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빈자리 (4)
***
‘큰일이다.’
안경희는 현재 얕은 패닉에 휩싸여 있다. 그녀의 손은 초조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처럼 책상을 가볍게 두들겼다. 이걸 어쩌면 좋지, 하고 수십 번 되뇌어도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잠시 머리를 감싸며 이리저리 헝클이다가 다시 고개를 슬쩍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바뀌지 않았기에 그녀는 울상을 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탄식을 중얼거렸다.
“…으으. 일이 너무 커졌어….”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정보였다. 제가 감당하기에 큰 정보들이 우후죽순 밀려들었다. 설마 이게 이렇게 연결되고, 저게 저렇게 연결되다니! 생각지 못한 정보들의 연결점에 그녀는 심란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냥 누군지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처음엔 그저 고찬영이 대체 누굴 보고 그렇게까지 창백이 파리해졌는지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혹여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 싶어 누군지만 확인해 보자는 심정뿐이었다. 그래서 체육 대회 진행을 위해 설치되었던 HD 그룹의 카메라 기록 데이터베이스를 뒤지고자 했다. 다행히 그 총괄자이자 차기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한도훈의 허가에 의해 그녀는 마음 편히 정보 조사에 착수했다.
그렇게 안경희가 순조롭게 보안을 뚫는데 거의 성공했던 와중이었다. 돌연 무대가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우상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안경희는 그 사실에 분개했고 이 내막을 파헤치는 데 한도훈에게 이번에도 조력을 더해 주기로 했다. 그녀의 일이 더 추가되긴 했지만 카메라 기록물을 뒤진다는 건 변치 않았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하루 이틀 정도만 학교를 쉬려고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혔다.
‘어, 이건…?’
안경희는 고찬영과 자신이 지나갔던 그 찰나의 타이밍, 그리고 그가 놀랐던 타이밍을 몇 번이고 리플레이해 보고 다각도 측면에서 찍힌 사진들을 대조해 본 결과 드디어 그 존재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존재는 너무나도 의외의 인물이었다.
처음엔 안경과 교복 때문에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카메라 화질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확인해 본 결과 그녀는 익숙한 인물을 발견했다.
‘저, 정태이…?’
바로 정태우의 쌍둥이 여동생, 정태이였다.
이,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안경희는 몇 번이고 안경을 추켜올렸다. 왜 정태이가 여기 있는가. 우리 학교에 대체 무슨 볼일이 있었던 건가. 제가 알기론 정태우의 쌍둥이는 현재 미국에 유학을 가 있을 터였다. 그저 재미 삼아 놀러 왔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녀의 고향이 부산임을 고려하면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저런 다니지도 않는 학교의 교복을 입고 저런 안경을 쓰고 있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서이나를 동경하면서 안경희는 일진들에 대해 많은 걸 조사했다. 혹여 그녀가 원한다면 즉각 알려 줄 수 있길 원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다른 놈들은 몰라도 사대천왕에 대한 인적 사항은 기본으로 꿰고 있었으니 현 사대천왕이자 전국 서열 1위인 정태우에 관한 정보는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즉, 안경희는 정태우의 가족들 얼굴조차 전부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고찬영은 왜 그녀를 보고 놀랐을까.
문제는 이 부분이었다. 아무리 쌍둥이라 닮았어도 그렇지, 고찬영이 그렇게까지 놀랐을 것 같지는 않았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 안경희는는 그녀의 종적을 모조리 쫓기 시작했다.
학교 CCTV와 HD 그룹 카메라 기록 베이스의 영상 및 사진을 모조리 뒤지고 뒤진 결과 정태이는 체육 대회 내내 거의 모니터 앞에 있었다. 그러다가 소란스러운 일이 생긴다 싶으면 그쪽으로 발을 옮겼고, 조금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다가 상황이 종료되면 사라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남자를 만났다.
‘어…. 이 사람은….’
나라사랑 님이다. 학교에서 마주친 이후로도 변함없이 열심히 사이트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사람은 꺼림칙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도 조금 석연찮았고 말이다. 나라사랑 님과 정태이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앗.’
나라사랑 님의 목이 졸려졌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눈 한 번 깜짝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안경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쪽으로 막눈이고 문외한인 저라도 알 수 있었다. 그 움직임이 보통이 아님을. 군더더기 없다는 표현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재빠른 반응이었다. 안경희는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태이가… 강하단 말이 있었나?
아니, 들은 적이 없다. 타지이긴 해도 정보는 들려온다. 정태이는 기본적으로 싸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사고라면 몰라도 싸움에 관해선 정태우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그런데 저렇게 익숙한 듯이 타인을 공격하다니. 혹시 제가 알고 있던 정보가 잘못된 걸까. 안경희는 혼란스러웠지만 침을 삼키며 이후의 행적을 다시 추적했다.
나라사랑님 과 헤어진 정태이는 학교를 떠났다. 여기서부터는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도로에 설치된 CCTV와 블랙박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안경희는 더 추적을 할까 고민해야만 했다. 도로 쪽의 CCTV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경희는 떨쳐 내기 힘든 불안감에 시간을 더 투자해 좀 더 파헤쳐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가 목격한 건 실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정태우?!’
