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48화 (248/306)

248. 격동하는 운명의 수레바퀴 (1)

***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구경하던 와중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해지길래 고찬영을 이끌고 부리나케 달려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개판 1초 전이었다. 그래서 황급히 나는 반휘혈의 옆구리를 향해 태클을 걸어 그를 막았다. 체력 고갈과 팔 부상으로 인해 힘이 달리긴 했지만 눈치 빠른 고찬영의 도움 덕분에 최강혁 쪽도 제압해서 큰 사고로 이어지는 건 면할 수 있었다.

“하여간 너 진짜 왜 쟤랑만 엮이면 성질을 못 참…, 음?”

그래도 이 생각 없는 놈을 향해 한 소리는 해야 될 것 같아 반휘혈에게 잔소리를 우다다 퍼붓던 중 문득 어수선하던 뒤쪽이 조용해짐을 눈치챘다. 느낌이 이상해 고개를 돌려 보자…,

“…….”

어딘가 할 말을 잃고 묘하게 굳어 있는 최강혁을 발견했다.

“?”

쟤 왜 저래? 나는 의아함에 붙들고 있던 반휘혈의 몸을 떼어 냈다.

“어.”

그러자 반휘혈이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몸을 움찔거렸다. 반사적으로 다시 그를 보자 반휘혈은 왠지 모르게 못마땅한 것처럼… 아니, 싫다는 것처럼 불만 어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

뭐지. 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지. 내 기분 탓이 아니라면 이건 내가 떨어져서 싫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이건 내 자의식 과잉인 걸까? 어째서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날 보고 있는 거냐. 반휘혈.

나는 잠시간 녀석과 눈씨름을 하다가 이내 휙 돌려 버렸다. 등 뒤로 집요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거, 후배 씨. 진정 좀 됐나?”

귀찮다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다가가자 최강혁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져 왔다. 최강혁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곤 팍, 하고 거세게 붙잡힌 팔을 뿌리쳤다. 고찬영은 순순히 물러나며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인지 두 손을 들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 젠장.”

그런데 최강혁의 태도가 아까부터 이상하다. 그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더니 한탄인지 모를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시발. 안 하던 짓거릴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음?”

저건 또 뭔 소리래. 이해되지 않는 말에 나는 얼굴을 대번에 찌푸리며 떨떠름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최강혁은 더 할 말이 없었는지 훌쩍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뭐야, 저 녀석.”

당최 이해되지 않는 녀석의 행동에 눈썹만 찌푸리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우-! 졌어어어-!!!”

“하하, 수고했어. 윤아.”

“…….”

경기가 끝나자 한도훈이 놔줬는지 이윤이 울상을 잔뜩 지은 채 다정한에게 하소연을 했다. 다정한은 그런 이윤의 어깨를 도닥이며 위로해 줬다. 그리고 곁에 있던 서강이는 어딘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우중충하니 쭈그려 앉아 있었다.

쟤는 또 왜 저럴까, 라는 생각을 1초 정도 했던 찰나 나는 그 이유를 알아챘다. 아, 방금 내가 제시한 거 못 지켜서 저러는구나. 그렇게나 계주를 뛰는 게 싫었던지 서강이는 흔치 않게 시무룩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쭈그려 앉은 서강이에게 다가가 그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서강이가 의기소침한 낯으로 시선을 올렸다. 우와, 볼수록 귀엽네. 이거.

“수고했어, 서강이. 이제 쉬어도 돼.”

왠지 커다란 강아지 같아 머리를 헝클어 주며 칭찬을 담아 보상을 내렸다. 그러자 내 말의 뜻이 당장 이해가 안 되었는지 어리둥절한 눈이 따라왔다. 나는 그런 그에게 히죽 웃으며 유쾌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야~. 역시 서씨는 다르네! 내 안목은 틀림없다니까! 너 아니면 누가 쟤네들을 막냐? 어차피 한 놈은 통과할 거라 생각했어. 걱정 마, 걱정 마. 나 그렇게 야박한 사람 아니야.”

