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빈자리 (6)
***
짹짹. 맑은 날씨를 축복하는 것처럼 새가 기쁨의 지저귐을 울렸다. 그리고 간간이 울리는 배기음의 소리가 고요한 도로를 지나가며 적막한 동네를 작게 울리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만이 적적한 방 안을 채워 갔다.
지이잉-. 그때 작은 진동음이 적막한 내부를 깼다. 그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천을 스치는 작은 울림이 퍼졌다.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방이었으나 주인은 있었다. 침대의 정중앙을 차지한 장신의 남성은 팔로 눈을 가린 채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연이은 소음에 방의 주인이 팔을 치워 냈다. 그러곤 느릿하게 눈을 뜨며 낮게 음산히 중얼거렸다.
“어떤 개새끼가 자꾸 지랄이야….”
스산하게 낯을 가라앉힌 그의 얼굴엔 깊은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그를 아는 누가 들었으면 그답지 않은 과격한 언사와 그에 못지않은 분위기에 흠칫 놀랐을 법한 일이었으나 방 안엔 그 혼자뿐이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는 욕설을 거의 섞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욕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표현할 기회가 극히 없었을 뿐….
그렇다. 즉, 방 안의 주인인 반휘혈은 현재 짜증과 불만과 화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럼 반휘혈은 왜 이렇게 화가 났는가? 이유는 당연하게도 단 하나였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 앞으론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자.’
울컥. 반휘혈은 요 며칠간 수십 번을 되뇌고 또 되뇐 그날의 일을 다시 생각하고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꽉 쥔 주먹에선 우드득, 하고 살벌한 소리가 울렸지만 그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반휘혈, 너 나 좋아해?’
울컥.
‘…뭐, 상관없어.’
울컥. 울컥.
‘어차피 네가 좋아하든 말든 난 거절할 거였으니까.’
빠직.
쾅! 반휘혈은 주체할 수 없는 빡침에 침대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자 스프링이 살려 달란 소리를 냈으나 그의 화를 멈출 수는 없었다.
벌떡. 반휘혈은 치솟는 화에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지만 얼굴 곳곳에 치솟은 혈관이 그가 얼마나 성질이 나 있는지 증명했다.
반휘혈은 정말 화가 났다. 다 끝난 이야기를 들먹이질 않나, 이젠 모르는 사람이 되자니. 제가 왜 약혼자라는 말도 안 되는 것까지 끌어들이며 그 지랄을 떨었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반휘혈이라고 해서 매번 억지를 부리고픈 마음은 없다. 그저 누나와 잘 지내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서이나는 딱 보기에도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질 않았다. 당시 반휘혈은 화가 났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잠시 시간을 주려 했다. 하지만 서이나는 면전에 대고 제가 그토록 듣기 싫은 말을 못 박았다.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넘어가려는데 왜 그 사달을 만드는가 도무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짜증 나는 건 제가 그 당시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멍청히 서 있다는 점이었다.
“젠장.”
그는 머리를 헝클었다. 심란하고 복잡한 머리는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 했지. 다른 녀석 앞에서는 당당히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서이나가 그런 소리를 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목이 콱 졸린 것처럼, 심장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내뱉지 못했다. 무언가 넘치는 것 같긴 했으나 자각할 새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그 아파트를 빠져나와 집에 도착한 뒤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직 서이나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상태로 마주하게 된다면 스스로도 어떻게 나올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 거면 똑바로 해.’
빠드득. 그의 잇새로 강한 울림이 퍼졌다. 몇 번을 다시 떠올려도 오장육부가 뒤틀렸던 그 발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화가 났던 그 자식의 말. 그것은 지난날 고찬영이 반휘혈에게 경고했던 말이었다. 왜 하필 그 말이 지금 생각나는가. 잊을라치면 자꾸만 불시에 떠올라 신경을 자극한다. 안 그래도 짜증으로 잿더미가 되어 가는 신경에 부채질만 하는 꼴이었다.
웃기지 마. 난 똑바로 하고 있어.
똑바로 하고 있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저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부딪치며 보여 주는데도 자꾸만 이상하게 엇나갔다. 여기서 뭐가 더 부족한 거지. 도대체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건가. 그의 감정은 조금만 건드리면 터질 것 같으면서도 막상 터지지 않는 위태로운 풍선 같았다.
