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60화 (260/306)

260. 빈자리 (3)

서이나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치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는 시선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정말이지 솔직하긴. 하지만 그 반응 덕에 고찬영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더더욱 확인할 수밖에 없어 안타까운 쓴웃음을 지었다.

“…정태우?”

그때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태우? 내가 아는 그 정태우??”

서이수는 방금 제가 들은 걸 확인하려는 것처럼 고찬영의 팔을 붙잡았다. 정태우라면 분명 그 사람 아닌가. 현 사대천왕 중 최강자이자 전국 서열 1위! 그 사람이랑 누나랑 싸웠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서이수는 믿기 힘든 사실에 고찬영과 서이나를 번갈아 돌아봤다. 하지만 고찬영의 난처한 기색과 더불어 서이나의 얼굴이 굳어진 걸 보아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누나, 잠깐. 아니, 그, 아…!!!”

순식간에 복잡해지는 뇌리에 서이수는 머리를 세차게 헝클였다. 그러곤 얼마 안 가 고개를 번뜩 치켜들고는 서이나에게 성큼 다가가 물었다.

“진짜야? 진짜 정태우랑 싸웠다고? 그리고… 지금 졌다고 말하는 거야? 어?”

“아. 동생, 잠깐.”

흠칫. 고찬영은 서이수의 발언에 얼굴을 굳히며 그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서이수의 입은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져서 이러고 있냐는 거냐니까!!”

오, 망했네. 고찬영은 머리에 마비라도 온 것처럼 할 말 못 할 말 다 꺼내고 있는 동생을 보며 흐리게 미소 지었다.

“…….”

“져서 핸드폰도 없애고 훈련을 시작한다고?”

“…….”

“지금 겨우 한 사람 이겨 보겠다고 학교도 친구도 버리려고 해?! 누나 미쳤어?!”

호우. 세상에. 고찬영은 이번엔 슬그머니 손을 올려 입을 틀어막았다.

“대학 간다며! 운동 안 한다며-!! 할 생각 없다며-!!! 내신 성적 버릴 생각이야?! 아니, 이미 늦은 것 같긴 하지만 정시라도 잘 보려면 학교를 다녀야 뭘 하든 말든 하는 거 아냐? 어? 겨우 한 명 이길 생각으로 다 포기하려 든다고? 이제껏 한 게 아깝지도 않…!”

텁. 줄줄줄 내뱉던 말이 한 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서이수는 강하게 조여 오는 악력과 마주친 시선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 입을 막은 당사자, 서이나는 서슬 퍼런 눈으로 낮게 읊조렸다.

“나가, 새꺄.”

쾅-!!!

“으헉!!”

우당탕탕 발로 걷어차이며 쫓겨난 서이수의 등 뒤로 냉정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서이수는 차인 등을 부여잡으며 어이없는 탄식을 흘렸다.

“헐.”

나 지금 쫓겨난 거야? 맞는 말 했다고? 황당한 마음에 입만 뻐끔거리고 있던 그는 이내 와락 얼굴을 구기며 문 쪽으로 소리쳤다.

“야, 이 고집불통아-!!! 왜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긴 부려-!! 네가 아빠냐?!!!”

서이수는 씩씩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 문을 열고 다시 들이닥쳐 따질까 잠시 갈등했으나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아 그만두었다.

“나도 너랑 얘기 안 해!!!”

쾅! 대신 그는 성질을 못 이기고 문을 강하게 걷어찼다. 하지만 문 안쪽에선 관심을 끊은 것처럼 아무 반응도 없었다.

“윽…!”

그의 눈가에 분노를 이기지 못한 눈물이 설핏 고였다. 그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서이수는 팔로 벅벅 문지르곤 발에 힘을 주며 들으란 듯이 쿵쾅쿵쾅 계단을 내려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고찬영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그의 시선이 닫힌 문으로 향했다가 그 앞에서 심란한 듯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 이를 향했다.

“미움받은 것 같은데, 괜찮겠어?”

“?!”

말을 걸자 서이나가 눈에 띄게 놀란 것처럼 몸을 크게 떨었다. 아무래도 서이수에게 정신이 팔려 그의 존재를 잠시 동안 완전히 잊었던 모양이었다. 고찬영은 그 사실에 제 존재감이 그렇게 옅었나, 기분이 묘해졌지만 이내 그녀의 동생 사랑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크게 괘념치는 않았다. 그는 살짝 어깨를 으쓱인 후 벽에 툭, 몸을 기대며 서이나에게 말했다.

“친구님. 아까도 말했지만 너무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마.”

“…….”

서이나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어딘가 복잡한 눈동자였다. 고찬영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싱긋 미소 지었다. 서이나는 말없이 짓는 그 미소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곤 작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어딘가 한풀 꺾인 듯한 자세였다. 아니, 피곤한 건가. 뭐가 됐든 대화할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그에겐 좋은 징조였다. 조금은 제가 알던 이의 모습과 가까워진 듯했으니 말이다. 고찬영은 그녀 몰래 만족스럽게 웃으며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뭐가?”