원래부터 무리한 요구였다. 그것을 받아들인 건 서강이이긴 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박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최강혁과 다정한을 동시에 막으라니! 미친 소리지. 다른 애들에게 부탁했다면 가차 없이 기각당했거나 오만 불만을 들었을 거다. 하지만 서강이는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하려 했고 1초까지 버텨 내는 데 성공했다. 이만하면 훌륭하지 않은가. 나는 대견한 마음에 그의 어깨를 신나게 두드려 준 후 몸을 일으켰다.

“자, 쉬어, 쉬어. 뒷일은 다른 애들한테 맡기고.”

손을 내밀어 일어나라 손짓하자 서강이가 눈을 멀뚱히 깜빡였다.

파아앗-.

그러다 얼마 안 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그의 분위기가 환해졌다. 서강이는 내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표정은 그리 달라질 바가 없었지만 분위기가 참 다채로운 친구였다. 어쩐지 예전에 내가 김시원에게 서강이 챙기는 거 안 힘드냐고 했을 때 돌려줬던 말이 떠올랐다.

‘음. 그렇긴 한데… 보다 보면 재밌어서요.’

그땐 뭔 소린가 싶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 말의 의미가 확 와닿았다. 자고 있을 때는 그렇게 곰탱이 같더니 깨어 있을 땐 커다란 대형견 같아서 귀여웠다.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어서 가서 쉬라고 그 등을 밀어 주자 서강이가 내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고 내려갔다.

허허, 녀석. 귀여울 뿐만 아니라 예의도 바르네.

볼수록 정감 가는 녀석이로고. 이웃 어른처럼 흐뭇하게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이윤이 덥석 내 팔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누나! 도훈이 정말 저한테 너무한 거 아니에요?! 흐잉, 나도 게임 참여하고 싶었는데!”

“아, 미안. 난 이번엔 도훈이 편이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선을 바로 그었다. 우승이 걸린 문제는 냉정한 법이란다, 윤아. 단칼에 잘라서 말하자 이윤이 배신당한 것처럼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그런 귀여운 외모에 통하는 내가 아닌지라 나는 유유히 그에게서 벗어났다.

“아, 맞아.”

아니, 그러려다가 문득 방금 전 일을 떠올리곤 다시 발을 멈췄다.

“윤아, 최강혁이 안 하던 일을 하던 게 아니라고 성질부리던데, 그게 뭔 의민지 알겠어?”

방금 전, 최강혁이 잔뜩 짜증을 내며 떠나갔던 일이 떠올라 묻자 이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빡이다가 이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으음~. 확실히 답지 않게 군소리 없이 이런 게임에 참여하구-, 성질 죽여 가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여학생이랑 파트너를 하는 거 자체가 기적이긴 하죠오? 그치~, 정한아!”

“그렇긴 해.”

이윤의 근처에 있던 다정한이 동조의 뜻을 보였다. 나는 그 말을 잠자코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모르겠다.’

남주의 속사정을 알 도리가 없었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였다는 게 굉장히 거슬리지만 그 연유를 파악하는 게 좀체 가늠이 되질 않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진짜 신기하긴 하네요~. 무슨 생각이지~?”

이윤이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나는 글쎄, 하고 말을 대충 흐리며 무대에서 내려갔다.

무대에서 내려가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벌칙 타임이었다. 이번 벌칙도 물 폭탄이 장전된 의자에 앉아 물을 맞는 거였다. 물은 맞는 건 참여자들이 아닌 그 파트너였으나, 예외적으로 주전이 나서서 자신이 맞겠다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시로 고찬영의 파트너인 김철수라는 친구와 한도훈이 있었…,

“응?”

…아니, 잠깐. 한도훈이 왜 저기 있어? 나는 당황스러움에 벌칙 의자에 앉아 있는 한도훈을 봤다. 경기 관계자들도 우왕좌왕하는 게 보이는 걸로 보아 그의 독단적인 결정임을 알 수 있었다.

“야, 한도훈. 왜 네가 거기 있어? 경희는??”

