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빈자리 (2)
“그럼 결정! 훈련 시작했으니 체육관에 있겠지? 그럼 거기부터 가 볼까~.”
얘기가 결정되자 고찬영은 흥겹게 서이수의 어깨를 끌어당겨 학교 밖으로 나가며 척척 목적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이수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 얼떨떨히 끌려가다가 정문까지 가고서야 발을 멈추고 그를 제지했다.
“아, 잠깐! 잠깐 멈춰 봐. 형은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요 일주일간 아무 말 없이 잠잠하더니 왜 이러는 건가. 단체 채팅방에서도 그리 티를 내지 않던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황당해하며 고찬영을 보자 그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일주일이나 씹혔는걸.”
“어?”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거 아닌가? 하하.”
아. 서이수는 그제야 고찬영의 눈이 웃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인간, 화났구나. 지금 제대로 빡친 상태다. 이제 보니 그의 주변에 검은 아우라가 나오는 것 같은 착시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그의 음산한 분위기를 보고 있자니 불현듯 그의 별명이었던 미친개가 떠오르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 같았다. 이전에 돌던 소문처럼 마치 미친 짐승같이 꽤나 멋대로 날뛰었던 모습이 살짝 비칠락 말락 하고 있을 정도였다.
‘아니, 그보다 일주일이나 연락 씹었던 거냐고.’
진짜 이 누나 새끼를 어쩌면 좋지? 서이수는 자꾸만 부글거리는 심정에 뒷목이 잡혔다. 어쩐지 이재현이나 김시원이나 누나 상태 어떠냐고 너무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싶었다. 그때는 둘 다 예의를 너무 차려서 이런 건가 싶었으나, 다름이 아니라 그냥 연락을 씹고 있었단 걸 생각하니 둘의 반응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뭐, 그것도 있고. 짐작 가는 게 좀 있기도 하고~ 겸사겸사?”
짐작 가는 거? 고찬영의 이어진 말에 서이수는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고찬영은 더 대답하지 않고 서이수를 쭉쭉 밀었다. 서이수는 버텨 보려 했으나 힘이 얼마나 센지 멈출 방법이 없었다. 결국 자존심이 제대로 상해 버린 서이수는 잔뜩 부루퉁해진 채로 체육관에 도착하고 말았다.
고찬영은 체육관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2층으로 향한 후 문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잠긴 채로 꼼짝도 하질 않았다. 음? 고찬영은 잠긴 문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데 서이수가 툴툴거리며 계단을 오르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곤 시큰둥히 입을 열었다.
“그쪽 아냐.”
“음? 여기 아냐?”
척, 문을 향해 가리키며 묻자 서이수는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거긴 일반 회원들 자주 쓰는 곳. 누나가 있는 곳은 3층이야.”
아하. 고찬영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안이 너무 조용하다 싶었다. 그러다 문득 이 안에도 훈련용 기구들이 꽤 있음을 떠올리곤 의구심이 들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건데? 이 층이랑 위층이랑 뭔가 다른가?”
“아, 뭐….”
서이수는 위층의 시설을 떠올리곤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용 트레이닝 시설이거든.”
그는 보면 안다고 하며 위층으로 고찬영을 인도했다. 그리고 3층에 도착하고 문을 열자, 고찬영은 보이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여기 무슨 태릉 선수촌인가.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만큼 설비 시설이 완벽하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헬스장에서 보던 것과 그 외에 처음 보는 기구들, 또 유격 훈련에서나 쓸 법한 기구들이 즐비한 걸 보며 고찬영은 여러 의미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굴리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안쪽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림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하자 원하던 이를 발견했다.
“누…,”
서이수도 발견했는지 곧장 그녀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고찬영은 그를 막아 세우며 조용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규칙적인 발소리는 러닝 머신을 타는 소리였다. 귀에 낀 이어폰이나 빠른 속도를 내달리는 러닝 머신을 보건대 그녀는 누군가 온 지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몰두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가라앉은 시선은 마치 꿰뚫을 것처럼 예리한 기운까지 품고 있었다. 고찬영은 잠시 그 옆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러곤 찬찬히 다가가 손을 뻗어 버튼 하나를 눌렀다.
“!”
갑자기 러닝 머신이 멈추자 몸체가 크게 기울였다. 하지만 잠시 멈칫거릴 뿐 이내 중심을 바로 잡은 그녀의 시선이 손의 주인을 향해 재빠르게 돌아갔다.
“너….”
“안녕, 친구님.”
고찬영을 발견하곤 그녀의 눈이 예상치 못한 걸 마주한 것처럼 커다랗게 뜨였다. 그런 친구님에게 고찬영은 싱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네가 왜 여기에.”
“그야 친구님 보고 싶어서 왔지~.”
“…….”
