋으시겠어요?”
김서연은 방금 보았던 경기를 보며 감탄했다. 저 꼬맹이가 언제 저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훌륭한 경기 내용이었다. 어리다고 조금 만만히 봤는데 이젠 정말 어엿한 격투가가 아닌가. 조선지라는 학생의 실력은 살짝 부족한 감이 있긴 하나 사회자가 일러 줬던 대로 세계 무대에 어울릴 만한 인재였다.
“이나가 이수 코치하는 거 보셨죠?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완전 관장님 판박이던데, 역시 둘 다 관장님 자식이긴 하네요.”
곁에 있던 코치도 김서연의 말을 거들었다.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훌륭한 경기를 보아선지 꽤나 들떠 있었다. 마침 김서연도 경기에서 이기고 돌아온 후여서 그런지 기분이 더 좋았고 말이다.
“…….”
그러나 가장 기뻐해야 할 관장인 서이석이 유난히 조용했다. 그에 김서연이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관장님?”
“음? 아, 그래. 둘 다 잘했지.”
그를 건드리며 부르자 서이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반응했다. 그런데 말하는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표정도 어딘가 굳어 있는 게 석연찮았다. 김서연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아, 하고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아하~. 우리 이나 때문에 그런 거죠?”
“크, 크흠.”
정곡이었는지 서이석이 헛기침을 크게 내뱉었다. 김서연은 그 마음 다 안다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이나가 제대로 배우지 않은 것치곤 몸놀림이 엄청 좋긴 했죠? 아~ 진짜 아깝다! 역시 다시 한번 권유해 볼까요?”
당장이라도 설득해 볼 태세였다. 서이석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보다가 아직 경기장에 있는 자신의 딸을 보았다.
서이나는 멀대같이 큰 남자애 옆에서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멀대 같은 놈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왜 저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가 불만스러웠지만, 문득 자신의 딸이 둘러싼 환경이 보였다. 그녀의 곁엔 그 멀대뿐만 아니라 체육관에 다니는 다른 아이들,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 친구도 보였다. 그의 딸은 그 가운데서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아니.”
그래서일까, 서이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김서연이 그의 대답에 네? 하고 바로 반문했다. 서이석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곤 몸을 돌렸다.
“이만 간다.”
“어, 벌써요? 좀 더 있다 가지!”
“넌 더 구경하고 퇴근해. 박 코치. 너도.”
“아, 네. 안녕히 가십쇼!”
“내일 뵙겠습니다!”
서이석은 두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떠났다. 그리고 얼추 그들에게서 멀어지자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연결했다.
“아, 이나 엄마. 통화 가능해? 아니, 그냥. 뭐, 별건 아니고 오늘 애들 운동회라고 하길래 잠깐 들렸는데…, 팔불출이라니! 그냥 사람이 많이 몰렸길래 나도 좀 구경한 거야!”
항의하는 말투였으나 통화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부부는 그렇게 짧지만 단란한 대화를 나누었다.
***
“야, 방금 경기 존나 쩔지 않았냐?”
“시발, 나 완전 소름이었다. 도방중 오짱이래서 별 기대 안 했는데 둘 다 완전 개 쩔더라.”
“서이수가 그렇게 강한 줄 몰랐어!”
“조선지랬나? 세계 랭킹 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완전 날아다니더라.”
“역시 반휘혈 패거리가 물이 다르긴 엄청 다르네.”
잠시 쉬어 가는 시간, 교내의 관람객들은 방금 경기에 대해서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대개는 조선지와 서이수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였다.
“…….”
그런 수런거림을 잠자코 듣던 긴 흑발을 지닌 이는 무감동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크린은 조선지가 서이나를 압박하는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담고 있었다.
“야, 근데 서이나 조커 맞긴 해? 완전 데굴데굴 굴러다니더만.”
“진짜 소문 아냐? 안 그럼 그렇게 추하게 구를 수 있을 리가. 나라면 쪽팔려서 바로 반격한다.”
그러다 불쑥 어떤 대화가 그자의 곁을 지나갔다. 안경에 가려진 얼굴 너머로 눈썹이 살짝 튀었다.
“거참, 뭘 모르는 소리를 하네~.”
갑자기 그 곁으로 긴 장신의 남자가 섰다. 그러면서 남자는 심히 안타까운 것처럼 중얼거렸다.
