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64화 (264/306)

264. 빈자리 (7)

툭. 당황으로 굳어 버린 나는 들고 있던 보스턴백을 바닥에 떨구었다.

“…….”

우아하게 고급 차를 마시는 것처럼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던 반휘혈이 찻잔…이 아니라 주스 컵을 달칵, 내려놓았다. 그러곤 여유로운 자태로 내게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마주쳤다. 마주친 시선에 나도 모르게 움찔 굳어 있는데 놀라운 건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서 와.”

싱긋. 그의 눈이 살짝 휘고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며 나를 반겨 주었다.

‘미친. 누구세요.’

화사한 웃음과 함께한 환영에 나는 소름이 쫙 돋아 버렸다. 아니, 반휘혈이 화사해? 내 눈이 드디어 미친 건가? 운동하다가 눈이라도 다쳤었나?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며 나는 덜덜 떨리는 동공을 주체하질 못했다. 그런 사이에 반휘혈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스 잘 마셨습니다. 어머님.”

히이이익. 나는 연이은 그의 발언에 온몸에 닭살이 쫙 돋았다. 저 새끼 누구야!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는 두 팔을 붙잡고 돋아난 소름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어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어머, 호호호. 인사성도 좋지. 우리 휘혈이가 안 본 사이에 더 의젓해졌네~.”

아냐. 엄마…! 지금 엄마는 속고 있는 거야! 저런 게 반휘혈일 리 없다. 반휘혈은 저딴 식으로 눈웃음치면서 가증을 떨고 있을 놈이 아니었다. 나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저 반휘혈의 가죽을 덮어쓴 의미 모를 인간을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이변이라도 생긴 건가?’

혹시 모른다. 나처럼 다른 세계의 반휘혈이 이 세계로 왔다든지…! 운동한다고 잠적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난 건가. 물론 나는 내 기억에 없지만 이 세계로 오면서 이곳의 서이나와 시프란 양반과 무슨 거래를 한 것 같긴 하다만, 저 녀석이라도 안 그럴 보장은 없었다. 나는 얼굴을 굳히며 신중하게 반휘혈을 살폈다. 그러다 녀석과 불현듯 눈이 마주쳤다.

“……!”

어, 방금…?

“아뇨. 딱히 그렇지도 않은걸요.”

반휘혈이 도로 엄마를 향해 시선을 바꾸며 싱긋 웃었다. 그러곤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데 제가 누나랑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을까요?”

양해를 구하는 그 태도는 녀석을 알지 못하는 타인이 보기엔 퍽 순해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전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몇 초 전 마주친 눈길을 생각하면 더더욱.

‘저 자식… 나랑 눈 마주칠 때 안 웃었어…!’

한순간이었지만 냉기가 팍팍 날리는 시선이었다. 지나치게 찰나라 엄마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녀석을 예의 주시했던 나는 똑똑히 보았다.

“어머, 그래야지! 원래 이나 만나러 온 걸 텐데 아줌마가 너무 반가워서 오래 붙잡았다. 아, 방에 들어가서 얘기할 거지?”

“괜찮다면요.”

“어머~ 별일이야. 얼마나 있으려구! 아줌마는 웬만한 건 다 괜찮아. 이나 아빠랑 이수는 좀 더 늦게 들어올 거 같으니까 걱정 말고 편-히! 느긋-하게! 얘기하렴!”

“엄마?!”

아니, 엄마, 어머님? 이정화 여사님?! 여기서 이렇게 개방적이시면 어떻게 합니까! 따님의 의견은 어디로 간 건가요?! 할 말이 굉장히 많았지만 너무 많아서 되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경악과 배신감 어린 눈길로 엄마를 보고 있는데 엄마는 내 시선을 무슨 의미로 해석했는지 반휘혈 몰래 엄지까지 들어 줬다.

‘엄마아아…!!!!’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든 말든 대화는 착착 진행되었고,

“아줌마도 방에 들어가 있을게! 누가 들을 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편히 대화해!”

탁, 하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방문이 비정하게 닫혔다. 너무 순식간에 이뤄진 일사천리에 벙찌며 닫힌 문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런 도중 드륵, 하고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휘혈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것도 그 가증스러운 미소를 단 채로.

“너…, 너, 왜 그래?”

진짜 영혼이 바뀌었으면 어쩌지. 바짝 긴장하며 물었으나 반휘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뭐가?”

오히려 그는 더 미소를 짙게 그리며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더 괴리감을 불러오는 건 아는가 모르겠다. 진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얘 영혼이 바뀌었나 의심이 더 박차를 가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방금 본 눈빛이 영 마뜩잖았기에 나는 떨떠름한 낯으로 그를 경계하며 물었다.

“답지 않게 왜 가…, 살갑게 굴어?”

가증스러운 미소를 짓는다는 걸 겨우 순화시켜 말하자 반휘혈은 영문을 모르겠단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어. 엄청. 나는 바로 정색하며 긍정하려다가 겨우 참아 냈다. 사실 마음에 안 드는 걸 떠나서 소름 끼치긴 했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상황만 악화시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호흡을 한번 크게 한 후, 침착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휘혈아. 너답지 않게 왜 그러는 건데. 진짜. …아니, 그보다 우리 집엔 왜 온 거야? 우리 이젠 아무 사이도…,”

쿠당탕-!!

