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62화 (262/306)

262. 빈자리 (5)

그리고 다시 현재.

“이걸 어쩌면 좋지….”

몇 번을 생각해도 당황스럽다. 일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안경희는 골치가 아파 와 머리를 싸맸다. 지난번엔 한도훈이 빽이 되어 준다는 믿음이 있기에 제 실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번은 독단적으로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속에 돌덩이 같은 부담이 훅 내려앉았다.

으으. 하고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머리가 아파 오는 정보들의 향연에 이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감이 오질 않았다.

파고들수록 호기심이 자극돼 열심히 발굴해 낸 제 잘못이긴 하나 설마 이렇게 이리저리 다 엮여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하진 않고, 가늠은 했으나 이렇게까지 판이 큰 줄은 몰랐다.

“설마 후계 문제랑 엮여 있을 줄은 몰랐단 말이야….”

정태우라 아니라 정태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을 때부터 설마 싶긴 했다. 원래라면 흑룡파의 후계는 어떻게 봐도 정태우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흑룡파는 현재 정태우와 정태이 두 사람의 후계 문제로 파가 갈리어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대다수의 간부가 정태… 그러니까 진짜 정태이를 배척한 상태라는 점이었다. 간부 지차용을 필두로 대부분의 간부와 척을 진 정태이에게 있어 그녀의 편이 되어 주는 이는 극소수였다. 흑룡파 보스인 정채식은 정태이를 지지해 주는 것 같았지만, 그걸론 한계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태이가 후계자 후보에 오를 수 있던 것은 정채식의 독보적인 지지였을 터였다.

안경희는 흑룡파의 말단으로 추측했던 사무소 주인이 생각보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걸 파악했을 때부터 그의 대화 내역을 모두 조사했다. 사무소 주인은 꽤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는지 전화 통화 기록부터 메시지 기록까지 전부 파일로 보관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로 철저히 조사하고 정리하는 인물이니 간부가 일을 맡긴 걸지도 모른다. 덕분에 안경희는 알지 않아도 되는 조직의 비밀 정보까지 전부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정태이의 싸움은 정식 후계를 차지하기 위한 일련의 시험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그 실력을 증명해야 하며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녀가 조직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과제였다. 즉, 정태이에게 있어서 모든 이가 적이었고, 모든 장소가 싸움터였을 것이다.

안경희는 그 사실을 깨우치자 상상만으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로선 생각만으로도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정태이는 이 행위를 약 3년 동안이나 계속 해 왔다. 미친개나 싸움광이라고 불리는 고찬영보다 더하다면 훨씬 더했다. 고찬영은 그래도 양지에서 주로 활동한 편이라 이름이 그렇게 날린 것뿐, 정태이는 그보다 더 혹독한 곳이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음지에서 활동했던 탓이었다. 이것은 아마 일반인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그녀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절대적인 패왕이라는 이름은 괜히 탄생한 게 아니었다. 정태이는 그렇게 3년간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 온 것이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왜 굳이 자신의 형제의 이름을 써 가면서까지 남장을 했던 것일까. 이런 방식은 그의 형제의 위상만 높여 줄 뿐. 자신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을 텐데. 이와 관련된 정보는 기록되어 있질 않아 안경희는 난색을 표했다.

“…어찌 됐건, 이 정보는 비밀로 부치자.”

후계와 관련된 것도 그렇지만, 지차용의 배후에 있는 인물인 백장미, 곧 백화 재단의 비리도 엮여 있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서이나가 강한 사람이란 건 알지만 역시 조직 폭력배의 싸움에 휘말리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 그래도 도훈이한테는 미리 말해 둬야겠다.”

안경희는 아무 데나 내팽개쳤던 핸드폰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도 이 데이터를 가지고 있을 테니 열어 볼 수 있는 경로만 알려 주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한도훈은 제가 보내 준 영상을 기반으로 이미 백화 재단의 사주로 무대를 망가트린 기술자에게서 실토를 받고 있는 도중일지도 모른다. 서이나를 다치게 만든 원흉은 자신도 용서할 수 없으니 이 정도의 정보는 넘겨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기업적인 측면으로 보면, 정세가 어떻게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있지만 말이다.

지이잉-.

그때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덕분에 안경희는 책상 어느 한편 종이 더미에 파묻혀 있던 핸드폰을 찾아냈다. 그녀는 발신인을 확인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네. 여보세요?”

[아, 경희야. 난데. 잠깐 시간 있어?]

“어, 어. 응. 찬영아. 무슨 일이야?”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지. 때마침 하던 일이 전부 마무리되었기에 그녀는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다행이다. 최근에 너도 바빠 보여서 걱정했는데. 하하.]

최근? 안경희는 그 말에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다가 날짜를 보았다.

“어…?! 어, 나, 이, 일주일이나 지났었어???”

대체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그녀는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날짜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분명 이혜인에게 당분간 바빠서 학교를 못 간다고 연락을 넣었던 것도 같은데?!

“앗.”

그 메시지의 날짜를 다시 살펴보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그 메시지도 알고 보니 거의 일주일이 지난 상태였다. 으으. 안경희는 그 사실을 자각하자 뒤늦게 피로가 확 몰려왔다. 어쩐지 눈이 너무 건조하더라. 정보를 파헤치는 데 너무 몰두해서 시간 감각이 지나치게 모호해져 있었다. 중간중간 쪽잠을 잔 기억이 있긴 하나 그걸로는 택도 없을 터였다. 아무래도 좀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피로한 목과 어깨의 근육을 풀어 주며 눈을 비볐다.

‘으… 이나랑 혜인이 걱정 많이 했겠다. 내일은 학교 가야지.’

