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49화 (249/306)

249. 격동하는 운명의 수레바퀴 (2)

***

까득-.

초조하게 이가 부딪힌 손톱에서 작은 울림이 새어 나왔다.

‘한도훈, 이 망할 새끼, 또라이 새끼…!’

백장미는 이를 아득 깨물며 얼굴을 구겼다. 그녀는 현재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있었다. 건물 밖으론 사람들의 환호성이 잇따라 들리는 가운데 그녀만은 즐길 수가 없었다.

‘감히 날 우롱해…!!’

이벤트가 시작하기 전에 무시당한 것과 더불어 이벤트 이후에도 어떠한 관심도 받질 못했다. 오히려 최강혁이 군소리하지 않고 주연희라는 듣도 보도 못한 계집과 짝을 이룸으로써 주위에서 겨누어 보는 같잖은 동정의 시선. 그것이 구역질이 나게 만들었다.

‘그딴 시선 보내지 말란 말이야-!’

퍽! 둔탁한 소리가 벽을 두드렸다. 거칠어진 성정에 호흡마저 씨근덕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주먹을 말아 쥐며 바들바들 떨어 댔다. 조명이 켜진 어둑한 복도와 태양의 빛이 뚫지 못한 벽으로 인해 그녀는 완전히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난 불쌍하지 않아. 나는, 난 쓸모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쓸모를 다해야만 해.’

분노와 수치로 인해 이성이 흐려진 그녀의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어떻게 해야만 쓸모를 증명하는가. 그녀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방법을 강구했다.

‘…같은 붉은색이네.’

그때 불현듯 과거의 잔상이 그녀의 귀에 속삭여 왔다. 백장미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려 눈앞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있는 건 먼지 낀 복도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고요한 정적을 내다 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그녀의 손가락이 제 붉은 머리칼을 살그머니 붙잡았다.

“난 너와 같아.”

유려한 손끝이 머리칼을 들어 올려 그 끝에 입을 맞추었다. 살포시 가져다 댄 머리칼을 떨어트리자 그녀의 입가엔 고혹스러운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네 곁에 있는 건 나뿐이어야 해.”

그렇지? 혁아. 달콤한 속삭임이 공중에 뿌려졌다. 사랑이든 뭐든 상관없다. 그의 곁에 오롯이 설 만한 대등하고도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은 저뿐이니.

“하지만 벌레 따위로 인해 잡음이 끼는 것도 불쾌한 일이지.”

평상심을 되찾은 백장미는 눈을 날카로이 빛내며 붙잡은 머리칼을 놓았다. 그러곤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연락했다.

“후훗.”

액정이 꺼져 검게 물든 화면엔 아름다운 미소를 살포시 머금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잔잔히 나부끼는 바람과 함께 머리를 넘기며 우아한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

여주랑 동생이 친해졌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나는 복잡한 눈으로 출발 대기 선에 같이 선 주연희를 보았다. 최종 관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지막 시설 점검으로 인해 잠시 쉬는 동안 참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작년부터 그리 걱정하진 않았지만 이로써 서이수는 악역의 엑스트라 똘마니 신세를 확실히 벗어난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과 얽힌 만큼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만 얽힌 거면 상관없는데.’

잘못해서 괜히 동생에게 피해가 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나는 이전에 일어났던 운명 같은 건 알지도 못했고, 또 알 방도도 없었다. 인소를 읽었던 경험 덕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쳐도 의연히 넘길 수 있었지만 동생이 엮인다면 과연 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복잡해지는 마음에 얼굴이 저절로 뚱하니 찌푸려졌다.

‘…최강혁, 이 새끼는 뭐 하고 있는 거지?’

명색이 남자 주인공이라는 놈이 여자 주인공에게 엑스트라보다 못한 입지를 다지게 생겼다. 게다가 게임하면서 그렇게 둘이 붙어 있어 놓고 로맨스의 ‘로’도 안 보이다니 말이 되는가. 오히려 그 잠깐 사이에 서로 악감정만 더 깊어진 것 같아 보였다. 현재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서 서로 찬바람 쌩쌩 불고 있는 두 사람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놈의 운명대로라면 둘이 알콩달콩까지는 아니어도 새콤달콤한 분위기라도 감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다 추측일 뿐이긴 하지만! 나는 묘하게 이는 불안감에 무릎을 문질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최종 결승, 마지막 관문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나는 사회자의 말에, 생각에 잠겼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준비를 하기 위해 일어서 반휘혈을 보았다.

“가자, 휘혈…, 휘혈아.”

그러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곤 떫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넌 아까부터 왜 그리 뚱한 건데?”

불만이 아주 많아 보이는 시선에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눌렀다. 반휘혈은 내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세모꼴로 삐죽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야 보네.”

“어?”

“내가 옆에 있잖아. 왜 자꾸 다른 사람 봐.”

“…….”

물어본 내 잘못이다. 나는 할 말을 잃고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뜨겁다. 이 소리를 다른 사람이 듣지 않아서 참 다행…,

“웩.”

…이 아니었네. 나는 언제 다가왔는지 모르게 옆에서 헛구역질을 대놓고 하며 질색하는 최강혁을 발견하곤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뭐. 피해자는 나 아닌가? 지나가던 길에 저딴 소릴 듣는 내 고막이 다 불쌍하다.”

“조용히 하고 지나가라. 그냥.”