그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얼굴을 쓸어 냈다. 혀를 차며 거친 마음을 달래는데 거슬리는 소음이 귓가에 자꾸 울렸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이이-.
아까부터 진짜 짜증 나게! 반휘혈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대로 곧장 던져 버려서 조용히 만들려고 했던 그의 머릿속으로 불쑥 하나의 가정이 스쳤다.
누나면 어떡하지.
그러자 놀랍게도 힘줄이 잔뜩 돋았던 그의 손에서 힘이 슬쩍 빠졌다. 살벌하게 굳혔던 그의 인상이 조금씩 풀리며 입가를 삐죽 일그러트렸다.
딱히 화가 풀린 건 아냐. 그는 꿍한 얼굴로 그리 생각하며 핸드폰을 눌렀다.
[고찬영 : 애들아~ 질문질문!]
[이재현 : ?]
[이재현 : 무슨 일이세요?]
그리고 보이는 내역에 바로 얼굴을 구겼다. 다시 곧장 꺼 버리고 정말 내던지려던 반휘혈은 이어진 메시지의 내용에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고찬영 : 혹시 운동하는 애들 뭐 먹는지 알아? 지난번에 친구님한테 마카롱 들고 갔다가 빠꾸 먹었쩡.....]
[고찬영 : 힝...(T▽T)]
허어?
반휘혈은 얼굴이 황당으로 살풋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서이수 : 아, 걍 가지마가지마 뭘 또 가. 걍 굶어뒤지라 해]
[이재현 : 이수야........]
[고찬영 : 무슨 그런 섭한 말을! 누나가 들으면 엄청 서운해하겠다! 안 그래도 외롭게 매일같이 훈련 중인데! 이 잘생긴 친구라도 매일 가줘야 외롭지 않지!]
뭐? 반휘혈의 손이 움칫, 떨렸다.
[이재현 : 와. 형 저번주부터 진짜 매일 가는 거예요?]
[김시원 : 매일?]
[이재현 : 아, 응. 누나 학교도 안 나오고 훈련한대. 그리고 찬영이 형이 매일 놀러간다고 하더라.]
[김시원 : 아하...]
[서이수 : 그만 좀 와]
[고찬영 : 싫어^^]
“…….”
대화 내용을 잠자코 지켜보던 반휘혈은 다시금 그 내용들을 요약했다.
서이나는 현재 자신에겐 연락이 없고, 고찬영이란 놈은 만난다.
뚝-. 그 사실에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의 눈에 연이어 이어지는 메시지의 향연은 더 보이지도 않았다.
“…허.”
차가운 비소가 작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는가 싶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쾅-!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강하게 닫혔다. 서슬 퍼렇게 뜬 눈 위로 이마에 핏대가 선명히 잡혀 있었다.
당면하면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이젠 알 바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원래부터 반휘혈이란 사람은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빠른 이라는 사실이었다.
***
기기긱. 철컹.
사람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하지만 목이 죄이든 말든 눈이 반쯤 돌아가기 시작한 남자는 이를 바득 깨물며 고통 따위 무시하듯 성큼 발을 움직였다.
파사삭.
벌어졌던 쇠사슬의 금이 조금씩 더 깊이, 선명히 새겨지고 있었다.
호오.
그것을 지켜보던 시프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파멸의 아이는 운명의 사슬조차 파괴할 셈인가.]
이거 대단하군. 흥미로운 웃음소리가 허공에 나직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곧 그 소리와 같이 그의 현상도 유유히 사라졌다.
***
‘친구님, 안녕~.’
‘친구님, 오늘도 건강해 보이네~.’
‘친구님, 오늘 안색은 별로네? 훈련이 많이 힘든가 봐.’
‘친구님. 짠-! 이게 뭔지 알아? 저번에 맛있다고 했던 마카롱이야! …어? 먹으면 안 된다고? 하나도?!’
다시 오겠다고 내 앞에서 선언한 이후로부터 약 2주일. 고찬영은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찾아왔다.
몇 번이나 오지 말라고 했다. 또 오면 스파링 뜰 각오로 오라고 협박 비슷한 것까지 했다. 하지만 고찬영은 되레 설레는 얼굴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어, 진짜? 그럼 한번 붙어 볼까?’
