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3)
***
고찬영은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으나 한도훈이 막아섰다. 반휘혈도 같이 데려가야 한다는 차주의 강한 주장에 하는 수 없이 고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반휘혈은 그 잠시 동안 대체 어디까지 간 건지 보이지도 않았고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고찬영과 한도훈은 하는 수 없이 둘이서 병원을 가게 되었다.
반휘혈을 찾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그들은 다급히 병원 안으로 들이닥쳤다.
“…현호야!”
고찬영은 안을 둘러보다가 익숙한 얼굴을 복도에서 마주하고 빠르게 다가갔다.
“찬영아!”
“친구님은?!”
그가 덥석 이현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비를 맞아 살짝 젖어 있었지만 그것을 털어 낼 여유는 좀체 보이질 않았다. 평소라면 오랜만의 재회에 반가워할 고찬영이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고찬영은 방금 전 무대가 무너지는 걸 직접 목격했을 때부터 이미 그의 불안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괘, 괜찮아. 크게 안 다쳤어.”
늦기 전에 도착했으니까. 이현호는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서이나를 구해 준 건 다름 아닌 이현호였다. 그는 어떻게 정태우와 서이나의 싸움 현장에 있었던 건가? 그것은 순전히 덕질의 우연이 겹쳤을 뿐이었다. 이현호는 남들 몰래, 특히나 고찬영에게도 들키지 않고 열심히 덕질을 하기 위해 변장으로 하고 도방고에 찾아왔다. 이전 최애와 현 최애를 카메라에 같이 담을 수 있다는 행운을 놓칠 수가 없었다. 중간에 사이트장의 SOS 연락이 온 것도 같았지만 금방 마무리가 되어 그가 찾아갈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게 그는 어떤 방해도 없이 희희낙락하며 한창 덕질의 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무대가 무너지는 청천벽력 같은 사고에 자신의 우상이 휘말린 걸 보고 경악했다.
다행히도 곧 무대에서 크게 다친 사람이 없다는 소식이 들려와 그는 한시름을 놓았다. 하지만 역시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응급 처치 천막이 있는 곳을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 이현호의 귀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흑, 흐윽. 나, 나 때문에….’
‘아, 누나. 그만 울라니까.’
‘하지만 이나 언니가….’
‘너, 너무 걱정 말라니까 그러네. 우리 조, 아, 아니, 그분도 멀쩡하다고 그랬잖아.’
…다쳤다고?!
그 사실을 깨우치자 이현호는 비명을 지르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니 하고많은 사람 중에 어째서 자신의 조커님이! 당장이라도 몸보신을 할 만한 걸 바치고픈 마음이 들었으나 그렇게 하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 겨우 참았더랬다.
‘어, 어떡하지. 이천아, 나 때문에….’
‘멀쩡할 거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조…! 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그렇게 날아다닌 분인데. 괜찮을 거야!’
아무래도 조커님은 저 여자애를 구하기 위해 다친 모양이었다. 저 캡 모자랑 야구 배트를 들고 있는 남자는 어딘가 익숙한 기운을 뿜어냈다. 아까부터 우리 조, 우리 조… 설마 팬클럽 사람인가. 합리적인 의심이 스쳤지만 어찌 됐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으로써 하나의 사실을 파악했다.
우리 조커님은 사람을 구하다가 다치셨다.
‘크으…!’
어쩜 다친 이유 하나도 이렇게 존귀할 수가. 아찔한 멋짐에 이현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감동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떠나는 그 순간마저 카메라에 담기로! 그동안 고찬영을 찍어 오면서 갈고닦은 카메라 솜씨가 빛을 발휘해 그 최후의 순간을 담아 내기로 했다.
그런데,
‘?!’
그녀가 막 차에 타려던 순간 그 차 안에서 튀어나온 건 난데없는 인물이었다.
정태우가 왜 저기 있어?!
반사적으로 몸을 숨긴 이현호는 동공을 파르르 흔들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인기척을 잔뜩 죽이고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는 상황인데 조커님이 차에 탔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현호는 심히 당황했다. 하지만 어리벙벙하게 있던 것도 잠시였다.