띠꺼운 내 시선을 마주한 최강혁이 시비를 걸어 오자 나는 귀찮음을 숨기지 않고 대꾸하며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주연희와 눈이 마주쳤다.

“!”

그러자 주연희가 깜짝 놀란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얼굴을 살짝 붉히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헤맨 채 머리를 매만졌다.

“그, 휘, 휘혈이는 굉장히 직설적이네요.”

“직설이어도 너무 직설적인 거지! …이거 칭찬 아니다. 휘혈아.”

내 말에 반휘혈의 표정이 묘하게 핀 걸 발견한 내가 바로 타박해서 부정하고 있는데 돌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겠다.”

“어?”

제대로 듣질 못해 고개를 돌리자 어딘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듯 머리를 꼬고 있는 주연희가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미간을 의아한 듯 좁히며 재차 물었다.

“방금 뭐라고?”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하하.”

주연희가 화들짝 튀며 황급히 손과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어색한 몸짓으로 게이트 쪽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

나는 그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털어 냈다.

“…호오?”

그런데 최강혁이 눈썹을 휘며 무언가 재밌다는 것처럼 입꼬리를 휘었다. …그 모습 덕에 나는 최강혁이 방금 전 주연희가 했던 말을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모르는 대로 살자.’

하지만 왠지 모르게 더 간섭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모르는 채로 있기로 했다.

“자, 그럼 이번 게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게이트 앞에 최종 결승 후보들이 서자 관객의 환호성과 함께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이번 게임은 바로 이인삼각! 그리고~~! 진실! 혹은~ 거짓! 거짓이 아닌 진실일 때에 비로소 관문이 통과되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게임입니다!”

사회자가 설명한 룰은 이러했다. 이번은 이전과 다르게 두 사람이 모두 출전하는 방식이며 처음엔 이인삼각으로 두 사람이 함께 출발한 후 목적지에 다다라 각각 뽑은 제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진실로 내뱉으면 되는 게임이었다. 게이트가 두 개인 이유는 각 팀의 출발선을 구분 짓기 위함과 속도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

나는 그 설명을 듣고는 어깨에 힘을 풀었다. 혹여라도 최강혁과 육탄전을 겨룰 상황은 피했다는 마음에 한시름이 놓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맛 나겠는데. 아무래도 이번 승부는 우리 팀이 이기겠…,

“바로바로 대답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과연 어떨지! 그럼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어, 잠깐. 나는 의뭉스러운 사회자의 멘트에 멈칫했다. 도대체 무슨 질문을 섞어 놨길래 저래? 나는 당황스러움에 동공을 흔들었으나 가차 없이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가 움직였다.

아, 젠장. 우선 가고 보자!

나는 가출하려던 정신을 붙잡고 카운트에 맞춰 반휘혈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섰다. 게이트 앞에 놓인 끈을 빠르게 다리에 묶은 후 나는 자연스럽게 녀석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반휘혈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른 걸 확인한 후 우리는 구령에 맞춰 발을 뗐다. 훗, 순식간에 돌파해…,

“자, 하나…, ?!”

우당탕-!

발을 떼기 무섭게 넘어졌다. 나는 얼떨떨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곤 반휘혈을 노려봤다.

“야! 다리 너무 크게 벌렸잖아! 네 길이랑 내 길이랑 완전 다른 거 몰라?!”

발을 떼는 순간 훅 벌어지는 다리에 채 반응하지 못한 내가 중심을 잃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배려 없는 자식! 너 다리 긴 거 자랑하는 거야, 뭐야?!

“안 그래도 같이 다닐 때 나 거의 뛰고 있는 거 알아, 몰라? 어?!”

나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녀석을 노려보고 있자 반휘혈이 어딘가 놀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마치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을 자각한 것처럼. …아니, 이 자식. 진짜 몰랐단 말이야? 내 다리랑 네 다리가 그렇게 차이가 나는데? 어이가 없었으나 이렇게 계속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끙차, 하고 곡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선 후 그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하여간 내 보폭에 맞춰, 알았어?”

“…….”

끄덕. …어쩐지 멍해 보였지만 고개를 움직였으니 괜찮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자세를 갖췄다.

“자, 그럼… 음?”

나는 문득 시야에 잡힌 무언가를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기둥 살짝 기울였…, 아닌가?’

그러다 이내 별거 아닐 거란 마음에 그냥 다시 구령을 시작했다.

“자, 그럼 다시 하나, 둘. 하나, 둘.”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보폭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발의 보폭을 맞추는 게 어려운지 반휘혈이 틈만 나면 좀 더 다리를 벌렸다. 덕분에 몇 번을 더 휘청이고서야 목적지에 다다랐고, 예상과 달리 너무 늦게 도착해 버렸다.

그러나 호흡이 맞지 않았던 건 Z 팀도 마찬가지였는지 막 도착한 모양새였다. 도착하자마자 끈을 풀어낸 두 사람은 한껏 짜증이 어린 낯이었으나, 그래도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기에 별 불만을 내뱉지 않고 주연희가 먼저 앞에 있는 거짓말 탐지기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 타이밍에 맞춰 스크린에서 문구가 회전하듯 뒤바뀌었다. 그리고 주연희가 버튼을 신중히 누르자 문구가 멈추었다.

[Q.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은?(*없을 시엔 없다, 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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