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57화 (257/306)

257.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5)

***

병원을 나오고 투둑,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에 하늘을 보았다. 날이 점점 흐려진다 싶더니 결국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이 없던 나는 그냥 맞기로 했다. 살 마음도 딱히 들지 않았고 말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조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몸뚱어리가 무거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삼스럽게 새겨진 다짐이 무거워서일까. 내 걸음걸이는 속도가 좀체 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멈추지 않는 한 언젠가 목적지엔 다다르는 법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아파트 정문을 발견하고 나는 발을 멈춘 채 멀거니 바라보았다.

“…….”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그 곁을 무심히 지났다. 점차 아파트 현관이 다가왔고, 공동 현관을 들어서려 계단에 발을 내디딜 때였다. 멀리서부터 어딘가 서두르는 듯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달려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지는 움직임이었다.

“?”

그런데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 덥석, 손목이 붙잡혔다.

“!”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붙잡힌 쪽의 반대 손에 힘을 실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정체를 확인하곤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아, 하아….”

그곳엔 비에 잔뜩 젖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반휘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정쩡히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러다 올렸던 손이 다친 팔임을 깨닫곤 쓴웃음을 지었다. 잘못하다가 상처가 더 벌어질 뻔했다. 자신에겐 더는 여유를 부릴 시간 따윈 없는데.

“찾, 았다.”

반휘혈이 숨을 크게 몰아쉬곤 눈에 띄게 안도한 듯 나를 보았다. 그제야 나는 그가 쫄딱 젖은 상태임을 눈치챘다.

설마 날 찾으러 다닌 건가.

“너….”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연하게 그를 보았다.

“걱정했어.”

반휘혈이 내 손을 꼭 붙잡으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내가 앞에 있는 것만으로 그의 마음이 놓인 듯한 모습이었다. 팔과 손에 닿은 그의 손은 차가웠다. 나나 그나 이미 젖은 몸이었기에 차가운 건 당연했다. 하지만 붙들어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따뜻한 온기가 손에서부터 퍼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겐 너무 뜨겁게 다가왔다.

그래서 조용히 팔을 빼냈다. 반휘혈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의 눈이 손에서부터 내 얼굴로 올라왔다. 나는 그 눈을 담담히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휘혈아, 그러지 마.”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의문이 서린 시선이었다.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듯한 태도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재차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이러지 마. 휘혈아. 무턱대고 이렇게 찾지도 말고, …만지지도 마.”

“…뭐?”

이 말 언젠가 해 본 적 있던 것 같은데. 스스로 느끼기에도 익숙한 발언이라 생각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어딘가 불쾌한 낯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거 다 끝난 얘기 아니었어?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느낀 건 반휘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니, 녀석은 그래서인지 더더욱 불쾌해 보였다. 반휘혈이 내 말에 못마땅하게 반박해 왔다. 그래. 나도 알아. 이 말이 굉장히 갑작스럽겠지. 방금까지 잘만 지내던 누나가 이러니 황당하겠지. 나도 정말 잘 알아.

‘그런데 난 이 방법밖에 없어. …아니, 이 방법밖에 몰라.’

이런 이기적인 내 생각을 알면 그는 날 혐오할까. 그런 생각이 들자 불현듯 의문이 찾아왔다. 그는 왜 이렇게 나에게 집착할까. 이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나를 향한 마음은 지나치게 컸다. 그런데 그 정체는 사실 불분명했다. 가족애인가, 사랑인가. 아니, 둘 다려나. 하지만 그 마음은 내가 받기엔 너무나도 부담스러우리만치 컸다. 이렇게 조촐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이 받아선 안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되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어, 휘혈아. 너는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내 시선이 그의 머리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닿았다. 그렇게 쏟아지지 않는 비를 고려하건대 이렇게까지 젖으려면 그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이곳저곳 누비고 다녔다는 뜻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나를 찾기 위해서.

“난 네가 이렇게까지 굴 만한 사람이 아니야. 이제 정말 그러지 마.”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반휘혈의 낯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노려보며 한껏 차분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누나한테 어떤 짓을 하든 내 마음이야. 그러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할 거야.”

절대 물러서지 않을 듯한 단호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확고한 말이 더 의아하게 와닿았다.

“왜?”

그래서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나에게 집착하는 거야?”

약혼자라는 되도 않는 관계까지 되려고 하면서까지 나와의 관계를 지속시키려는 그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

“그야…!”

반휘혈이 발끈하며 외치려 들다 순간 말이 막힌 것처럼 동작이 멈추었다. 그는 그 상태로 입을 잠시 달싹이다가 이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더니 신음을 억누르곤 사선으로 내리깔며 나직하게 말했다.

“…누나니까.”

반휘혈은 그 말만을 내뱉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생각했다.

참 이상한 녀석이라고.

‘…아니, 따지고 보면 이상한 건 나도 마찬가진가.’

어째서 이런 기묘한 관계를 미련하게 지속하려고 하는 걸까. 나도 참 이상한 놈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문득 작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반응한 반휘혈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꽂혔다. 나는 그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휘혈아, 네가 그랬지. 동생 그만두겠다고.”

“……?”

난데없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초리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더 깊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만두자.”

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어딘가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은 낯이었다. 하지만 나는 말을 끊지 않고 계속 이었다.

“어차피 되도 않는 소리였어. 나도 누나로서 별로 좋은 사람도 아니고.”

“…누나.”

“생각해 보면 난 너한테 상처만 줬지? 오늘도 그래. 네가 내 욕을 듣고 대신 화내 준 건데 네 마음도 못 알아주고 내 기준으로만 생각했고, 또 뺨도 때리고….”

