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4)
최강혁은 백장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니, 차 탈 것도 없어. 나와.”
“어머. 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일은 드문데.”
적극적? 하. 최강혁은 그녀의 말에 헛웃음을 내뱉으며 열린 창 쪽으로 다가갔다.
“그럴 수밖에 없지.”
그는 창가를 꽉 잡았다.
“내 기분이 지금 존나 좆같거든.”
우드득, 고철이 일그러지는 섬찟한 소리가 들렸다. 손에 도드라진 힘줄은 그의 뒤틀린 심기를 여실히 보여 줬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 창틀이 아닌 백장미의 멱살을 쥐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지금 널 때리지 않는 것만으로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를 거야. 이야- 내 성격도 참 다 뒤졌어, 그렇지?”
그의 입매는 웃고 있었으나 눈이 그러하질 못했다. 서릿발이 휘날리는 차가운 냉기가 그의 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흐음~. 무슨 일로 그렇게 화가 나셨을까, 우리 왕자님은.”
하지만 백장미는 살기가 풀풀 새어 나오는 그의 분위기에 전혀 압도당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되레 흥미롭다는 듯 창가에 팔꿈치를 대곤 손으로 턱을 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놀릴 생각이면 집어치워. 진짜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어머, 무서워라.”
도를 지나친 살벌한 으름장에 백장미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만약 우리의 첫 소송이 이혼 소송도 아니고 폭행 건이 된다면 참 재밌기도 하겠다. 물론 이혼 따윈 있을 수 없지만. 백장미는 속내를 감추며 고아하고도 애처로운 자태로 볼에 손을 대었다.
“너무 그렇게 인상 쓰면 나 너무 무서워. 혁아.”
장미라는 이름에 걸맞게도 비를 맞은 듯한 청초한 그 자세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고개를 수차례 돌리게 만들고 홀릴 듯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지랄하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게 최강혁이라는 점이었다. 미인계가 전혀 통하지 않은 그는 오히려 더 싸늘한 시선으로 백장미에게 경고했다.
“백장미. 마지막 경고야.”
“무슨 경고? 난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는걸. 이러지 말고 그냥 차에 타고 어디 들어가서…,”
탕-! 묵직한 타격음이 창가를 두들겼다.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최강혁은 위협하듯 몸을 숙인 채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곤 서늘히 입을 열었다.
“나를 위해서니 어쩌니… 그따위로 좆같이 구는 것도 진짜 한계가 있다.”
“…뭐?”
백장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치 허를 찔린 것처럼.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자신이 한 일을 들킨 건가. 아니, 아니다. 그런 소식은 들은 바가 없었다. 그 빌어먹을 조폭 새끼들의 입막음은 잘 시켰다고 들었다. 문제가 되는 점이 있다면 한도훈이겠지만, 한도훈과 최강혁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 일을 알려 줄 가능성은 적었다. 오히려 자신이 몰래 일으킨 일들과 그 상황들을 모르고 사는 최강혁의 모습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고 있으면 또 몰라. 그 변태 새끼는 충분히 그럴 법했다.
“혁이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설마. 설마 아니겠지. 백장미는 다시 의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더 잘 알겠지.”
하지만 눈앞에 싸늘히 식은 표정에 의해 한번 떠오른 가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나, 너무 서운하다. 혁아.”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인정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백장미는 더욱더 뻔뻔히 굴기로 했다. 되레 서운한 듯 눈썹을 모으며 피해자인 척 애처로운 얼굴을 만들었다. 그것은 열에 아홉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표정이었다.
“…시발. 존나 말 안 통하네.”
그러나 역시 문제는 그 상대가 최강혁이라는 점이었다.
“야. 작작 해.”
그의 인내가 점점 바닥을 넘어 땅을 뚫을 기세였다. 그는 이마에 핏대까지 솟은 채 창가를 틀어잡았다.
“내가 옛정을 조오오온나게 쳐줘서 봐주고 있는 거거든? 네가 뭔데 내 인생에 주제넘게 관여하냐고.”
최강혁은 스스로도 말하면서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 시발. 진짜 왜 봐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그의 눈매가 와락 좁혀지며 그 눈동자엔 혐오가 가득 깃들었다.
“야, 네가 내 뭐라도 돼?”
“…무, 무슨….”
“하다못해 내 약혼자라도 돼? 왜 멋대로 설치는 건데, 시발…!!”
쾅-!!! 그의 주먹이 창가를 내리쳤다. 그러자 그 주먹의 모양을 따라 창가가 처참히 일그러졌다.
“내가 평소에 하지도 않던 일까지 해 가면서도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야 하는 건데!!!”
최강혁의 그간 참아 왔던 감정을 터트리듯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새 들고 있던 우산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그는 비를 흠뻑 맞은 손을 뻗어 백장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말해 봐. 백장미. 내가 왜 하지도 않은 일로 이렇게 고민해야 하는 거지? 왜 하지도 않은 일로 기분이 더러워지고 자꾸만…!”
빠득, 그는 말을 잇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말은 꺼내는 순간 그의 이성이 기어코 끊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쥐고 있는 주먹이 억눌린 힘으로 잘게 떨었다. 그러곤 경고하듯 그 붉은 눈을 발했다.
“아니, 너. 그냥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다음에 마주치면 진짜 죽일 거니까.
탁. 멱살이 내팽개치듯 놓은 최강혁은 싸늘히 얼굴을 굳히며 몸을 돌렸다.