‘어, 어어. 태, 택시…!!!!’
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붙잡고 앞에 가는 저 차를 쫓아가 달라고 청하며 그는 그들을 황급히 쫓아갔고,
콰직, 텅, 텅, 텅…
‘…그, 그만둬. 그만둬, 정태우…!!’
그렇게 그는 수백에 달하는 카메라 한 대와 자신의 우상을 장렬히 맞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카메라는 다시 알바해서 사면 그만이었다. 이현호는 이전에 받았던 은혜를 배신할 수 없었다. 솔직히 제 목숨도 같이 바칠 생각으로 내던진 카메라였다. 다행히 정태우의 변심으로 자신의 목숨은 건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소중한 사진이 담긴 메모리 칩만은 무시할 수 없어 그것만 빠르게 꺼내었고 카메라는 조커님의 목숨을 구한 것만으로 제 몫을 다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쪽에 누워 있는데 슬슬 깨어났을지도 몰라.”
이현호는 잠든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복도에 나와 있던 상황이었다. 의식이 깨어나면 너스콜을 눌러 간호사를 부를 테니 알 수 있었고 말이다. 고찬영과 한도훈은 그 말에 바로 커튼이 쳐진 응급실 한쪽 구석으로 다가가 커튼을 거뒀다.
“어?”
“엥?”
“…뭐야.”
그러나 보이는 건 텅 빈 침대였다. 두 쌍의 시선이 이현호에게 향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목격하고 가장 크게 당황한 건 이현호였다. 그는 어, 어? 하고 멍청한 소리만 말하다가 뒤늦게 협탁 위에 올려진 메모지 하나를 발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례는 나중에 할 테니 이쪽으로 꼭 연락 주세요. 죄송합니다만 급한 볼일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010-…….’
“…….”
털썩. 이현호는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애달프게 외쳤다.
“…시뮬레이션 다 돌렸는데…!”
그 역사적인 순간으로부터 첫 재회였다. 어떻게 얼굴을 마주할지, 인사할지 그리고 어떤 위로를 전할지 다 구상한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복도에서 열심히 짠 각본과 예행연습이 무산되자 침통함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한도훈이 이 새낀 대체 뭐지? 하는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을 때였다. 고찬영은 그 메모를 훑고는 얼굴을 굳히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쏴아아-.
타닷, 탁. 병원 밖을 뛰쳐나와 그녀가 지나갔을 법한 길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보이는 건 쏟아지는 빗물뿐 그녀의 그림자는 보이질 않았다.
“……친구님.”
걱정 어린 호칭이 빗속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
“…….”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최강혁은 눈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혁아~. 혁-아!”
그런 최강혁을 곁에서 부르던 이윤은 계속되는 무시에 볼을 부풀렸다.
“우우…!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건데!”
아까부터 말도 없고! 자신도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최강혁의 상태에 이윤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 원인을 알고 싶어 불러 보았지만 아까부터 묵묵부답. 평소라면 이쯤에 ‘시끄러, 이윤.’이라도 할 법한데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래서 이윤은 부르던 것을 멈추고 눈썹을 내렸다.
“치…. 나도 누나 걱정되는데.”
자신도 꿀꿀해지려는 기분을 겨우 다잡고 있는데 옆에서 이러니 그 우울이 전염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게의 테이블 위로 엎어지며 중얼거리고 있자 최강혁이 불현듯 미간을 모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딴 거 아니라고.”
“응?”
이윤은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불러도 입을 다물던 그가 반응하자 이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 너한테 한 말 아닌데?”
“…….”
그 말에 최강혁의 얼굴이 구겨졌다. 방금 이윤이 중얼거렸던 건 혼잣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반응을 바라고 했던 말이 아닌 만큼 이윤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본 것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뭐야, 뭐야? 너 혹시 누나 걱정했던 거야? 응? 응???”
“…내가 땅콩 따위를 왜 걱정해?!”
이윤이 해죽 웃으며 건드리자 최강혁은 대번에 정색했다. 하지만 이윤의 장난기는 좀체 거둬지질 않았다. 그는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혁이 요즘 진짜 착하다~. 평소에 나오지도 않던 체육 대회도 참여하고… 원래 그런 사은품엔 관심도 없잖아~? 게다가 말은 다 툴툴거려도 그 연희라는 애한테 다 맞춰 주고! 아, 맞아!”