“저 공격을 다 피한 게 쉬운 줄 아나? 저게 다 공격이 보이니까 할 수 있는 건데~.”
흐음. 하고 고개를 과장스럽게 젓는 이가 씩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렇지 않나요?”
마치 아는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친근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남자에게 불린 이는 안경 속에서 눈을 첨예하게 세우며 말없이 그를 경계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전 단지 말이 통할 것 같은 상대에게 말을 건 것뿐이거든요. 당신이라면… 저분, 아, 이게 아니지. 저 아가씨의 실력에 대해 얘기가 잘 통할 것 같았거든요.”
그러자 그 기색을 눈치챈 남자가 방글거리며 뻔뻔히 말했다. 정장과 선글라스를 쓴 그는 사방에 세워진 경호원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남자의 태도는 일을 하는 것치고는 너무 불성실해 보였다. 안경 너머로 그를 훑던 이는 이내 감흥 없이 시선을 돌리곤 기대던 나무에서 몸을 떼어 냈다.
완벽한 무시였으나, 남자는 오히려 더 미소를 깊게 지었다. 간계를 꾸미는 것 같은 여우 같은 미소였다. 그는 떠나려는 이에게 여상히 물었다.
“그런데, 그 머리는 이미지 변신인가요? 전 이전의 색이 더 좋았는데.”
멈칫, 떠나던 발걸음이 세워졌다.
“아, 물론 그 색도 잘 어울려요! 역시 검은 용의 자식들답게 짙은 검은색도 잘 어울리네요~.”
그런데 말이죠. 남자는 입꼬리를 짙게 그렸다.
“태양에 반사될 때의 그 푸른색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좀 아쉬운걸요? 아가… 아, 지금은 좀 다르게 불러야 되나요? ㄷ….”
남자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러곤 시선을 힐끗 내리며 히죽 웃었다. 어느샌가 제 목을 향한 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을 손에 쥔 이의 눈은 당장이라도 목을 꺾어 버릴 것같이 짙은 살기가 그득 담겨 있었다. 남자는 그 등골이 섬뜩해지는 눈을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두 손을 든 채 뒤로 물러섰다.
“아, 제가 너무 배려가 없었네요. 역시 그 모습은 아가씨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죠.”
항복을 외쳤으나 목을 향한 손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 손의 주인은 제 눈앞에 있는 이 불순분자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빠르게 두뇌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그 머릿속을 예측하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이 손 좀 거둬 주시면 안 될까요? 여기서 그 모습으로… 소란을 일으킬 게 아니라면요.”
“…….”
그 말에 손이 차츰 놓였으나, 살기는 거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았는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 제가 왜 당신에게 말을 걸었는지 궁금하시겠죠.”
그 말에 안경에 가려진 눈이 좁혀졌다. 남자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용건을 전했다.
“간단해요. 단순히 말하자면… 스카우트 제의죠.”
빙긋, 남자가 웃었다. 그 말을 들은 이의 눈이 와락 일그러지며 입이 달싹여질 때,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아! 나라 님! 여기예요, 여기! 좋은 자리 맡아 놨으니까 빨리 와요!”
남자를 부르는 소리였다. 나라 님이라고 불린 남자는 싱긋 웃으며 알겠다고 소리친 후 곁에 있는 이를 돌아봤다.
“아, 일행이 절 부르네요. 뭐, 더 얘기하고 싶지만 이만 가도록 하죠. 자, 여기 명함.”
척, 하고 남자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손에 명함을 얹었다. 저도 모르게 명함을 받아 들자 남자는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일자리 궁해지면 거기로 연락해요~. 자세한 건 그때 얘기하죠.”
뭐, 안 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갈지도 모르지만. 남자는 속내를 삼키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싸늘히 바라보던 이는 명함을 강하게 움켜쥔 채 짧게 혀를 차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거 뭐 하는 또라이 새끼가.”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더니 이내 다시 혀를 차며 뒤로 돌아섰다. 그러곤 품에 있던 폰을 꺼내 어느 한 곳에 연락했다.
[돌아간다.]
문자를 보내고 몇 초. 지잉- 하고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빠르군요. 흥미가 떨어지셨나요?]
흥, 문자를 확인한 이는 코웃음을 가볍게 쳤다.
“그럴 리가.”
오히려 더 흥분돼서 미치겠는데. 살기등등한 미소가 그 얼굴에 어렸다. 그것은 사냥감을 만난 맹수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