“…젠장.”
쏴아아-. 쏟아지는 빗물 사이에서 그것을 피하지도 않고 최강혁은 온몸으로 맞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그런다고 계속 맞고 있는 빗물로 인해 다시 젖어 소용없었지만 말이다.
최강혁은 털던 손으로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리고 잡히는 종이봉투에 미간과 입매를 살풋 구겼다.
“…미치겠군.”
그는 미간을 와락 모으며 다시 머리를 헝클었다. 정말 제 나름대로의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됐다.
원래라면 한도훈이 개최하는 그딴 대회 오르지도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한도훈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로 인해 변심하게 되었다.
[한 방 먹이고 싶지 않아?]
처음엔 이 새끼가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다. 애초에 백장미에게 볼일이 있었으나 어처구니없이 반휘혈의 시비에 의해 완전히 목적을 잊어버려 발목을 붙잡혔었다. 최강혁은 백장미를 다시 찾아가려 했으나 그는 한도훈에게서 연이어 도착한 메시지에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올라와. 네가 올라와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백여우한테 가장 한 방 먹이는 거니까.]
‘…….’
그는 그 메시지에 눈을 가늘게 살폈다. 더 이어진 말은 없었다. 한도훈 그 또라이는 또라이답게 저만 아는 말만 내뱉고 연락을 끊은 거였다. 그것은 난데없는 명령이었고 자신은 이 말을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사실 이걸 이렇게 계속 보고 있는 것도 우습고 말이다. 하지만 최강혁은 선뜻 이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기엔 기분이 더럽긴 하나 한도훈은 사람 심리를 아주 불쾌하게 만드는 데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그런 녀석이 하는 말이니만큼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래서 그는 한도훈의 제안을 승낙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쥐어패 주고 싶었지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백장미는… 어린 날에 함께 추억을 보낸 친구라고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자주 얼굴을 본 사이는 아니었지만 파티장에서 꼭 마주치는 여자애가 있었다. 혼자 인형처럼 벽 쪽과 가까운 의자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여자애가. 저는 그 여자애를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하였던가.
사실 그녀의 붉은 머리칼만 보면 그때의 상황은 훤히 그려졌다. 그만큼 그녀가 담고 있는 색은 어린 제게 인상적인 색이었으니.
나랑 같네.
그 흔치 않은 머리 색이 저의 눈동자와 같아 보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네 머리 색. 나랑 같은 붉은 색이네.’
그런 식으로 말을 걸었던 것 같다.
최강혁은 몰랐다. 그 순간이 그에게 있어 최악의 악연이 시작되는 순간임을. 그리고 그것은 현재도 그리 자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그가 필요 없는 죄책감에 시달릴 정도로 말이다.
‘…젠장.’
웃기지 마.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이렇게 구질구질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가. 괜한 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이 쓰이면, 두 사람한테라도 사과하든지.’
‘뭐?’
‘네가 주연희 때리려고 한 거 잊었어? 또 찬영이한테 저번 주에 쓸데없이 시비 걸었잖아. 그런 거 사과하라고.’
땅콩 녀석이 자신의 고민을 너무나도 쉽게 풀어 버리는 그 순간, 최강혁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은 이 망할 응어리를 풀어낼 무언가를 원하고 있음을.
자신이 그 두 사람에게 망할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
꾸깃.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에 의해 종이가 살짝 구겨졌다.
경기에 참여한 계기는 백장미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한도훈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다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꼭 이길 거야.’
여행 상품을 보며 눈을 빛내는 녀석과
‘넌 산토리니 안 가고 싶어?’
‘당연히 가고 싶지. 그것도 공짜 호화 티켓인데. 난 쟤네들처럼 재벌이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내가 쓰는 돈은 누나 돈이라 그렇게 펑펑 쓸 수도 없어.’
태평한 듯 보이지만 아쉬운 속내를 떨쳐 내지 못한 녀석. 그들의 모습을 최강혁은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이걸로 자신의 같잖은 죄책감 따위 떨쳐 내기로.
그러나 상황의 예기치 않게 돌아갔다. 최강혁은 무너진 잔해 너머에서 바닥을 구른 두 사람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무대가 무너진 건가. 한순간에 벌어진 사고는 그의 머리를 둔하게 만들었다. 그는 멍하니 굳어 있다가 정처 없이 손을 방황하며 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으, 어, 어, 언니, 어, 으, 어어….’
난데없는 사고로 인해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너지는 기둥 아래에 있던 당사자는 더 놀란 듯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최강혁은 이때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뭐야, 이거.’
언젠가 느껴 본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숨을 억죄고 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 탈력감. 이것은 그를 평생 괴롭혀 온 그 느낌이었다.
“하… 미치겠군.”
또한 현재도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짜증 나는 감정은 여전했고 사고는 이미 벌어진 뒤였다. 최강혁은 더는 미룰 수 없다는 판단하에 백장미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이제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
그는 피로한 낯을 문지르며 터덜터덜 빗속을 걸어갔다.
그리고 최강혁은 몰랐다. 그런 그의 결정이 어떤 또 다른 파국을 낳을지. 자신의 말이 불러일으킬 파장은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가만, 가만 안 둬-.”
빠득- 살벌히 이가 갈렸다. 남겨진 차 안에서 광기에 젖은 듯한 이질적인 눈동자가 빛을 발하며 음산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커다란 폭풍이 오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