이윤은 손을 짝, 하고 마주치며 막 생각난 것을 말했다.
“너 요즘에 자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며?”
“뭣….”
최강혁이 예상치 못한 공격에 굳어 있는 사이에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다정한이 불쑥 말했다.
“음? 혁이 너 혹시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야?”
“혁이가 좋아하는 사람?!”
그 물음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이윤이었다. 이윤은 눈과 입을 크게 벌리더니 두 손으로 그 입을 가렸다.
“지, 진짜야?!”
“안 그럼 너무 수상하긴 하다. 너 혹시 그 여자애랑 선배 중에….”
쾅-!
점점 기정사실화되어 가자 최강혁이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곤 서슬 퍼렇게 눈을 뜨며 낮게 경고했다.
“아니라고.”
다정한은 그 말에 싱긋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항복의 의사에 최강혁이 짧게 혀를 찼다. 그러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혁이 갈 거야?”
이윤이 그를 불렀다. 최강혁은 그 부름에 낯을 일그러트리더니 고개를 돌리고 떠나갔다.
“흐음-.”
이윤은 멀어지는 그 등을 멀뚱히 지켜봤다. 평소라면 더 있다 가라고 말할 그의 태도가 얌전하자 다정한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그래, 윤아?”
“음? 아니~. 그냥 신기해서.”
신기해? 다정한은 그 말을 되묻다가 이내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혁이가 저렇게까지 하는 건 나도 처음 보긴 했어.”
평소라면 귀찮다고 생각하는 건 전혀 하지 않을 그가 그렇게까지 움직이는 건 극히 드물었으니 말이다.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건가 의심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좋은 일 아닐까?”
나름 신선한 변화에 다정한은 흥미롭게 중얼거렸다. 이윤은 그 말에 다정한을 물끄러미 보았다. 다정한은 커다란 눈동자가 말없이 저를 보고 있자 어딘가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왜?”
“흐음-.”
이윤은 잠시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떠나간 최강혁의 자리를 힐끗 보았다. 무언가 생각한 바가 있는지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역시 난~,”
그러곤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혁이가 차였으면 좋겠어!”
“…….”
다정한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굳었다. 어느새 서강이도 자던 몸을 일으키고 방금 들은 게 뭔 소린가 싶은 얼굴로 이윤을 보고 있었다. 다정한은 눈을 잠시 깜빡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윤아. 너 혁이한테 악감정 있었니?”
“어? 아닌데??”
“난 네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어? 어어? 진짜 아니야!”
“…….”
“나 진짜 혁이 좋아한단 말이야! 진심이야-!”
그렇게 의미 모를 소리를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이윤과 두 친구들의 오해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젠장.”
일이 틀어졌다. 가게 밖으로 나온 최강혁은 우산 아래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그러곤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놓고는 손 너머로 얇은 종이봉투가 느껴져 인상을 더 구겼다.
“쯧.”
되는 일이 없군. 직접 발로 뛰어가며 나선 의미가 사라졌다. 그는 다시 한번 머리를 헝클이며 혀를 찼다.
“음?”
그러다 불현듯 최강혁은 신호에 정차된 차창 너머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저건….’
그의 눈이 냉랭히 가라앉았다. 입매마저 단단히 굳힌 최강혁은 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신호에 걸린 차량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막 초록불로 바뀌어 움직이려던 그때,
텅-. 누군가가 보닛에 발을 얹었다. 떡하니 가로막은 이에게 운전자가 항의하려고 창문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
“나랑 얘기 좀 하지.”
하지만 차량을 막은 이, 최강혁은 그 소리를 싹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백장미.”
덤덤했으나 명령 같은 어조였다. 운전자는 불린 이름에 당황한 듯 뒷좌석에 앉아 있는 이를 보았다.
지이잉-.
그러자 곧 그의 말에 호응하듯 창문이 열렸다. 창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백장미는 꽃같이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타. 혁아. 감기 걸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