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2)
오래된 꿈을 꾸었다. 이제는 흐려지고 잔상만이 남았던 그런 낡은 꿈을.
“…….”
끔뻑. 각성한 정신에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까지 아른거렸던 푸른빛의 잔상이 눈앞에 맴도는 것 같았다. 흐린 시야를 맞추기 위해 느리게 감고 뜨기를 반복했다. 서서히 잡히는 시야에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병원.’
또 응급실인가. 나는 팔에 놓인 링거와 하얀 천장 그리고 가려진 커튼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 무뎌지고 무거운 몸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들춰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난 진 건가.
욱신. 멍한 머리와 다르게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현실과 분리된 듯한 괴리에 숨쉬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았다.
그, 아니, 그녀는 분명 내가 아는 그 챔피언이었다. 비록 나이는 내가 알고 있던 나이보다 두 살은 더 어렸으나 틀림없었다. 얼굴만 같은 게 아니라 그 움직임. 그 유연함과 날렵함은 쉬이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하…. 이따위 상태로 무슨 배짱이었는지.”
이전 세계에서도 3타이틀에 이어 5타이틀 챔피언까지 갔던 그녀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서열 1위까지 차지한 챔피언에게 부상자의 몸으로 덤벼들다니. 정말 미친 게 아닐까? 무엇보다 그녀와 싸우면 골절상은 기본이라 했다.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봐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 쉽게 눈을 뜰 수 있었을까.
‘아, 그렇지. 도와준 사람한테 인사를 해야지.’
지금은 옆에 없는 걸 보니 잠시 자리를 비웠나 보다. 나는 옆에 놓인 낯선 가방 하나를 보곤 그리 짐작했다.
“…….”
도와준 은인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머리도 어쩐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나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난 왜 싸움을 승낙한 거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복잡한 생각을 하려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엄청 힘든 하루였던 것도 같은데…. 그것을 자각하자 깊은 피로감에 다치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깊게 쓸어내렸다.
‘이걸 보고 운명이라 하나? 이야~. 니 만나러 왔는데 이렇게 내를 반겨 주고 있을 줄 몰랐다 아이가.’
움찔. 불현듯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에 나는 손을 잘게 떨었다.
‘서이나.’
챔피언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서이나, 니한테 흥미 있다- 뭐 이런 뜻, 아니겠나.’
챔피언이 나를 알고 있다.
‘내랑 싸우자. 서이나.’
챔피언이 나에게 관심을 표했다.
“하, 하하.”
…아니, 사실 싸움을 받아들인 이유 따윈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알고 내게 관심을 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들뜨고 만 거다. 상황 분간 못 하고 멍청이처럼 제 상태를 돌아보지 못하고 분수에 맞지 않게 몸부터 드밀고 만 거다.
그리고 결과가 이 꼴이다.
“실망했겠지.”
부산에서 친히 나를 보러 오기까지 했는데 결과가 심히 무참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거다. 다름 아니라 이 결과에 그 누구보다 실망한 건 바로 자신이었기에, 그 비참함에 가슴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하, 하. …윽.”
공허한 웃음을 내뱉던 웃음소리가 멎어지고 잇새로 신음이 잘게 새어 나왔다. 나는 베개를 끌어와 얼굴 위로 덮었다. 그러곤 그 위를 강하게 짓눌렀다.
분하다.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녀에게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비참했다.
정태이라는 챔피언을 마주한 그날, 나는 그날의 경기를 한눈에 담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홀린 듯 그 경기를 바라보았다.
웃고 있어.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어째서 즐거운 걸까. 승리를 쟁취했을 때 미소 짓는 그 모습이 너무나 유쾌해 보였다. 그 힘찬 미소에 나는 심장이 뛰었다.
내가 링 위에서 웃은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니, 웃었던 적은 있던가. 까마득한 옛날 첫 경기에서 웃었을까? 그때만은 아빠에게 인정받았다는 기쁨에 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게 있어서 복싱은 의무이지,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내게 목적이 생겼다. 링 위에서 빛나던 그녀를 동경했다. 나와는 달리 웃으며, 즐기며 경기를 하는 그 모습을 멋지다고 또 부럽다고 생각했다.
‘체급 변경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정태이 선수가 라이트급 챔피언 타이틀 방어전을 치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결정을 내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 체급인 페더급을 포기하고 라이트급으로 올린다는 것, 기본 체급을 포기하고 몸무게를 증량한다는 건 절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몸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고 그러면서 그 체격에 적응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 체격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경기에 임할 수 있는가. 그것 또한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처음엔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나 또한 내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유는 단 하나. 정태이와 싸워 보기 위해서.
당신을 이기면 내 세상도 달리 보일까.
그런 막연한 기대를 안았던 것도 같다.
하지만 끝내 나는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던 자리다. 미련은 가득했으나 현실은 비정했다. 나는 마음을 잘라 내듯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다시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본능의 경고에 링 위는 쳐다도 보질 않았다. 선수를 은퇴하고 구한 일도 그와는 완전히 별개였던 사무직종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드디어 그녀에게서 미련을 벗어던졌다고 생각했다.
왜 챔피언이 내 앞에…?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그녀를 마주하자 잊고 살았던 낡은 감정이 순식간에 일깨워졌다. 이제는 얼굴마저 흐릴 줄 알았는데 그 얼굴을 마주치니 과거에만 머물렀던 그 영광스러운 자태가 단번에 되살아났다.