아마 이혜인이 서이나에게 잘 말해 줬을 것 같지만 정황상 제가 아무 말 없이 잠적을 탄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서이나가 걱정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왠지 설렘으로 두근거려 왔다. 갑자기 내일 하루빨리 그 그리운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안경희는 헤벌쭉 웃었다.

“아, 맞아. 근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가벼운 안부나 심심풀이용 문자는 자주 해도 고찬영이 제게 이렇게 전화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안경희는 의자에 기댄 채 기지개를 쭉 켜며 점점 감겨 오는 눈을 억지로 깜빡인 채 용건을 물었다.

[아, 별건 아니야.]

아. 별거 아니구나. 안경희는 가벼운 서두에 대수롭지 않게 멍한 머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통화는 금방 끝나겠네, 하고 생각을 하던 때, 고찬영은 정말 별일 아니란 것처럼 평이하게 폭탄을 던졌다.

[체육 대회 날에 혹시 정태우가 학교에 왔는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우당탕탕-!!!!! 안경희는 기지개를 쭉 켜다 말고 뒤로 넘어갔다. 덕분에 요란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고, 그 소리는 당연히 핸드폰 너머에도 전달이 되었다.

[어, 방금 엄청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고찬영이 제 핸드폰은 미심쩍게 바라보며 말을 건네 왔다. 하지만 정신이 여러 의미로 확 든 안경희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

“어, 어, 어떻게 그걸…!”

[어? 뭐야. 벌써 조사했어?]

합. 안경희는 제 실수에 반사적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고찬영은 다 들은 뒤였다. 그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흘리며 뜸을 들이더니 떠보듯 입을 열었다.

[혹시 긴 가발이나 안경 쓰거나 그랬어? 교복은 그 누구지. 백설 여동생 다니는 부속 고등학교? 거기 교복을 입었다거나….]

“헉.”

정확한 포인트를 집는 상세한 설명에 안경희는 경악했다. 하지만 그 반응을 똑똑히 들은 고찬영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얘는 진짜 뭐 하는 애지.’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기이한 것을 보듯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았다고 한다. 한 명은 이게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짐승 같은 직관력에 기함했고, 다른 한 명은 제가 말했지만 이걸 대체 어떻게 조사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놀라워했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새삼 두 사람은 서로가 너무 다른 사람임을 인지했다.

[어, 그래. 아무튼 그 녀석이 정태우가 맞다는 거지?]

“아, 어, 응.”

어딘가 떨떠름하긴 했지만 확인하고픈 내용은 정확히 전달받은 고찬영이 알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하아. 그래. 아무튼 그게 정태우가 맞다는 거지…. 어쩐지 봐준 게 이상하더라.]

“응?”

봐줘? 뭘?

안경희는 의구심이 드는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경희… 혹시, 너 몰라?]

그걸 또 기가 막히게 들은 고찬영이 되물었다. 당연히 알 거라 생각하고 했던 말인데 어딘가 석연찮은 반응이었다. 안경희는 그 물음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대답했다.

[어…. 진짜 모르나 보네.]

고찬영은 정말 생각도 못 한 대답에 당황했는지 난처히 목을 쓸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한숨을 쉬듯 대답했다.

[친구님, 정태우한테 싸우고 졌어. 체육 대회 날에.]

“뭐?!”

안경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그날 친구님 상태 안 좋았던 거 알지? 아마 정태우도 그걸 간파하고 그냥 보내 준 것 같아. 재대결까지 잡고. 그 이후로 친구님 학교도 안 나오고 연락도 다 끊고 맹훈련 중이야.]

안경희는 그 정보에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황급히 바라보았다. 통화 모드를 백그라운드로 보낸 채 핸드폰을 살펴보자 그제야 보이지 않던 이질감을 발견했다.

제가 두문불출하던 일주일간… 서이나의 안부 문자가 한 통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안경희는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아찔한 충격에 잠시 정신을 놓았다. 핸드폰 너머로 고찬영이 그녀의 이름을 연신 불렀으나 쉽사리 그녀의 정신은 깨어나질 않았다.

서이나가 졌다. 제 우상이 졌다. 정태우… 아니, 정태이한테. 정태이는 서이나를 봐줬다. 그것은 이후의 재대결을 위한 것. 그로 인해 서이나가 모든 걸 끊어 내고 훈련에만 매진한다. 정태이는 수시로 자신을 후계자로서의 증명을 끊임없이 해내야만 한다.

자신이 일주일간 놓치고 있던 정보들이 나열되었다. 그리고 그 일주일간 분석했던 정보가 한순간에 맞물렸다.

이 뜻은 결국…!

“아, 안 돼….”

털썩. 안경희는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경희야?]

고찬영이 그런 그녀의 심상찮은 반응에 의아한 듯 그 이름을 불렀다.

“차, 찬영아….”

안경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잠을 자지 못해 피로해진 머리와 한순간에 타격을 입은 정신은 그녀의 심리를 심각할 정도로 불안으로 몰고 갔다.

“으어어어. 어, 어뜩해?”

[경희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 어, 찬영아, 이거 어떡해…?! 어, 윽, 어어…?”

[겨, 경희야?]

잔뜩 울먹이기 시작한 목소리에 고찬영이 당황한 듯 안경희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그의 부름에 기폭제가 된 것처럼 한순간에 담아 두던 것이 모조리 폭발하고 말았다.

“이나 위험해졌단 말이야아…!!”

엉엉엉엉! 모든 잡념이 터져 버린 그녀의 방 안엔 한동안 대성통곡이 울려 퍼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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