그러자 서이나의 낯이 조금 구겨졌지만 그녀는 못마땅해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정태우 일. 그거 어떻게 알았냐고.”

“후후. 그건 바로 내 일급 정보원…! 아, 미안 미안. 그만 장난칠게.”

좀 더 놀리려던 고찬영은 철컥, 돌아가는 문고리에 항복의 의미로 손을 뻗으며 황급히 말을 돌렸다.

“현호야. 현호.”

“…현호? 이현호?”

“오, 역시 알고 있네.”

아. 서이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가 이현호와 개인적으로 만날 사이도 아니니만큼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아는 고찬영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현호 이야기를 그렇게 자주 했나 보네. 이름 기억해 줘서 기쁜걸? 분명 현호도 기뻐할 거야.”

“아…, 어, 응.”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자 그녀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거짓말 못한다니까. 하지만 굳이 지나간 이야기를 다시 들춰낼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던가.

“아무튼 현호가 친구님을 발견했어, 그런 후에 나한테 연락했고.”

…그렇게 된 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찬영은 그때의 일을 잠시 회상하는 듯한 서이나의 옆모습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친구님은 모를 거야.”

“…….”

“그래도 다행이야. 멀쩡해 보여서.”

따스한 말이 그녀에게 닿았다. 하지만 서이나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의 그녀로선 그의 다정함은 너무나도 무겁고 낯설며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찬영은 포기치 않고 그녀를 또 불렀다.

“친구님.”

그리고 그는 계속 하고팠던 말을 꺼냈다.

“체육 대회 때 나한테 한 말 기억해?”

“……?”

난데없는 말에 서이나가 고찬영을 보았다. 고찬영은 저를 마주하는 시선이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답지 않게 기운 빠진 얼굴 하고 있다고 했었던 거.”

“…….”

“그거, 친구님한테 돌려줄게.”

팡-. 그의 손이 가볍게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기운 차리라는 의미를 가득 품은 손이 토닥여 주자 그녀가 어딘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학교 안 나오는 거나 연락 안 되는 거? 뭐, 당분간 재미는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상관없어. 내가 여기로 오면 되니까.”

후후. 그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그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위로하듯 툭툭 두드렸다.

“그럼 또 올게. 친구님.”

대충 할 말은 전했다. 그러니 그는 이쯤으로 물러나기로 했다. 다음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며 손을 가볍게 휘휘 저어 자신의 친구님에게 인사를 남겼다.

문을 열고 나오자 그의 등 뒤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하나 그는 그걸로 충분했다. 거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 아직 여지는 남아 있다는 소리였으니.

“흐음.”

그건 그렇고…. 계단을 타박타박 내려가던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체육 대회 날로부터 자꾸만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그간의 일주일은 그에게도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너무 이상하단 말이지.’

정태우의 성격상 대전 상대를 저렇게 멀쩡히 보내다니. 눈으로 직접 확인했음에도 어쩐지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현호의 말로는 다음을 기약까지 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정태우의 성격을 고려하건대 조커와의 싸움은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처우는 확실히 그답지 않았다.

‘그렇게 쿨하게 보내는 건 실력이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을 때일 텐데….’

정태우는 약한 자를 싫어한다. 약하면 약할수록 그다음은 더 기어오르지 못하게 밟는다. 그는 그러한 성격이었다. 정태우가 온전히 보내 줄 때는 정말 드문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 상대는 제가 알기론 한 부류였다.

강한 녀석.

왜냐하면 다음번에 또 싸우고 싶으니까. 그게 그의 유일한 이유였다.

그날 서이나의 좋지 못했던 상태를 고려해 보건대 그 싸움의 내용은 불 보듯 훤했다. 분명 정태우의 성에 찼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친구님의 프라이드를 생각해 보면 아픈 티를 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즉, 조커가 강하단 소문이 맞다는 걸 증명해 내지 못했을 확률이 농후했다.

‘강하단 걸 미리 알았던 것도 아닐 테…고…,’

멈칫. 건물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던 그의 발이 돌연 멈췄다.

‘아니, 알았던 건가.’

그 가정이 뇌리를 스치자 고찬영은 뒤를 돌아봤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이 꼬인 거지. 언제부터 안 거지. 아니, 어떻게 확신한 거지.

소문으로만 움직일 녀석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평범한 일반인을 자진해서 건드린 일이 없었다. 계획이라곤 없어 보이는 짐승 같은 놈이지만 그에겐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엄격히 지키는 편이었다.

“……혹시.”

그는 입안으로 나직한 속삭임을 흘렸다. 계속 찝찝하게 남고 풀어내지 못했던 숙제와 같던 장면이 있었다. 손에 걸리는 거스러미 같던 그것. 우연히 시선이 닿았던 것만으로 등골이 선연해지던 감각을 기억했다.

“…….”

그는 가볍게 턱을 두드리더니 핸드폰을 꺼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단조로운 컬러링이 들리고 머지않아 주인이 통화를 받았다. 고찬영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경희야. 난데. 잠깐 시간 있어?”

좀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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