물론 내 친구가 벌칙을 받아도 된다는 건 아니다만, 한도훈이 이렇게 나서서 벌칙 수행을 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놀란 마음에 말을 걸자 한도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지금 바쁜 거 같아서요.”

“어?”

나는 반문하다가 문득 아까 안경희가 구석진 곳에서 바쁘게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 녀석이 안경희 대신 맞아 줄 의리를 갖춘 놈이라고 생각은 들지 않아 내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야- 재밌잖아요?.”

내가 의심을 거두지 않자 한도훈이 히죽 웃어 보였다.

“저희 그룹의 전산망을 뚫어도 되냐고 하는데… 할 수 있다면 해 보라죠. 저도 결과가 궁금하네요.”

“…….”

미친놈인가. 나는 한도훈은 정색하며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쟤는 지금 안경희가 기업의 전산을 뚫어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고, 그것을 허락했다 이거지? 그 사실에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저 새끼 미친놈인가.

아무리 흥미가 생기고 호기심이 어려도 그렇지, 그걸 허가해 줘? 저 오만 덩어리의 웃음을 보고 있자니 못 뚫을 거란 자신감과 함께 뚫으면 뚫는 대로 재밌어할 게 분명했다. 하여간 저놈은 너무 또라이 같을 때가 있어서 가끔 거리감 느껴진단 말이지. 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빨리 물이나 맞아 버려라.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중 아직도 실랑이가 끝나지 않는 팀들이 있었다.

“찬영아, 내가 맞게 해 줘…! 난 쓰레기야!!!”

“아니, 그럴 필욘…. 원래부터 내가 괜찮다고 했고…?”

“내가 한 일이라곤 구석에 박혀서 구경한 거밖에 없어! 내가 맞게 해 줘-!!”

앞서 말했다시피 죄책감에 절여진 김철수 군이 그러하였으나, 문제는 이것이 다른 팀에게도 속출했다는 부분이었다.

“내가-! 내가 맞을게-!! 원래부터 내가 맞는 거잖아, 윤아!!”

“하지만 내가 늦었는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내가 맞을게. 재현아.”

“아니, 괜찮아. 고생했으니까 내가 맞을게.”

“하지만 내가 통과할 수 있었는데 내 판단으로 져 버렸는걸.”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저거 언제 끝나. 나는 아직까지도 누가 벌칙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열띤 실랑이를 벌이는 세 팀을 흐린 눈으로 보았다. 그냥 적당히 타협하고 아무나 맞았으면 좋겠다.

“좀 작작 해, 이 인간들아-!!!”

그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좀체 결정이 되질 않자 인내심의 한계를 맞은 서이수가 끝내 폭발했다.

“타협 안 되면 그냥 원래 벌칙자들이 맞아! 그럼 된 거잖아!!”

결국 시간상의 문제로 인해 서이수의 의견대로 진행됐다. 그리고 벌칙자 명단이 명단인지라 물에 맞은 이들을 보고 관객이 한차례 들끓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스태프에게서 수건을 받아 와 아이들에게 건네주러 다가갔다.

“아, 언니! 저도 도울게요.”

“어, 응. 그래 줄래?”

그때 내 모습을 지켜봤는지 주연희가 내게 다가와 수건 몇 개를 가져갔다. 그러곤 그녀는 총총총 어딘가로 다가갔다.

“자, 이수야. 수고했어!”

음? 나는 가장 먼저 물을 맞은 여학생에게 건네준 후 한도훈과 고찬영에게 수건을 던져 주려다가 발을 멈칫하곤 눈을 멀뚱히 깜빡였다.

“너 아까 엄청 대단하더라!”

“헹, 이까짓 일이야. 껌이지.”

받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 서이수가 허세를 부렸다. 주연희는 맑게 웃으면서 그를 연이어 칭찬했다. 나는 그 대화하는 모습을 어리벙벙하니 지켜보다 당황스럽게 중얼거렸다.

“…뭐야? 쟤네들 언제 친해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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