말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난, 입을 도로 다물었다.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니 책상 한편에 세워져 있던 참고서들이 무너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 실수.”

받침대가 허술하네. 반휘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제 실수를 고했다. 그런데 어쩐지 저 고의적으로 뻗어 있는 듯한 손가락이 매우 수상했다. 하지만 굳이 꼬투리를 잡아 대화가 이상한 곳으로 빠지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번은 눈감아 주기로 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무 사이…,”

우당탕탕-!!!

“…….”

…이번엔 탁상시계였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녀석을 노려봤다.

“손이 미끄러져서.”

하지만 반휘혈은 여전히 능청스러운 웃음을 달며 계속 얘기하란 듯 손짓했다.

울컥. 나는 그 여유로운 손짓에 성질이 돋워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녀석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것 같았고, 그게 또 지는 기분이라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모른 척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쾅!

“우리 사,”

퍽-!

“우리 이제 끝…! 야, 잠깐 스탑-!!!”

떨어트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스탠드 전등까지 떨어트리려는 걸 목격하곤 나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가 그 팔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반휘혈이 붙잡힌 제 팔목을 힐끗 보더니 그제야 만족스러운 것 같은 미소를 빙긋 지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아오, 이 새끼를 그냥…!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던 예쁜 그의 미소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현재로선 내 눈앞에 있는 건 가증스러움 그 자체였다. 마음 같아선 그가 물건을 부수든 말든 전부 다 신경 쓰지 않고 내 할 말을 다 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두기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너 이 새끼, 층간 소음으로 아래층에서 올라오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까부터 쿵쾅쿵쾅! 이게 무슨 아파트 예의범절에 한참 어긋나는 행동이야…! 그대로 무시하기엔 층간 소음이라는 예민한 문제가 있었기에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솟구치는 혈압을 억누르기 위해 이마를 감싸 양쪽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 반휘혈. 알았어,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그 되지도 않는 얼굴부터 치우고 다시 얘기하자.”

어쩔 수 없었다. 이 녀석이 이런 서민의 고충 따위 알 거란 생각이 들지 않으니 내가 물러서는 수밖에. 하여간 이 새끼는 꼭 이렇게 사람 속을 한 번씩 뒤집어 놔야 속이 풀리나 보다.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반휘혈은 풀린 제 팔을 잠시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음에 안 들어?”

“뭐?”

그런데 이 자식이 또 뜬금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뭔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그를 보았다.

“왜 마음에 들지 않지?”

하지만 반휘혈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방금까지 그려 냈던 미소를 지운 채 진심으로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에 들 줄 알았는데.”

그러더니 그는 제 입가를 쓸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듯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뭔 개소리야, 저게.

하지만 정작 궁금해 미치겠는 건 나였다. 저 새끼 진짜 왜 저래? 사람이 갑자기 변한 듯 구는데 퍽이나 마음에 들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거나, 말하는 뉘앙스로 보건대 영혼이 바뀐 문제는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면, 혹시 회귀…? 심각하게 여러 가정을 추측하고 있을 때 반휘혈의 고저 없는 의문이 들려왔다.

“누나는 이런 거 좋아하잖아?”

“…뭐?”

난데없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며 그를 보자 그가 툭툭 책상을 두드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헤실거리며 살갑게 구는 거. 좋아하잖아.”

나를 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것은 감정을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눈이었다.

“뭐어??”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눈에 대한 이질감보단 내 황당한 심정이 더 컸다.

“무슨 미친 소리야?”

내가 그딴 가증스러운 가면을 좋아한다니. 웬 개소린가. 나는 어이가 없어 얼굴을 확 찌푸리며 반휘혈을 노려봤다. 그러나 반휘혈은 마치 당연하단 것처럼 내 말을 반박했다.

“좋아하잖아.”

“아니, 그니까 뭔 근거로…!”

“이재현.”

내 말을 자르고 튀어나온 것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름들에 내가 멈칫하고 있자 그 찰나에 반휘혈도 잠시 말을 입을 다물더니 이내 못마땅히 혀를 차며 툭 내뱉었다.

“그리고… 고찬영 그 새끼.”

나는 의도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엇…?”

잠깐만.

‘이렇게 헤실거리며 살갑게 구는 거. 좋아하잖아.’

…이렇게 헤실거리는… 거?

“…야, 야. 잠깐. 잠깐만. 너, 설마…?”

그의 의중이 짐작이 가기 시작한 내가 점점 경악으로 얼굴이 물들어 갔다.

이 자식, 설마… 설마, 그 녀석들처럼 행동해서 내 비위를 맞춰 주겠다는… 그 소리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믿기지 않는 생각이었다. 이 자존심 덩어리가, 겨우 나 때문에? 고집불통에 마이웨이 그 자체인 이 녀석이… 나란 사람 하나 때문에 그딴 짓을 한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의심을 향해 반휘혈은 곧장 반박하는 것처럼 책상에 팔을 대며 턱을 괴더니, 싱긋, 지워 냈던 미소를 다시 그림을 그리듯 자연스럽게 지어 보였다.

“이러면 이제 좀 마음에 들어?”

평소와 다른 어여쁜 미소가 내 시야를 어지럽혔고, 이질적이게만 느껴지는 나긋한 음성이 내 귓가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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