그는 그녀의 귀에서 시끄럽게 음악을 울리는 이어폰을 빼 주며 대답했다. 서이나는 다가오는 손에 잠시 움찔했으나 그보단 갑작스럽게 등장한 고찬영의 존재가 얼떨떨했는지 어딘가 멍한 시선이었다.
“다친 곳은 이제 멀쩡한 거야? 회복력 진짜 좋다~.”
다행이네, 다행이야. 고찬영은 마음이 놓인 것처럼 안심한 듯 웃으며 그녀의 쾌유를 축하해 줬다.
“…왜 왔어.”
하지만 서이나는 그의 쾌유를 선뜻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없었나 보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점점 예리한 기운을 띠는 그 모습에서 고찬영은 꽤나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과장된 미소를 버리고 살풋이 웃으며 나긋이 대답을 했다.
“말했잖아. 친구님 보고 싶어서라고.”
“…….”
“연락 안 돼서 걱정했어.”
차분하고도 진중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서이나는 그 깊은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더니 시선을 돌리며 냉담하게 대꾸했다.
“핸드폰 없앴어. 앞으로 연락 안 될 거야.”
“음?”
“뭐?”
그 대답에 놀란 건 고찬영뿐이 아니었다. 곁에서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서이수도 몰랐던 내용인지 눈을 크게 뜨며 반응했다.
“핸드폰을 없애? 왜?!”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황당한 대답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사고의 흐름까지 흘러가 그런 결단을 내리는 건가. 이건 연락을 씹은 게 아니라 그냥 아예 안 된 거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당혹스러운 내용이었다.
“정신 산만해지니까. 이제 됐지? 나 몸 멀쩡하고 연락 안 되는 이유 말해 줬으니까 그만 가 봐.”
냉정한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고찬영은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리를 옮기며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려 했으나 서이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친구님.”
고찬영이 서이나를 재차 불렀다. 그 부름에 서이나는 입술을 잘끈 깨물더니 얼굴을 깊게 쓸며 한숨 어린 투로 대답했다.
“…한동안 학교도 안 나갈 거야.”
“언제까지?”
“……몰라.”
기약 없는 대답이었다. 고찬영은 착 가라앉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쿡쿡 쑤셔 왔다. 그렇게 외로운 얼굴을 하면 어쩌라는 건지. 그는 쓰게 웃으며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기다리면 안 돼?”
“기다리지 마.”
“그럼 여기 다시 놀러 올게.”
그때는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같이 데려오겠다고 하려 했다. 그녀를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이뿐이었으니. 이 정도는 양보해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서이나가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아니, 필요 없어.”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피하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강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있으면 방해야. 난 지금 집중해야 돼. 이걸 꼭 말로 해야 알겠어?”
살벌하게 굳어진 낯이 그를 향했다. 드디어 마주친 얼굴이었다. 고찬영은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며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바라본 채 생각했다.
‘…안 데려오길 잘했군.’
체육 대회 이후로란 소리를 듣고 혹시나 싶은 생각에 이혜인을 데려오지 않았던 게 정답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두 사람이 마주해선 안 되었다. 그것은 이혜인에게도 서이나에게도 그들의 관계에 있어 치명적인 타격을 줄 터였다. 그것은 그가 아무리 서이나의 베프 자리를 노린다고 해도 결코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잠깐. 누나 말이 심하잖아. 누나 대체 왜 그래?”
고찬영이 착잡한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할 즈음,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서이수마저 그녀의 말에 크게 당황한 듯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평소의 누나와 다르다. 이렇게 차가운 모습은 처음 봤다. 왠지 모르는 사람이 서 있는 기분이 들어 서이수는 불안한 마음으로 왜 이렇게 날이 서 있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다그쳤다. 그러나 서이나는 말없이 냉정히 그의 팔을 치워 냈다.
“누나!”
“서이수. 너도 마찬가지야.”
“…어?”
서이수가 화를 내려 할 때 서이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너도 오지 마. 방해니까.”
“뭐?”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서이수는 멍해지는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선뜻 어떤 반응도 못 하고 굳어 있다가 이내 자신이 들은 말의 의미를 깨닫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누나!!!”
분이 잔뜩 담긴 노성이 울렸다. 하지만 서이나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서이수는 그 반응에 더 울화가 치미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끝까지 치고 오는 화에 그가 어떤 말도 쉬이 내뱉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그 사이를 고찬영이 끼어들었다.
“둘 다 진정하자.”
“이게 어떻게 진정할…!”
“…….”
서이수가 고찬영에게 반박했으나, 고찬영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조용히 두 사람의 간격을 벌려 서이수를 제 등 뒤로 보낸 채 이쪽을 보지 않는 서이나에게 경고했다.
“친구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후회할 말은 하지 말자.”
“…….”
“친구님.”
서이나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단절의 태도를 보이는 모습에 고찬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네. 좀 더 차분히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는 쓰게 웃으며 이곳에 온 진짜 본론을 꺼내었다.
“친구님, 정태우한테서 진 게 그렇게 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