…잠시 잊고 있었다. 저 새끼가 원래는 싸움광이라고 불렸던 놈이란 걸. 그런 놈이 최강혁과의 결투를 거절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지만, 아무튼 쫓아내려던 내 계획과 달리 얼결에 링 위에서 스파링을 붙고 말았다.
‘친구님. 거기 그렇게 접근하면 안 돼. 정태우는 그렇게 정석적인 놈이 아니야.’
‘여기서 돌로 치면 어쩌려고?’
‘어이쿠, 눈 위험하다.’
게다가 더 열이 뻗치는 건 그의 조언이 꽤나 인상 깊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전생의 기억을 기준으로 훈련에 임하던 나는 그 사실에 잠시 얼이 빠지고 말았다. 확실히 이 세계의 정태이는 길거리 싸움에 익숙할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 공식전과 같이 너무 정석적으로 가면 내가 불리했다. 그녀의 잠재력이 전생보다 더 뛰어남을 고려해 봐도 그 사실은 변하질 않았다. 그것을 깨닫고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자 고찬영이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건드렸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걔한테 전부 지긴 했어도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진 기억하거든.’
…이 새낀 정말 뭘까. 나는 진심으로 고찬영이 신기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정식으로 붙으니 이 녀석에게도 밀리는 감이 있는 것 같아 더 짜증이 났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최근에 익숙해졌다. 감이 잡히니 이제 그가 어떻게 공격을 해 올지 예상이 갔다. 고찬영은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 근데 뭔가 이상한데.’
오늘도 고찬영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나는 불현듯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상상했던 거랑 달라.”
왜 혼자가 아니지?
지금쯤이면 그냥 혼자서 샌드백에 매달리고 아빠의 코치를 중심으로 맹연습 중이었을 터였다. 물론 아빠와의 집중 훈련은 하고 있다. 기초 체력, 지구력, 맷집 등 모든 걸 다시 키우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나 혼자만의 싸움이 되어야 할 터인데 왜 고찬영이 끼어 있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심란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훈련은 혼자인 게 익숙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모르겠다. 어느샌가 고찬영이 너무 자연스럽게 합류한 탓에 기분이 굉장히 생소했다. 낯선 감각에 가슴이 술렁였다. 그것이 어색해 나는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뚱하니 노려봤다.
“…됐다. 아빠도 허락한 마당에 내가 무슨 소리를 더 한다고.”
아빠도 고찬영이 훈련을 도우는 걸 허락했다. 그걸로 이미 끝난 사안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처음엔 경계했던 것도 잊고 고찬영의 재능을 탐내며 바라볼 정도인데 말이다.
“…배고파.”
왠지 오늘따라 텅 빈 배 안이 요란스럽다. 혹사당한 몸이 피로했지만 주린 배는 정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 보일 광경을 생각하니 내 얼굴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불편한데.”
내가 벌린 일이긴 하나 요즘 들어 서이수와 거리를 좀 뒀더니 서이수가 굉장히 쌀쌀맞아졌다. 눈이 마주쳤다 하면 나 삐졌다고 시위하는 것처럼 대놓고 피해 버린다. 그것은 식탁에서도 똑같았다. 그럼에도 내 고집을 꺾을 수도 없어 나도 같이 말을 안 하니 이런 꼴을 보여 결국 엄마에게 미안한 짓을 해 버렸다.
‘빨리 먹고 잠이나 자야지.’
나는 피로한 눈을 문지르며 어느새 다다른 집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 이나야. 어서 오렴!”
“……?”
그런데 어쩐지 엄마의 기색이 이상하리만치 환하다. 걱정 어린 시선만 받았던 요즘 들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엄마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어깨를 붙잡았다.
“오호호. 이나야. 어서 들어와. 얼른얼른!”
게다가 어딘가 성급한 손길까지. 나는 어리벙벙한 낯으로 눈을 깜빡이며 황급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 엄마. 왜 그…”
어? 나는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보이는 한 인물에 눈이 저절로 크게 뜨였다.
“아니, 글쎄~.”
그런 내 등을 엄마가 흥분한 것처럼 찰싹찰싹 치며 작게 속삭였다.
“휘혈이가 너 만나고 싶다고 놀러 왔지 뭐니!”
왜 네가 여기 있어. 반휘혈…!
나는 눈앞에 있는 반휘혈을 보며 소리 없이 경악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