그래서 나는 승낙했다. 다시 없을 기회라 여겼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져도 상관없다고 그리 생각했던 것 같다.
“윽, 으읏, 으…아…!!”
그러나 아니었다. 나는 이 순간 자신의 만용을 깨달았다. 그동안 이 세계의 버프를 믿고 되지도 않는 객기를 부렸음을 깨우쳤다. 그렇기에 괴로웠다.
‘지금의 나’로서는 정태이란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단 사실이. 미치도록 분하고 괴로웠다.
나는 괴로운 만큼 베개를 억눌렀다. 숨이 짓눌려 괴로웠으나 심장이 아픈 것보다 나았다. 한참을 고통에 몸부림을 치던 나는 일순 힘을 뺐다. 툭, 팔이 힘없이 침대 위로 늘어졌다. 잔뜩 거친 숨으로 인해 상체가 크게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내를 실망시키지 마라. 서이나.’
“…….”
나는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손으로 크게 쓸어내렸다.
“……그래.”
잔뜩 갈라진 목에서 작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러곤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내 가방 안쪽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뚜르르- 달칵.
[…이나야! 지금 어디니?! 모, 몸은 어때?! 아빠가 지금 거기로 갈 테니까…!!]
“아뇨. 아빠.”
통화음이 짧게 끊어지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런 아빠의 말을 덤덤히 자르며 말을 이었다.
“집에 계셔 주세요. 제가 갈게요.”
[…뭐?]
“그리고….”
나는 잠시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것을 찰나였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각오를 다진 듯 단단히 말을 내뱉었다.
“할 말이 있어요.”
***
부우웅-.
쏴아아-.
고요한 엔진 소리와 차창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울렸다. 비로 얼룩진 뿌연 창가를 고요히 바라보던 이는 어딘가 침체되어 있었다.
“도련님.”
김율이 룸 미러로 그 광경을 힐끗 확인하고 그를 호명했다. 하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고 침묵한 채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김율은 그런 그의 반응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김율.”
호칭이 달라지자 곧장 반응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뒷좌석에 앉아 있던 이의 얼굴은 서늘히 가라앉아 김율에게 낮게 경고했다.
“입방정 떨지 마라.”
그 입을 또 잘못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강한 압박이 전해졌다. 하나 그것을 정면으로 맞는 김율은 익숙한 듯 평이하게 대답했다.
“도청이라면 걱정 마시길. 점검은 끝냈습니다.”
“그 말이 아니… 아, 됐다, 마.”
뻔뻔한 김율의 대꾸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고, 대신 더 귀찮게 하지 말란 의미로 손을 대충 휘적였다.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해 주시길.”
김율은 운전대를 돌리며 평이하게 대답했다.
“저도 아가씨로 부르는 게 오랜만이라 들뜬 모양입니다.”
“…그게?”
“들뜬 겁니다.”
황당해하는 음성에 김율은 진지하게 말했다.
“태이 아가씨.”
정태우, 아니 정태이는 얼굴을 구겼다. 그러곤 못마땅한 듯 질린 낯을 지었다.
“니는 얼굴 근육이 와 그따구가.”
평소와 너무 똑같아서 들떴다는 말을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저렇게까지 표정이 일을 안 하다니. 어릴 때부터 변함없이 재미없는 새끼다.
“? 전 굉장히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아, 그래그래.”
“흠.”
성의 없는 대답에 김율이 눈썹을 살짝 휘었다. 하지만 곧 관심을 끊은 그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실망하셨습니까.”
“머. 니 낯짝? 니 존나 재미없는 거 어데 하루 이틀이가.”
“조커 말입니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던 정태이는 갑자기 들려온 단어에 움찔 몸을 굳혔다.
“꽤나 기대하셨죠. 그분과의 결투.”
“…….”
“또 아무리 다쳤다곤 하더라도 순순히 놓아준 것도 의외였습니다.”
보통 그런 적 없지 않습니까. 김율의 말에 정태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차창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렇지.”
김율의 말대로였다. 확실히 정태이는 이런 가벼운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다친 걸 뒤늦게 파악했을지라도 싸움을 시작한 이상은 끝장을 보는 성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결정 또한 자신을 얕잡아 본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도전할 거란 법도 없죠.”
게다가 다시 싸움을 걸라고 하기까지. 주인의 이례적인 대응 방식에 김율은 나름 꽤 놀란 상태였다. 그게 표가 나지 않았을 뿐. 그는 조커인 서이나가 자신의 정체를 가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런 성향상 다시 도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나 그 말에 정태이는 코웃음을 쳤다.
“니가 가 눈깔을 안 봐서 그런 기다.”
제 아래에서 짓밟혀 있음에도 공포가 아닌 분함이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절대 꺾이지 않던 그 투지는 위에서 그 몸을 압박하던 정태이의 등골에도 오싹한 전율이 일게 만들었다.
그래서 정태이는 그녀가 부상자임을 알고 마음을 바꾸었다. 평소라면, 패자면 패자답게 짓밟을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놓아주면 어떻게 될까. 김율의 말대로 꽁무니를 빼고 도망칠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런 놈은 쉽게 포기 안 한다.”
기필코 자신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이를 갈고 또 갈 것이 틀림없었다.
“…고찬영, 금마는 딱 지 같은 얼라를 친구로 사귀었구만.”
그리고 그와 비슷한 눈으로 자신을 봤던 다른 한 사람을 떠올리며 정태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잘게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