그녀는 당장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난데없이 정태우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분명 정태이가 학교 인근에 있는 호텔로 들어가는 것까진 확인했다. 그래서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해 안경희는 빨리 감기를 재생 중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은 정태이가 아니라 정태우였다.
김율이 운전석에서 나올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긴 했다. 그는 정태우의 심복이긴 하나 그저 쌍둥이인 정태이를 경호할 겸 왔을 거라 추측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정태우가 등장하다니.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정이 스쳤다. 안경희는 제 가정에 망연히 입을 벌리다가 황급히 다시 데이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태이로 보이는 인물의 행적이었다. 안경희는 그녀의 행동을 더 면밀하게 살폈다. 며칠을 걸쳐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결과, 정태이가 알려 주는 행동에 대한 결론은 하나였다.
‘…이나를, 관찰했어.’
오소소. 그 사실을 완벽히 깨우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안경희는 긴 머리를 하고 있는 인물을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믿기가 힘들었다. 제아무리 싸움에 미친 인간이어도 그렇지, 정찰을 하기 위해 제 여동생인 것처럼 속여 여장까지 감행하는 경우는 쉽지 않았다. 정태우가 원래부터 여장이 취미이면 모를까. 하지만 이제껏 그런 정보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정말 모르던 정보일 수도 있었으나,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었다. 저 여자로 보이는 이는 제가 아는 정태우가 맞고 고찬영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봤다. 그래서 계속 불안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했다.
정말이지. 고찬영의 감은 얼마나 뛰어난 건가. 안경희는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자신은 이렇게 정보를 뒤지고 또 뒤지고 나서야 확신을 하는데 그는 단 한 번의 눈길로 그 존재를 명확히 파악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녀는 쓴웃음을 흘리며 다시금 모니터에 비치는 인물을 살폈다.
‘…정태우, …정태이.’
그런데 왜일까. 왜 이렇게 기분이 석연치 않을까. 이미 목표한 바는 달성했다. 서이나를 위험하게 만든 인물에 대한 조사도 정태우의 행적을 쫓으면서 병행했다 보니 진즉에 끝나 있었다. 그 정보는 이미 한도훈의 손에 들려 있었고, 더 자세한 내막은 한도훈이 파악해 줄 터였다. 그러니 자신은 이제 이 컴퓨터를 끄고 학교에 다시 가면 됐다.
…하지만 어째선지 계속 마음에 거슬리는 게 있었다. 뭔가 계속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안경희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이 뭘까, 뭘까 거듭 생각한 끝에 안경희는 번뜩 눈을 뜨며 박수를 쳤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안경희는 얼굴을 환히 밝히며 어떤 파일을 클릭했다. 그것은 이전에 주연희의 왕따 사건과 관계한 학교 폭력 사건의 주동자이자 가해자의 뒷배경과 더불어 최강혁의 뒷조사를 줄곧 해 왔던 집단이 가지고 있던 정보였다. 그것이 왜 그녀에게 있는가. 이것은 한도훈과의 거래로 얻어 낸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도훈이 가지고 있던 USB는 안경희가 만들어 낸 해킹 프로그램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안경희는 USB에 탑재된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PC를 원격 조종 했고, 그 안에 있는 파일을 전부 빼돌렸다.
즉, 한도훈이 가진 그 파일은 안경희에게도 있다는 소리가 되었다.
한도훈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는 기대했던 것보다 별거 없었다. 이미 한도훈과 안경희가 알아낸 정보가 태반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그 당시엔 도박과 관련한 불법 사이트에 대한 내용을 위주로 훑었던 만큼 다른 내용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 한도훈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던 얼굴인 걸로 보아 그 조직은 꽤나 중요 지점이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조직의 수뇌와 연결되었던 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꼭꼭 숨겨 둘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 조직이 흑룡파의 말단이었던 걸 생각하면 당시에 더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넘어간 건 제 실책이었다. 흑룡파는 정태우와 정태이가 속한 조직이자 그 정태우가 차기 후계자로 서 있는 조직이다. 그러니 더 조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 사실을 깨우치자 안경희의 손을 더 빨라졌다. 이 파일 저 파일을 누르며 뒤지기를 한참, 곧 그녀는 어떤 파일에 다다랐다.
‘…비밀번호.’
다른 파일과 달리 이중으로 잠긴 파일이었다. 안경희는 본능적으로 이 파일이 중요한 정보임을 직감했고, 재빠르게 그 암호를 해제했다.
그리고 안경희는 눈앞에 펼쳐진 정보에 기함했다.
맙소사.
여러 장의 사진. 시간열로 나열된 정보.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이름들.
그것은 정태우와 정태이에 대한 행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안경희는 화면에 비치는 사진과 얼굴을 대조하며 혼란스러운 음성을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제가 흔히 알던 얼굴 옆엔 정태우가 아닌 ‘정태이’라고 선명히 기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