“누나!”

손가락을 꼽아 가며 잘못한 점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가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었다. 눈을 들어 올리자 그만하라는 암묵의 시선이 전해졌다. 나는 그 무겁게 닿아 오는 눈동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피식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 앞으론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자.”

네게 미안한 일이 많다. 좋은 누나가 되어 주질 못해서 미안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그럴 걸 생각하면 차라리 여기서 좋게 인연을 끝맺고 싶었다.

“이젠 너한테 형도 있잖아.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그래.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피로 이어진 그의 혈육이 그의 편이었다. 그것만으로 반휘혈에게 큰 힘이 될 터였다. 피도 안 이어지고 그저 의리로써 겨우 붙들고 언제나 부딪히기만 하는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낫겠지.

“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반휘혈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어깨를 붙잡은 손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강한 힘이 전해졌다. 그 광경은 마치 방금 들은 내 말을 격렬히 거부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못 들은 걸로 할게. 아니 못 들은 거야. 지금 몸이 안 좋은 거지? 아, 그래. 오늘 힘들었으니까… 누나,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못 들은 걸로 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그러곤 손에 힘이 더해진다 싶더니 더없이 애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싫어.”

그가 견디기 힘든 것처럼 몸을 잘게 떨었다.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네게 있어 내가 얼마나 크나큰 범위를 차지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말이 쓰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각오를 정했기에 나는 숨을 깊게 내쉰 후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젠 나도 돌려서 말하는 것도 지겹다.”

그의 몸이 잘게 떨렸다. 감겼던 그의 눈이 서서히 떠지더니 나를 보았다. 어딘가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이 참 마음 아프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것을 내색하지 않고 무감한 듯 입을 열었다.

“반휘혈, 너 나 좋아해?”

그의 눈이 커졌다. 잠시 입이 달싹였으나 나오는 대답은 없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그의 낯에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그래, 나도 안다. 이 말은 내가 그간 고의적으로 꺼내지 않았던 말이었다. 이 말을 내가 직접 꺼냄으로써 관계가 어긋나고 흐트러질까 봐, 겁이 났던 내가 일부러 피했던 말이니까.

“…뭐, 상관없어.”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네가 좋아하든 말든 난 거절할 거였으니까.”

어차피 결말은 옛적부터 정해 놨으니까. …그게 조금 이르게 왔을 뿐.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나는 어깨에 닿은 손을 조심스레 치워 냈다. 그의 손이 움찔거렸으나 힘없이 떨어졌다. 그의 낯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멍해 보였다.

너는 어디에 충격을 받은 걸까. 내가 그런 질문을 해서? 아니면 거절해서? 무엇이 됐든 새삼 너에게 있어 내가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구나.

‘미안해, 휘혈아. 이런 못된 누나라.’

쓴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더는 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사는 게 힘들었을 그에게 나도 그 상처를 더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학교 같은 건 당장 중요하지 않아-!!’

이제는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아빠가 그리 말했는지.

커다란 목표 앞에서 보잘것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 목표를 제외한 모든 걸 배제하는 것밖에 없었다. 정태이라는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언제쯤에야 넘을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 기약 없는 예고와 같았다. 잠시간의 시간을 달라니. 그런 무책임한 말을 꺼낼 바엔 여기서 깔끔하게 끝내고 싶었다.

“날 원망해도 돼. 휘혈아.”

그래. 실컷 원망해도 된다. 이런 이기적인 말을 꺼낸 건 다름 아니라 내가 너한테 너무 약하기 때문이기도 했으니.

네 말이라면 다 들어주고 싶어진다. 너의 그 고집도 한발 물러서 주고 싶고, 뻔뻔한 대답도 웃으면서 그저 받아 주고 싶어진다. 너의 모든 어리광을 그냥 받아 주고 싶었다.

슬프다. 너와 인연을 잘라 내는 게 너무나도 슬펐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는 앞으로 내가 갈 길에 있어서 너무나도 큰 장애물이었다. 너와 있으면 내 마음이 풀어졌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런 여유를 부리기엔 내가 넘을 산은 너무나도 컸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됐었다. 딱 한 발자국만. 내가 끝내 느끼지 못했던 그 희열을. 포기밖에 답이 없던 그 길을, 서 보지도 못하고 내려와야만 했던 그 장소를. 기약이 없음을 알고서도 그곳을 갈망하는 내가 있었다.

그러니 난 네게 작별을 고한다.

“잘 가. 휘혈아.”

나는 마지막으로 욕심을 부려 그의 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훔쳤다. 창백한 낯처럼 차가운 볼이 손끝에 닿았다. 마지막이라면 좀 더 따뜻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참 이기적인 건가. 나는 쓰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자, 잠깐. 가지, 가지 마.”

멀어지는 뒤로 그가 절박하게 불러 세웠다. 하지만 내 발은 잠시 머뭇거릴 뿐 멈추지 않았다.

“누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1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는 곧장 열렸고 나는 올라타자마자 층수를 눌렀다. 앞쪽을 보고 싶지 않아 일부러 눈을 감았다. 문이 닫히려 하는 그때, 가슴을 관통할 만치 물에 잠긴 소리와 함께 눈이 뜨였다.

“…나만 혼자 두고 가지 마-!!”

아.

탁-. 문이 닫혔다. 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보았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홀린 듯 시선을 내렸다.

내 손은 어느샌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늦었네.”

나는 툭, 엘리베이터의 벽에 머리를 기댔다. 왠지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눈 뜨지 말걸.

나는 소리로 내뱉지 못한 후회를 속으로 삼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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